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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말러: 교향곡 8번 [2 SACD Hybrid]
말러 (Gustav Mahler) 작곡, 데이비드 진만(David Zinman) 지휘, 취 / SONY CLASSICAL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말 러 : 교향곡 8번 '2부' => 인발 (지휘) / 도쿄도 심포니> 감상후기
교향곡 8번, 내림 E 장조, “부제 : 천인 교향곡”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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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을 맞아 화려한 조명과 연주회가 개최되고 있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8번을 들었습니다. 말러 전문가 에루야후 인발의 지휘로 도쿄심포니, 도쿄도합창단, 어린이 합창단의 연주였습니다.
2008.4.30일 도쿄 산토리홀 연주 실황입니다
말러 8번 교향곡의 경우 무척 대곡이며, 1천인이 참석하는 교향곡이라 불릴정도로 대곡입니다.
대곡이니 만치, 만족감 있는 연주실황을 기대하게 되는데, 연주 음반보다도 실제 들을 기회가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쉬움을 주는 연주곡입니다.
오래되지 않은 도쿄공연으로 이곡 감상을 할수있는것도 행운인것 같습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 지는 이곡은, 강렬한 시작과 독창자들의 연이은 노래와 합창의 이어받음으로 이루어지는 1부가 약 20분 가량 펼쳐지고 나서, 2부로 넘어가서 1부의 재현과 2부 자체적인 리듬과 멜로디와 노래들을 들려줍니다.
개인적으로 1부를 조금더 즐겨 감상하게 되는데, 어느 락음악에도 비견할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사운드의 웅장함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얼마전 사이먼래틀이 프롬스 콘서트에서 연주한 영상을 보게될땐 그 흥겨움이 무척 크게 느껴지며, 수많은 합창단원들의 합창소리 그리고 일사불란한 연주와 지휘자의 통제된 모습에서 느껴지는 화합과 통제 그리고 웅장함의 모습이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이번 인발연주의 8번도 역시 그와같은 모습들을 여럿 볼수 있었고, 특히 마지막 피날레에서 지휘자의 지휘모습은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잘 보여준것 같습니다.
일본에서의 말러8번 연주를 보면서 느낀점 중의 하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부러움과 대국으로서의 면모를 느낄수 있고, 역시 지금현재는 우리나라보다는 문화적 국력적으로 선진국이나란 압도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러 8번 연주하는 독창자들의 얼굴, 합창단원과 어린이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와'하며 바라 보아야 하는 한국의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무척부럽게
느껴졌습니다.
올해말 우리나라에서도 장윤성 연주로 말러8번 연주 예정에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무척 궁금하게 느껴집니다.
올해계속이어지게될 말러 연주들의 감상에 더 집중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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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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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의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는
보헤미아 태생의
오스트리아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말러는 그의 생애 동안에는 위대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한 명으로서 가장 잘 알려졌으나, 그는 사후에 중요한
후기 낭만파 작곡가로 인식되었으며, 특히 그의 아홉 개의 완성된
교향곡과
연가곡 (특히 〈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죽은 아이를 위한 노래〉), 그리고
교향곡과 연가곡의 합성인 〈
대지의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작곡하였고, 교향곡을 길이와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야 모두에 있어서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올려놓았다. (그의 〈교향곡 3번〉은 일반적인 교향곡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긴 약 95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한다. 그의
교향곡 8번은 천 명이 넘는 연주자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교향곡 중에 가장 거대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갖고 있다.) 그는 그의 교향곡 일부에
니체 와
괴테 의
철학, 중세 종교
상징주의와 영성을 표현하는 가사를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이제 세계 주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기본 레파토리의 일부가 되었다.
