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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말러 : 교향곡 1번 [두다멜 음악감독 취임 연주회]
로스 엔젤레스 필하모닉 (Los Angeles Philharmnic) 외 / DG (도이치 그라모폰)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말러 : 교향곡 1번 '거인'
=> 구스타보 두다멜(지휘) / L. A. 필하모닉, 월트디즈니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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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기 및 인지도를 많이 얻고 있는 두다멜이 상임지휘자로 있는 LA필의 말러1번 교향곡을 감상하였습니다.
미국LA에서의 연주답게 공연전 관객석에서 톰행크스의 모습 등을 볼 수 있었고, 지휘자를 비롯한 관객들 상당수의 복장이 검은색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메고 있어서 이곳이 헐리웃과 인접한 곳이구나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연주자들의 모습 또한 미국영화나 미드에서 보는 미국 배우들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한 얼굴들을 볼 수 있어 미국에서의 공연인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특징적인 것은 연주단원들 많은 수가 동양인들로 채워져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주 동안의 연주자들의 실력은 우수한 것으로 보였고, 두다멜의 이러저러한 지휘방향과 통제에 따라 두다멜이 의도한 화음과 소리 및 빠르기 박자를 충실히 소화해낸 연주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두다멜은 시몬볼리바르유스오케스트라 와의 공연의 모습을 기억하게 만드는데, 그런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이번 연주 감상을 앞두고도 그의 이런 인상과 모습이 LA필과의 조합을 통해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무척 궁금함을 더했습니다. 그리고 감상전 선입관은 무척 격렬하고 화려한 연주와 강한 사운드 때문에 LA필과 약간 궁합 맞지 않는 이상한 화음이 나오지는 않을까 내심 염려스럽기도 했습니다.
연주 감상의 결과는 전체적으로 두다멜이 말러1번을 너무 예쁘고 앳된 소녀 같은 연주스타일로 시작했다가 자신만의 화려하고 젊고 파워풀함이 약간 섞인 그러나 과도하지 않은 연주를 복합적으로 섞어서 연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두다멜은 이곡연주를 하면서 너무 화려하고 너무 급하지 않게 또 너무 힘만 앞세운 연주를 조심 또 조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1악장시작부터 중분까지, 그리고 2악장, 3악장 등에서도 상당부분 곡의 해석이 너무 인위적으로 시간지연 및 속도저하를 인위적으로 발생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스런 속도와 흐름으로 흘러가야할 음악이 지휘자의 지나친 개입으로 약간은 어색한 듯 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물론 두다멜의 이 같은 통제된 연주가 그의 오케스트라 장악력과 그만의 의도와 곡해석을 충분히 시현했다고 한다는 측면에서는 충분히 높게 평가 받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평소 일반적으로 듣는 수려한 말러연주와 달리 두다멜의 한 템포 두템포 멈칫멈칫 늦추는 듯 한 착착 끊어지는 연주가 독특한 재미와 즐거움과 짜릿함을 어떤 관객에게는 선사할 수 도 있었지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말러1번 연주동안 두다멜은 약간 느린 템포의 시작과 흐름을 통한 안정추구의 모습을 보여주어 무척 진중한 두다멜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곡이 빨리 진행해감에 따라 화려함과 파괴적인 사운드를 선보여야할 시점에서는 두다멜 특유의 화려하고 큰 소리 만들기로 곡해석을 해주었습니다.
앞으로 두다멜의 수년 후의 모습이 크고 희망적으로 기대되는 것은, 아직은 약간 높은 신뢰감과 완벽함을 주지 못하지만 오늘의 이 같은 연주에서 두다멜의 높은 음악적 장악력과 통제력 그리고 발전가능성 때문입니다.