전기 [편집]
7살의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는
보헤미아 지방 칼리슈트(Kalischt)의
유대인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모라비아의 이글라우로 이주했고, 말러는 거기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안 부모는 그가 여섯 살 때에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1875년에 열다섯 살의 말러는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율리우스 엡슈타인(Julius Epstein)에게서
피아노를,
로베르트 푹스(Robert Fuchs)에게서
화성학을,
프란츠 크렌(Franz Krenn)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3년 뒤에 말러는
빈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안톤 브루크너가 거기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말러는 거기에서
음악과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음악 선생으로서 일하면서 그의 첫 주요한 작곡 시도로서
칸타타 〈
탄식의 노래〉를 지었다. 이 곡은 경연에 참가하였으나 입상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1880년대, 말러는 지휘자로서의 그의 생을 바트 할(Bad Hall)의 여름 극장에서 시작했다. 그 다음 해부터 그는 차례로 큰 오페라 하우스의 지휘자 자리를 가졌다.
1881년에는
류블랴나,
1882년에는
올로뮈츠,
1883년에는 빈,
1884년에는 카셀,
1885년에는
프라하, 1886년에는
라이프치히, 1888년에는
부다페스트로 갔다. 1887년에, 그는 아픈
아르투르 니키쉬를 대신해
바그너 의
니벨룽의 반지를 연주하며 평론가와 대중 사이에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칼 마리아 폰 베버의 미완성 오페라
세 사람의 핀토의 완성된 연주용 판을 말들었으며, 그것의 성공으로 경제적인 보상을 받았고 또한 서서히 그의 명성이 높아지는 데에 기여했다. 그의 첫 장기 계약은
1891년의
함부르크 오페라에서였으며 거기서 1897년까지 머물렀다. 거기에 있는 동안, 그는 북오스트리아의 슈타인바흐 암 아터제(Steinbach am Attersee)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며, 휴가 기간 동안에 작곡에 집중, 그의
교향곡 1번과, 유명한 민요 시집에 기초한 가곡 모음집 '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로부터의 가곡의 대부분을 완성했다.
1897년, 서른 일곱의 말러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음악적 지위인 비엔나 오페라의 감독직을 제안받았다. 그 자리는 '황실' 지위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법에 따르면 그 자리는
유대인이 맡을 수 없었다. 독실한
유대교인이 전혀 아니었던 말러는, 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로 종교를 바꾸었다. 비엔나 오페라에서의 그의 십년은 비엔나 오페라의 레파토리와 예술적 기준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그의 치열한 성격과 주목할 만한 완벽주의, 그리고 완고한 의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의 작품이 말러가 오페라단을 맡았을 당시의 스타일에 부합했다면, 그의 지휘 하에서 대중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리고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말러는 매 해 아홉 달을 오페라단에서 일했고, 여름에만 작곡할 여유가 있었다. 이 여름을 그는 주로 마이어닉(Maiernigg)에서 보냈고, 그는 뵈르터제(Wörthersee)에 작은 오두막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교향곡 4번부터 8번,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기초한
뤼케르트 가곡과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그리고 그의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가곡의 마지막인
북 치는 소년을 작곡했다.
1902년에, 말러는 알마 쉰들러(
1879년–
1964년)와 결혼했고, 사이에 두 딸을 두었는데, 후에 조각가가 된
안나 유스티네 말러 ('Gucki'; 1904–1988) 와
성홍열로 다섯 살에 죽은 마리아 안나 ('Putzi'; 1902–1907) 였다.
첫째 딸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그에게 또다른 타격이 찾아왔다. 같은 해에 그는
심장병 (감염성 심장 내막염) 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운동을 제한하고 그의 걸음 수를 세도록 처방받았다.
오페라단에서의
예술적 문제에 대한 그의 완고함은 적을 만들어냈고, 또한
언론의
반유대주의적인 공격은 그를 더욱 괴롭혔다. 그의
1907년 오페라단 사임은 전혀 의외의 일이 아니었다.
말러 자신의 음악은 생전에는 널리 자주 연주되지는 않았고, 또한 대개 그리 반응이 좋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짧고 고전적 형태를 띤
교향곡 4번은 일각에서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이 큰 대중적 성공을 거둔 적은 거대한
교향곡 8번의
1910년 뮌헨 초연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 이후에 쓴 곡들은 그의 생전에 연주되지 않았다.