그의 진중한 태도와 오늘 초반부 곡해석의 신중함과 앞으로의 공부, 발전, 해석의 새로움 등이 결합하여 두다멜이 발전하게 된다면, 지금의 그의 화려하과 탁월한 스피디하고 현대적인 소리제조능력이 결합하여 십 수 년후에 우리는 두다멜의 초절기교의 화려함과 깊이, 진중함, 음악적 의미와 깊이가 예술성이 높은 연주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미래가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훌륭한 연주 감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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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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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의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는 보헤미아 태생의 오스트리아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말러는 그의 생애 동안에는 위대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한 명으로서 가장 잘 알려졌으나, 그는 사후에 중요한 후기 낭만파 작곡가로 인식되었으며, 특히 그의 아홉 개의 완성된 교향곡과 연가곡 (특히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죽은 아이를 위한 노래〉), 그리고 교향곡과 연가곡의 합성인 〈대지의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작곡하였고, 교향곡을 길이와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야 모두에 있어서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올려놓았다. (그의 〈교향곡 3번〉은 일반적인 교향곡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긴 약 95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한다. 그의 교향곡 8번은 천 명이 넘는 연주자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교향곡 중에 가장 거대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갖고 있다.) 그는 그의 교향곡 일부에 니체 와 괴테 의 철학, 중세 종교 상징주의와 영성을 표현하는 가사를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이제 세계 주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기본 레파토리의 일부가 되었다.
전기 [편집]
7살의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는 보헤미아 지방 칼리슈트(Kalischt)의 유대인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모라비아의 이글라우로 이주했고, 말러는 거기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안 부모는 그가 여섯 살 때에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1875년에 열다섯 살의 말러는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율리우스 엡슈타인(Julius Epstein)에게서 피아노를, 로베르트 푹스(Robert Fuchs)에게서 화성학을, 프란츠 크렌(Franz Krenn)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3년 뒤에 말러는 빈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안톤 브루크너가 거기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말러는 거기에서 음악과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음악 선생으로서 일하면서 그의 첫 주요한 작곡 시도로서 칸타타 〈탄식의 노래〉를 지었다. 이 곡은 경연에 참가하였으나 입상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1880년대, 말러는 지휘자로서의 그의 생을 바트 할(Bad Hall)의 여름 극장에서 시작했다. 그 다음 해부터 그는 차례로 큰 오페라 하우스의 지휘자 자리를 가졌다. 1881년에는 류블랴나, 1882년에는 올로뮈츠, 1883년에는 빈, 1884년에는 카셀, 1885년에는 프라하, 1886년에는 라이프치히, 1888년에는 부다페스트로 갔다. 1887년에, 그는 아픈 아르투르 니키쉬를 대신해 바그너 의 니벨룽의 반지를 연주하며 평론가와 대중 사이에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칼 마리아 폰 베버의 미완성 오페라 세 사람의 핀토의 완성된 연주용 판을 말들었으며, 그것의 성공으로 경제적인 보상을 받았고 또한 서서히 그의 명성이 높아지는 데에 기여했다. 그의 첫 장기 계약은 1891년의 함부르크 오페라에서였으며 거기서 1897년까지 머물렀다. 거기에 있는 동안, 그는 북오스트리아의 슈타인바흐 암 아터제(Steinbach am Attersee)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며, 휴가 기간 동안에 작곡에 집중, 그의 교향곡 1번과, 유명한 민요 시집에 기초한 가곡 모음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로부터의 가곡의 대부분을 완성했다.
1897년, 서른 일곱의 말러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음악적 지위인 비엔나 오페라의 감독직을 제안받았다. 그 자리는 '황실' 지위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법에 따르면 그 자리는 유대인이 맡을 수 없었다. 독실한 유대교인이 전혀 아니었던 말러는, 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로 종교를 바꾸었다. 비엔나 오페라에서의 그의 십년은 비엔나 오페라의 레파토리와 예술적 기준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그의 치열한 성격과 주목할 만한 완벽주의, 그리고 완고한 의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의 작품이 말러가 오페라단을 맡았을 당시의 스타일에 부합했다면, 그의 지휘 하에서 대중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리고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말러는 매 해 아홉 달을 오페라단에서 일했고, 여름에만 작곡할 여유가 있었다. 이 여름을 그는 주로 마이어닉(Maiernigg)에서 보냈고, 그는 뵈르터제(Wörthersee)에 작은 오두막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교향곡 4번부터 8번,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기초한 뤼케르트 가곡과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그리고 그의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가곡의 마지막인 북 치는 소년을 작곡했다.
1902년에, 말러는 알마 쉰들러(1879년–1964년)와 결혼했고, 사이에 두 딸을 두었는데, 후에 조각가가 된 안나 유스티네 말러 ('Gucki'; 1904–1988) 와 성홍열로 다섯 살에 죽은 마리아 안나 ('Putzi'; 1902–1907) 였다.
첫째 딸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그에게 또다른 타격이 찾아왔다. 같은 해에 그는 심장병 (감염성 심장 내막염) 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운동을 제한하고 그의 걸음 수를 세도록 처방받았다. 오페라단에서의 예술적 문제에 대한 그의 완고함은 적을 만들어냈고, 또한 언론의 반유대주의적인 공격은 그를 더욱 괴롭혔다. 그의 1907년 오페라단 사임은 전혀 의외의 일이 아니었다.
말러 자신의 음악은 생전에는 널리 자주 연주되지는 않았고, 또한 대개 그리 반응이 좋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짧고 고전적 형태를 띤 교향곡 4번은 일각에서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이 큰 대중적 성공을 거둔 적은 거대한 교향곡 8번의 1910년 뮌헨 초연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 이후에 쓴 곡들은 그의 생전에 연주되지 않았다.
비엔나 오페라를 떠난 이후, 그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로부터의 제안을 받았다. 그는 1908년에 거기에서 한 시즌을 지휘했지만, 대체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선호하여 밀려나게 되었다. 그는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서 굉장히 호평을 받았지만, 메트 위원회 위원들의 선호도에서 밀려났다. 유럽에 돌아와서 결혼 생활에 위기와 알마의 불륜이 드러나고, 말러는 1910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한 번의 (그리고 분명히 도움이 된) 면담을 가졌다.
유서깊은 뉴욕 필하모닉과 지휘 계약에 서명하고 난 후, 말러와 그의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이 시기에 그는 대지의 노래와, 마지막 완성작이 된 교향곡 9번을 완성했다. 1911년 2월에 길고 힘든 뉴욕에서의 콘서트 시즌 도중에, 말러는 연쇄상구균 감염으로 크게 앓았고, 발열이 있는 상태에서 그의 마지막 공연 (프로그램에는 그의 교향곡 4번과 부조니의 Berceuse élégiaque 초연이 포함되어 있었다) 을 가졌다. 유럽에 돌아와 그는 파리로 옮겨졌고, 거기에서 가장 최근에 개발된 새 혈청을 접종받았다. 하지만 약은 듣지 않았고, 그의 요청에 따라 빈으로 옮겨졌다. 그는 거기에서 감염증으로 1911년 5월 18일, 나이 오십에 그의 교향곡 10번을 미완성 상태로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의 유언에 따라, 비엔나 외곽의 그린칭 공동묘지에 그의 딸 옆에 안장되었다.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고 말러가 말한 적이 있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태인으로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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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1번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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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1번 D 장조》는 구스타프 말러가 작곡한 첫 번째 교향곡으로 1884년부터 1888년에 걸쳐서 작곡되었다. 1889년에 《2부로 된 교향시》라는 제목으로 말러 자신의 지휘로 부다페스트에서 초연되었다. 곧 장 폴의 소설의 제목을 딴 “거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으며 이 이름으로는 1893년에 함부르크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이후 말러는 몇 번의 수정을 가한 뒤 다시 그 제목을 없애고 교향곡 1번으로 하여 1896년에 베를린에서 또 한 번 초연하였다. 당시 연주 시간은 약 55분이었다.
구조 [편집]
다음과 같은 네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Langsam, Schleppend, wie ein Naturlaut - Im Anfang sehr gemächlich (자연의 소리처럼 느리고, 쳐지게 - 처음에는 매우 서두르지 말고)
- Kräftig bewegt, doch nicht zu schnell (강한 움직임으로, 그러나 너무 빠르지 않게)
- Feierlich und gemessen, ohne zu schleppen (평온하게, 쳐짐 없이)
- Stürmisch bewegt (폭풍처럼 움직임)
최초에는 Blumine(꽃의 노래)라는 이름의 악장이 1악장과 2악장 사이에 연주되었으나 작곡가가 개정된 판에서 이를 빼버렸다. 간혹 1악장 앞에 Blumine를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1]
편성 [편집]
- 플루트 4, (3, 4번은 피콜로도)
- 클라리넷(B-flat, A, C) 4 (3번은 B-flat 베이스 클라리넷과 E-flat 클라리넷도; 4번은 E-flat 클라리넷도)
- 바순 3 (3번은 콘트라바순도)
- 호른 7
- 트럼펫(F) 4
- 트롬본 3
- 튜바
- 팀파니 2
- 심벌즈
- 트라이앵글
- 탐탐
- 큰북
- 하프
- 제1, 제2 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더블 베이스
주석 [편집]
- ↑ 사이먼 래틀, 말러 교향곡 1번, 버밍엄 시 교향악단, EMI
원본 주소 ‘
http://ko.wikipedia.org/wiki/%EA%B5%90%ED%96%A5%EA%B3%A1_1%EB%B2%88_(%EB%A7%90%EB%9F%AC)’
분류:
음악에 관한 토막글 |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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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보 아돌포 두다멜 라미레스(Gustavo Adolfo Dudamel Ramírez, 1981년 1월 26일 - )는 베네수엘라의 지휘자이다.