비엔나 오페라를 떠난 이후, 그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로부터의 제안을 받았다. 그는 1908년에 거기에서 한 시즌을 지휘했지만, 대체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선호하여 밀려나게 되었다. 그는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서 굉장히 호평을 받았지만, 메트 위원회 위원들의 선호도에서 밀려났다. 유럽에 돌아와서 결혼 생활에 위기와 알마의 불륜이 드러나고, 말러는
1910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한 번의 (그리고 분명히 도움이 된) 면담을 가졌다.
유서깊은
뉴욕 필하모닉과 지휘 계약에 서명하고 난 후, 말러와 그의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이 시기에 그는
대지의 노래와, 마지막 완성작이 된
교향곡 9번을 완성했다.
1911년 2월에 길고 힘든
뉴욕에서의 콘서트 시즌 도중에, 말러는
연쇄상구균 감염으로 크게 앓았고, 발열이 있는 상태에서 그의 마지막 공연 (프로그램에는 그의
교향곡 4번과 부조니의
Berceuse élégiaque 초연이 포함되어 있었다) 을 가졌다.
유럽에 돌아와 그는 파리로 옮겨졌고, 거기에서 가장 최근에 개발된 새
혈청을 접종받았다. 하지만 약은 듣지 않았고, 그의 요청에 따라 빈으로 옮겨졌다. 그는 거기에서 감염증으로
1911년 5월 18일, 나이 오십에 그의
교향곡 10번을 미완성 상태로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의 유언에 따라, 비엔나 외곽의 그린칭 공동묘지에 그의 딸 옆에 안장되었다.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고 말러가 말한 적이 있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태인으로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한다.”
작품 [편집]
교향곡 [편집]
초기(1~4번) [편집]
이 시기에 말러는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에 의한 노래에서 많은 주제를 차용했다. 때문에 이 시기를 '뿔피리 시기'라고도 한다.
- 교향곡 1번, D 장조, “부제 : 거인” (1884–1888)
- 교향곡 2번, C 단조, “부활” (1888–1894)
- 교향곡 3번, D 단조 (1895–1896)
- 교향곡 4번, G 장조 (1899–1901)
- 교향곡 5번, 올림 C 단조 (1901–1902)
- 주의 : 이 교향곡은 올림 C 단조로 시작하지만, 작곡가 자신이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서 “전체 교향곡의 조성을 말한다는 것이 어렵고, 오해를 막기 위해 조성 표시를 빼는 게 가장 좋겠다”라고 했던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 교향곡 6번, A 단조, “부제 : 비극적” (1903–1904)
- 교향곡 7번, E 단조, “부제 : 밤의 노래” (1904–1905)
- 교향곡 8번, 내림 E 장조, “부제 : 천인 교향곡” (1906)
- 주의 : 교향곡 7번과 8번 부제는 말러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다. 사실, 작곡가 자신은 7번과 8번 교향곡의 부제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교향곡 7번의 부제는 교향곡 1번, 6번, 8번의 그것만큼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
- 대지의 노래, 교향곡-연가곡 (1907–1908)
- 주의 : 이 곡은 교향곡과 연가곡 모두로 분류할 수 있다. 말러는 이 곡에 교향곡으로 번호 붙이기를 꺼려했는데, 이는 9번의 저주에 대한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이었다. 작곡자 자신의 피아노 반주판도 존재한다.
- 교향곡 9번, D 장조 (1909–1910)
- 교향곡 10번, 올림 F 장조 (1910–1911) (미완성; 연속된 '처음부터 끝까지'의 1945마디의 초고는 존재하지만, 상당 부분이 완전히 발전하지 못했고, 대부분이 오케스트레이션이 되어 있지 않다.)