약력 [편집]
베네수엘라 서북부에 있는 라라 주의 주도인 바르키시메토에서 태어났으며, 10세 때 베네수엘라의 전국적인 음악 교육 계획인 엘 시스테마의 수혜자가 되어 바이올린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하신토 라라 음악원에 진학해 호세 루이스 히메네스 등에게 계속 배웠으며, 작곡 등 다른 분야도 수강하기 시작했다. 1995년 부터는 로돌포 사글림베니와 엘 시스테마 창시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등에게 집중적으로 지휘를 배웠으며, 고향의 실내 관현악단과 지방 청소년 관현악단의 부지휘자 등을 거쳐 1999년에 불과 18세의 나이로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2004년에는 밤베르크 교향악단에서 주최하는 구스타프 말러 국제 지휘 콩쿨에 참가해 우승했으며,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사이먼 래틀 등의 후원과 엘 시스테마의 세계적인 주목 등으로 급속도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등을 처음 지휘했으며, 독일의 세계적인 클래식 음반사인 도이체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과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예테보리 교향악단 등을 객원 지휘했고,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에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를 지휘해 오페라 영역에도 진출했다.
2007년에는 루체른 국제 음악제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첫 공연을 가졌으며, 외국에서 첫 본격적인 직책으로 예테보리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맡아 2009년 현재까지 재임하고 있다.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과도 BBC 프롬스와 루체른 국제 음악제, 본 베토벤 음악제 등에서 공연해 절찬을 받았으며, 데뷰 음반인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 7번을 위시한 대부분의 CD와 DVD도 해당 악단과 제작하고 있다. 2009년 9월부터는 에사-페카 살로넨의 후임으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다.
라틴아메리카 태생의 젊은 지휘자답게 빠른 템포와 활력, 열정을 잘 살린 연주를 끌어내는 것으로 명성이 높으며, 다루는 레퍼토리도 모차르트에서 번스타인까지 꽤 넓은 편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아직 풍부한 경험과 깊이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제기하고 있다.[누가?]
에피소드 [편집]
두다멜은 2008년 12월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과 함께 첫 내한 공연을 가졌는데, 리허설 중 엘 시스테마에 참가해 지휘법 강사로 자신을 가르쳤던 곽승과 해후해 화제가 되었다.[1] 이후 본 공연에서도 앵콜곡 연주가 끝난 뒤, 자신이 입고 있던 베네수엘라 국기 문양의 점퍼를 객석에서 관람하고 있던 곽승에게 입혀주기도 했다.[2]
주석 [편집]
- ↑ 지휘자 두다멜, 한국 스승 곽승과 재회, 매일경제, 2008년 12월 15일 16:50
- ↑ 축제·영화같은 무대, 두다멜과 시몬볼리바르 유스오케스트라, 뉴시스, 2008년 12월 15일 12:00
바깥 고리 [편집]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A%B5%AC%EC%8A%A4%ED%83%80%EB%B3%B4_%EB%91%90%EB%8B%A4%EB%A9%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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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Angeles Philharm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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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s Angeles Philharmonic (LA Phil, LAP, or LAPO) is an American
orchestra based in Los Angeles, California, United States. It has a regular season of concerts from October through June at the
Walt Disney Concert Hall, and a summer season at the
Hollywood Bowl from July through September.
Gustavo Dudamel is the current Music Director, and
Esa-Pekka Salonen is Conductor Laureate.
Music critics have described the orchestra as the most "contemporary minded",
[1] "forward thinking",
[2] "talked about and innovative",
[3] "venturesome and admired"
[4] orchestra in America. According to Salonen, "We are interested in the future. We are not trying to re-create the glories of the past, like so many other symphony orchestras."
[1]
[edit] History
[edit] 1919–1933: Founding the Philharmonic
Official Los Angeles Philharmonic logo
The orchestra was founded and single-handedly financed in 1919 by William Andrews Clark, Jr., a copper baron, arts enthusiast, and part-time violinist. He originally asked Sergei Rachmaninoff to be the Philharmonic's first music director; however, Rachmaninoff had only recently moved to New York, and he did not wish to move again. Clark then selected Walter Henry Rothwell, former assistant to Gustav Mahler, as music director, and hired away several principal musicians from East Coast orchestras and others from the competing and soon-to-be defunct Los Angeles Symphony. The orchestra played its first concert in the same year, eleven days after its first rehearsal. Clark himself would sometimes sit and play with the second violin section.[5]
After Rothwell's death, subsequent Music Directors through the 1920s included Georg Schnéevoigt and Artur Rodziński.
[edit] 1933–1950: Harvey Mudd rescues orchestra
Otto Klemperer became Music Director in 1933, part of the large group of German emigrants fleeing Nazi Germany. He conducted many LA Phil premieres, and introduced Los Angeles audiences to important new works by Igor Stravinsky and Arnold Schoenberg. The orchestra responded well to his leadership, but Klemperer had a difficult time adjusting to Southern California, a situation exacerbated by repeated manic-depressive episodes.
Hollywood Bowl
Things were further complicated when founder William Andrews Clark died without leaving the orchestra an endowment. The newly formed Southern California Symphony Association was created with the goal to stabilize the orchestra's funding, with the association's president, Harvey Mudd, stepping up to personally guarantee Klemperer's salary. The Philharmonic's concerts at the Hollywood Bowl also brought in much needed revenue.[5][6] With that, the orchestra managed to make it through the worst of the Great Depression years still intact.
Then, after completing the 1939 summer season at the Hollywood Bowl, Klemperer was visiting Boston and was incorrectly diagnosed with a brain tumor, and the subsequent brain surgery left him partially paralyzed. He went into a depressive state and was placed in institution; when he escaped, The New York Times ran a cover story declaring him missing, and after being found in New Jersey, a picture of him behind bars was printed in the New York Herald Tribune. He subsequently lost the post of Music Director, though he would occasionally conduct the Philharmonic after that, even leading some important concerts such as the orchestra's premiere performance of Stravinsky's Symphony in Three Movements in 1946.[5][7]
Sir John Barbirolli was offered the position of Music Director after his contract with the New York Philharmonic expired in 1942; however, he declined the offer and chose to return to England instead[8]. The following year, Alfred Wallenstein was chosen by Mudd to lead the orchestra. The former principal cellist of the New York Philharmonic had been the youngest member of the Los Angeles Philharmonic when it was founded in 1919, and had turned to conducting at the suggestion of Arturo Toscanini. He had conducted the LA Phil at the Hollywood Bowl on a number of occasions, and in 1943, took over as Music Director.[9] Among the highlights of Wallenstein's tenure were recordings of concertos with fellow Angelenos, Jascha Heifetz and Arthur Rubinstein.[5]
[edit] 1951–1968: Dorothy Buffum Chandler's influence
By the mid-1950s, department store heiress and wife of the publisher of the Los Angeles Times, Dorothy Buffum Chandler became the de facto leader of the orchestra's board of directors. Besides leading efforts to create a performing arts center for city that would serve as the Philharmonic's new home, and would eventually lead to the Los Angeles Music Center, she and others wanted a more prominent conductor to lead the orchestra; after Wallenstein's departure, Chandler led efforts to hire then Concertgebouw Orchestra principal conductor, Eduard van Beinum as the LAPO music director. The Philharmonic's musicians, management and audience all loved van Beinum, but in 1959, he suffered a massive heart attack while on the podium during a rehearsal of the Concertgebouw Orchestra and died.[6]
In 1960, the orchestra, led again by Chandler, signed Georg Solti to a three-year contract to be music director after he had guest conducted the orchestra in winter concerts downtown, at the Hollywood Bowl, and in other Southern California locations including CAMA concerts in Santa Barbara.[10] Solti was to officially begin his tenure in 1962, and the Philharmonic had hoped that he would lead the orchestra when it moved into its new home at the then yet-to-be-completed Dorothy Chandler Pavilion; he even began to appoint musicians to the orchestra.[11] However, Solti abruptly resigned the position in 1961 without officially taking the post after learning that the Philharmonic board of directors failed to consult him before naming then 26 year-old Zubin Mehta to be assistant conductor of the orchestra.[12] Mehta was subsequently named to replace Solti.