- 다양한 완성본
- 아다지오와 푸르가토리오 부분, 에른스트 크레넥 (1924)
- 데릭 쿠크, 다음 사람의 도움을 받아: 베르톨트 골트슈미트, 콜린 매슈, 데이비드 매슈 (1960, 1964, 1976, 1989)
- 조셉 휠러 (1948–1965)
- 클린턴 카펜터 (1966)
- 레모 마제티 주니어 (1989)
- 루돌프 바르샤이 (2000)
- 니콜라 사말레와 주세페 마추카 (2002)
- 여러 위대한 말러 지휘자 - 라파엘 쿠벨리크, 레너드 번스타인,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 가 여러 가지 이유로 교향곡 10번의 다양한 '완성본' 중 어느 것도 연주하기를 거절했다. 특히 말러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브루노 발터는 10번 자체를 강하게 부정했다. 이 거절은 심지어 쿠크 버전에까지 확장되었다 - 쿠크와 그의 공동 작업자들은 말러를 제외한 그 누구도 절대 교향곡 10번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의 악보를 완성본이라고 표현하기보다 단순히 “초고의 연주 가능 버전”으로만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미하엘 길렌, 리카르도 샤이, 싸이먼 래틀 경 같은 현시대의 말러 지휘자들은 대부분 완성판을 수용하고 연주회의 레퍼토리로 올리고 있다.
성악곡 [편집]
- 탄식의 노래, 독창과 어린이 합창 혼성 합창 및 관현악 반주를 위한 칸타타 (1880)
- 주의 : 1880년은 초판이 완성한 해. 1901년 2월17일, 빈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초연됐을 때는 개정된 악보를 사용함.
- 세 개의 노래, 테너와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곡 (1880)
- 젊음에 대한 가곡과 노래, 피아노 반주의 열네 개의 곡 (1880–1891)
-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피아노 또는 관현악 반주의 성악곡 (1883–1885)
-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에 의한 노래, 피아노 또는 관현악 반주의 성악곡 (1892–1898)
- 죽은 북치기, 피아노 또는 관현악 반주의 성악곡 (1899)
- 소년 북치기, 피아노 또는 관현악 반주의 성악곡 (1901)
- 뤼케르트 가곡, 피아노 또는 관현악 반주의 성악곡 (1901–1903)
- 주의 : “아름다워서 사랑한다면”곡은 작곡자 자신의 피아노 반주에 의한 악보만 존재합니다. 연주회에서 연주되는 관현악 반주판은 말러 자신이 편곡한 것이 아닌 막스 부트만에 의한 편곡판입니다.
-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관현악 반주의 성악곡 (1901–1904)
- 주의 : 피아노 반주에 의한 악보도 존재. 그러나 제1곡인 “이제 빛나는 해가 떠오른다”의 피아노 반주판은 행방불명.
바깥 고리 [편집]
참고 문헌 [편집]
- 테오도어 아도르노, '말러. 음악적 인상학', 이정하 옮김, 책세상 2004. ISBN 978-89-7013-451-2.
- Adorno, Theodor Wiesengrund. (1996). Mahler: A Musical Physiognom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ISBN 0-226-00769-3.
- Blaukopf, Kurt. (1973). Gustav Mahler. Harmondsworth: Allen Lane. ISBN 0-7139-0464-X.
- De La Grange, Henry-Louis. (1995). Gustav Mahler: Vienna: The Years of Challenge (1897-1904) (Vol. 2).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0-19-315159-6.
- De La Grange, Henry-Louis. (2000). Gustav Mahler: Vienna: Triumph and Disillusion (1904-1907) (Vol. 3).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0-19-315160-X.
- Machlis, J. and Forney, K. (1999). The Enjoyment of Music: An Introduction to Perceptive Listening (Chronological Version) (8th ed.). New York: Norton. ISBN 0-393-97299-2.
- Sadie, S. (Ed.). (1988). The Grove Concise Dictionary of Music.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0-333-432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