[edit] 1969–1997: Ernest Fleischmann's tenure
In 1969, the orchestra hired Ernest Fleischmann to be Executive Vice President and General Manager. During his tenure, the Philharmonic instituted a number of then-revolutionary ideas, including the creation of the Los Angeles Philharmonic Chamber Music Society and the Los Angeles Philharmonic New Music Group and its "Green Umbrella" concerts; both of these adjunct groups were composed of the orchestra's musicians but offered performance series which were separate and distinct from traditional Philharmonic concerts. They were eventually imitated by other orchestras throughout the world. This concept was ahead of its time, and was an outgrowth of Fleischmann's philosophy, most famously laid out in his 16 May 1987 commencement address at the Cleveland Institute of Music entitled, "The Orchestra is Dead. Long Live the Community of Musicians."
When Zubin Mehta left for the New York Philharmonic in 1978, Fleischmann convinced Carlo Maria Giulini to take over as Music Director. Giulini's time with the orchestra was well regarded, however, he resigned the position after his wife became ill, and returned to Italy.
Fleischmann then turned to André Previn with the hopes that his conducting credentials and time spent at Hollywood Studios would add a local flair and enhance the connection between conductor, orchestra, and city. While Previn's tenure was musically satisfactory, other conductors including Kurt Sanderling, Simon Rattle, and Esa-Pekka Salonen, fared better at the box office. Previn clashed frequently with Fleischmann, most notably when Fleischmann failed to consult him over the decision to name Salonen as "Principal Guest Conductor", a move mirroring the prior Solti/Mehta controversy. Because of Previn's objections, the position and Japan tour offer made to Salonen were withdrawn; however, shortly thereafter in April 1989, Previn resigned, and four months later, Salonen was named Music Director Designate, officially taking the post in October 1992.[13] Salonen's U.S. conducting debut with the orchestra was in 1984, and has conducted every season since.
Salonen's tenure with the orchestra first began with a residency at the 1992 Salzburg Festival in concert performances and as the pit orchestra in a production of the opera Saint François d'Assise by Olivier Messiaen; it was the first time an American orchestra was given that opportunity. Salonen later took the orchestra on many other tours of the United States, Europe, and Asia, and residencies at the Lucerne Festival in Switzerland, The Proms in London, in Cologne for a festival of Salonen's own works, and perhaps most notably, in 1996 at the Théâtre du Châtelet in Paris for a Stravinsky festival conducted by Salonen and Pierre Boulez; it was during this Paris residency that key Philharmonic board members heard the orchestra perform in improved acoustics and were re-invigorated to lead fundraising efforts for the soon-to-be built Walt Disney Concert Hall.
Under Salonen's leadership, the Philharmonic has become an extremely progressive and well-regarded orchestra. Alex Ross of The New Yorker said this:
The Salonen era in L.A. may mark a turning point in the recent history of classical music in America. It is a story not of an individual magically imprinting his personality on an institution—what Salonen has called the "empty hype" of conductor worship—but of an individual and an institution bringing out unforeseen capabilities in each other, and thereby proving how much life remains in the orchestra itself, at once the most conservative and the most powerful of musical organisms.
... no American orchestra matches the L.A. Philharmonic in its ability to assimilate a huge range of music on a moment's notice. [Thomas] Adès, who first conducted his own music in L.A. [in 2005] and has become an annual visitor, told me, "They always seem to begin by finding exactly the right playing style for each piece of music—the kind of sound, the kind of phrasing, breathing, attacks, colors, the indefinable whole. That shouldn't be unusual, but it is." [John] Adams calls the Philharmonic "the most Amurrican [sic] of orchestras. They don't hold back and they don't put on airs. If you met them in twos or threes, you'd have no idea they were playing in an orchestra, that they were classical-music people."[1]
[edit] 1998–present
When Fleischmann decided to retire in 1998 after 28-years at the helm, the orchestra named Willem Wijnbergen as its new Executive Director. Wijnbergen, a Dutch pianist and arts administrator, was the managing director of the Concertgebouw Orchestra in Amsterdam. Initially, his appointment was hailed as a major coup for the orchestra. One of his most important decisions was announced in November 1998 and dealt with changes to programming at the Hollywood Bowl:
Despite some successes, Wijnbergen left the orchestra in 1999 after only one controversy-filled year, and it is unclear whether he resigned or was fired by the Philharmonic's board of directors.[15]
Later that same year, Deborah Borda, then the Executive Director of the New York Philharmonic, was hired to take over executive management of the orchestra. She began her tenure in January 2000, and was later given the title of President and Chief Executive Officer. After financial problems experienced during Wijnbergen's short tenure, Borda — "a formidable executive who runs the orchestra like a lean company, not like a flabby non-profit" — "put the organization on solid financial footing."[1] She is widely credited (along with Salonen, Frank Gehry, and Yasuhisa Toyota) for the orchestra's very successful move to Walt Disney Concert Hall, and for wholeheartedly supporting and complementing Salonen's artistic vision. One example cited by Alex Ross:
Perhaps Borda's boldest notion is to give visiting composers such as [John] Adams and Thomas Adès the same royal treatment that is extended to the likes of Yo-Yo Ma and Joshua Bell; Borda talks about "hero composers." A recent performance of Adams's monumental California symphony "Naïve and Sentimental Music" in the orchestra's Casual Fridays series ... drew a nearly full house. Borda's big-guns approach has invigorated the orchestra's long-running new-music series, called Green Umbrella, which Fleischmann established in 1982. In the early days, it drew modest audiences, but in recent years attendance has risen to the point where as many as sixteen hundred people show up for a concert that in other cities might draw thirty or forty. The Australian composer Brett Dean recently walked onstage for a Green Umbrella concert and did a double take, saying that it was the largest new-music audience he'd ever seen.[1]
In April 2007, it was announced that Esa-Pekka Salonen would step down as the LAP's music director at the end of the 2008–2009 season, with Gustavo Dudamel becoming his successor.[16][17][18]
[edit] Performance venues
Walt Disney Concert Hall
The orchestra played its first season at Trinity Auditorium at Grand Ave and Ninth Street. In 1920, it moved to Fifth Street and Olive Ave, in a venue that had previously been known as Clune's Auditorium, but was renamed Philharmonic Auditorium.[19] From 1964 to 2003, the orchestra played its main subscription concerts in the Dorothy Chandler Pavilion of the Los Angeles Music Center. In 2003, a move was made to the new Walt Disney Concert Hall next door designed by Frank Gehry. Its current "winter season" runs from October through late May or early June.
Since 1922, the orchestra has played outdoor concerts during the summer at the Hollywood Bowl, with the official "summer season" running from July through September.
The LA Philharmonic has played at least one concert a year in its sister city, Santa Barbara, presented by the Community Arts Music Association (CAMA), along with other regular concerts throughout various Southern California cities such as Costa Mesa as part of the Orange County Philharmonic Society's series, San Diego, Palm Springs, among many others. In addition, the orchestra plays a number of free community concerts throughout Los Angeles County.
[edit] Conductors
[edit] Music Directors
Georg Solti was offered and accepted the post in 1960, but subsequently resigned in 1961 without officially beginning his tenure.
[edit] Conductor Laureate
Before Salonen's last concert as Music Director of the Los Angeles Philharmonic on April 19, 2009, the orchestra announced his appointment as its first ever Conductor Laureate "as acknowledgement of our profound gratitude to him and to signify our continuing connection."[20] In response, Salonen said:
"When the Board asked me if I would accept the position of Conductor Laureate I was overwhelmed. This organization has been at the very center of my musical life for 17 years. I am very proud and honored that they would even consider me for such a prestigious title and it gives me great pleasure to accept. The Los Angeles Philharmonic will always play an important role in my life and this is a symbol of our continuing relationship." [20]
[edit] Principal Guest Conductors
Rattle and Tilson Thomas were named Principal Guest Conductor concurrently under
Carlo Maria Giulini, though Tilson Thomas's tenure ended much earlier. They are the only two conductors to officially hold the title. as such (though as stated above,
Esa-Pekka Salonen was initially offered the position under Previn before having the offer withdrawn).
Beginning in the Summer of 2005, the Philharmonic created the new position of
Principal Guest Conductor of the Los Angeles Philharmonic at the Hollywood Bowl.
Leonard Slatkin was initially given a two year contract, and in 2007 he was given a one-year extension. In March 2008,
Bramwell Tovey was named to the post for an initial two-year contract beginning Summer of 2008.
[21][22]
[edit] Other notable conductors
Other conductors with whom the orchestra has had close ties include Sir John Barbirolli, Bruno Walter, Leopold Stokowski, Albert Coates, Fritz Reiner, and Erich Leinsdorf;[23] more recently, others have included Kurt Sanderling, Pierre Boulez, Leonard Bernstein, Christoph von Dohnányi, and Christoph Eschenbach.
Many composers have conducted the Philharmonic in concerts and/or world premieres of their works, including Igor Stravinsky, William Kraft, John Harbison, Witold Lutosławski, Pierre Boulez, Steven Stucky, John Williams, John Adams, Thomas Adès, and Esa-Pekka Salonen.
A number of the Philharmonic's Assistant/Associate Conductors have gone on to have notable careers in their own rights. These include Lawrence Foster, Calvin E. Simmons, and William Kraft under Mehta, Sidney Harth and Myung-whun Chung under Giulini, Heiichiro Ohyama and David Alan Miller under Previn, and Grant Gershon, Miguel Harth-Bedoya, Kristjan Järvi, and Alexander Mickelthwate under Salonen.
[edit] Other resident artists
[edit] Composers
Kraft and Harbison held the title "Composer-in-Residence" as part of a Meet the Composer (MTC) sponsorship. Steiger was given the title "Composer-Fellow", serving as an assistant to both Harbison and Stucky.[24]
Stucky was also a MTC "Composer-in-Residence" from 1988–1992, but was kept on as "New Music Advisor" after his official MTC-sponsored tenure ended; in 2000, his title was again changed to "Consulting Composer for New Music." In the end, his twenty-one year residency with the orchestra was the longest such relationship of any composer with an American orchestra.[24][25]
Adams has been named the orchestra's "Creative Chair" beginning in Fall 2009.
[edit] Jazz chairs
In 1998, Clayton was given the title "Artistic Director of Jazz" at the Hollywood Bowl for a three-year term beginning with the 1999 summer season. His band, the Clayton-Hamilton Jazz Orchestra acted as the resident jazz ensemble[14]
Reeves was named the first "Creative Chair for Jazz" in March 2002. Instead of just focusing on summer programming, the new position involved the scheduling of jazz programming and educational workshops year round; as such, she led the development of the subscription jazz series the orchestra offered when it moved into Walt Disney Concert Hall. In addition, she was the first performer at the 2003 inaugural gala at the Walt Disney Concert Hall. Her contract was initially for two years, and was subsequently renewed for an additional two years.[26]
McBride took over the position in 2006 for an initial two-year position that was subsequently renewed for an additional two years through to the start of the 2010 summer season at the Hollywood Bowl. In 2009, the orchestra introduced Hancock as McBride's eventual replacement.
[edit] Recordings
Main article: Los Angeles Philharmonic discography
The orchestra occasionally made 78-rpm recordings and LPs in the early years with Alfred Wallenstein and Leopold Stokowski for Capitol Records, and began recording regularly in the 1960s, for London/Decca, during the tenure of Zubin Mehta as music director. A healthy discography continued to grow with Carlo Maria Giulini on Deutsche Grammophon and André Previn on both Philips and Telarc Records. Michael Tilson Thomas, Leonard Bernstein, and Sir Simon Rattle also made several recordings with the orchestra in the 1980s, adding to their rising international profile. In recent years, Esa-Pekka Salonen has led recording sessions for Sony and Deutsche Grammophon. A recording of the Concerto for Orchestra by Béla Bartók released by Deutsche Grammophon in 2007 was the first recording by Gustavo Dudamel conducting the LA Phil.
The Los Angeles Philharmonic performed the music in the pilot film of the television series Battlestar Galactica, composed by Stu Phillips and Glen A. Larson. The LA Philharmonic also performed the first North American concert for the popular Final Fantasy franchise game music, Dear Friends: Music From Final Fantasy by Nobuo Uematsu. The orchestra has most recently recorded the sound track for the video game: Bioshock 2 as composed by Garry Schy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