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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전의 

기획회의에서

전후 명작인

마쓰자와 주택을 고르다


“역시 마쓰자와 마코토 씨의 ‘최소한의 주거’군.”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둥을 테마로 한 전람회 기획의 몇 번째 회의에선가 그런 말이 나왔다. 그 전람회의 기획위원으로 디자인평론가인 무사시노미술대학 교수 가시와기 히로시 씨, 도쿄조형대학 교수 오타케 마코토 씨, 건축사가이자 도쿄대학 교수인 스즈키 히로유키 씨가 있었다.

나는 주최측의 담당자로 참가했다. 내 역할은 이 전람회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예산, 스케줄 등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폼 좀 잡고 말하자면 프로듀서, 디렉터 뭐 그런 것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런저런 귀찮은 잡스런 일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복사해 둔 사진을 보았다.

마쓰자와 마코토라는 건축가가 1952년 자택으로 지은 집의 사진이다. 한 장은 정면의 외관을 찍은 것인데, 거대한 창이 있는 2층 목조건물이 인상적이었다. 다른 한 장은 내부에서 촬영한 것으로 거대한 장지가 스크린처럼 바람이 통하는 공간을 만들고 그 앞에는 간단한 가구가 놓여 있었다. 이 두 장의 사진을 몇 번인가 반복해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전후 주택사에 남은 명작이다. 하지만 이때는 솔직히 말해 이 집이 무슨의미를 갖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진과 간단한 평면도도 갖고 있었다. 정방형이었다.

최소한 주거라 불릴 정도이니 정말 작은 것이겠지? 전람회장의 도면에는 축적을 포함해 그 집의 평면도를 올려 두었다.

“회장에 재현하기에 적당히 좋은 크기 아닌가?”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때까지 사진만 천천히 보고 있던 가시와기 씨가 입을 열었다.

“뭐랄까 미국의 임스(Eames) 케이스 스터디 하우스와 닮아 있군. 목조로 보이지 않는데. 특히 이 2층에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지주는 철이구먼.”

확실히 지주를 나무로 하는 건 좀 말이 안 된다.

대담하게 크게 문을 만들기 위해 구조적 보강으로 지주가 필요했겠지.

“전후인 50년대에 지어진 최소한의 주거 중 하나로 건축계에서는 유명하지요. 재현할 수 있다면 엄청 화제가 되겠지요.”라고 도쿄조형대학 교수인 오타케 씨가 다짐하듯 말을 보탰다. (임스 케이스 스터디 하우스는 제2차세계대전 후 당대에 어울리는 건축을 모색하자는 시도였다.)


건축가 마쓰자와 마코토가 1952년에 지은 자택. 당시 27세의 젊은 건축가 마쓰자와 마코토는 이 주택을 통해 '최소한의 주거'라는 개념을 구현했다. 최근까지 건축 전문가들이 선정한 '작은 주택 베스트 10' 안에 드는 현대 주택사의 명작이다. 사진은 남측면을 촬영한 것으로 정확히 6등분된 1, 2층 건물의 균형미가 일품임을 알 수 있다. [아홉 평 나의 집]의 저자 하기와라 슈는 이 집을 재현한 '스미레 아오이 하우스'를 1999년에 지어 10년간 살고 있으며, 현재 이 집을 모델로 한 '9평 하우스'는 일본의 국민주택으로 사랑받고 있다.


1952년 마쓰자와 주택의 평면도. 3X3평의 정방형이다. 1층(왼쪽) 도면은 집 앞에 설치한 데크가 포함되어 직사각형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1층은 9평, 2층은 6평으로 건축면적은 15평이다. 1, 2층 사이 3평을 바람이 통하는 공간으로 터 놓아 전망과 공간감을 확보하였다.



'스미레 아오이 하우스' 집주인 하기와라 슈 지음

건축기사 박준호 옮김

(홍시, 2012)

본 연재는 [아홉 평 나의 집]에서 발췌하여 한달간 계속합니다. (월~금 업데이트)

이 책은 전시회 기획자였던 저자가 '9평의 집' 마쓰자와 주택을 우연히 만나 이 집을 재현해 자기 집으로 만들기 위한 분투기이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저자는 땅 찾기부터 고집대로 집 짓기까지 좌충우돌하지만, 이를 통해 집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고 인생이 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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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포기하고 

있었다


“집을 만들까 하는데…….”

저녁밥을 먹고서 마누라에게 말했다.

“네?”라고 묻고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다는 듯 마누라는 나를 슬금슬금 엿보았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런 말이긴 했다. 나 자신도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 그 집을 만날 때까지는.

“아무튼 내일이라도, 전람회를 보러 가자고.”

나는 마누라를 꼬셨다. 그 집은 어느 전람회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게 전람회가 아니라 주택전시장이라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30대 중반을 넘은 부부가 “아이들도 초등학생이 되었고 슬슬 집을 지어볼까. 우선은 주택전시회장이라도 보러 가자고.” 이런 경우라면, 어디에라도 있을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주택전시장이 아니라 전람회장이다. 좀 특이한 걸까.

전람회장은 신주쿠 리빙 디자인센터 오존(OZONE)으로 내 직장이다. 그리고 나는 그 전람회의 담당자다. 즉, 나는 집을 일로써 집으로 가지고 오려는 것이다.

‘집으로 일을 들고 온다.’는 건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집을 일로 가지고 들어온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자택을 만들거나, 건설업체 사장이 홍보도 겸해 자신이 건축한 건물에 사는 것이라면 몰라도, 나는 보통의 샐러리맨이다. 결혼 10년차에 아이가 둘 있다. 스미레는 여덟 살, 아오이는 여섯 살이다.

이 일의 발단은 전람회에 전시된 집이었다. 나는 이 집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내가 사는 집으로, 그 집을 손에 넣고 싶다 생각했다. 나는 그때까지 집을 짓는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맨션을 사는 것도 싫었다. 주택담보대출이나 집에 얽매이는 것이 싫었다. 평생 임대 생활을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으로도 집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해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누라는 가능하다면 우리들의 집, 그것도 단독주택을 갖고 싶다고 말해 왔다. 주변의 친구들이 집을 짓는다거나, 누군가 맨션을 샀다고 하면, 아내는 우리들은 어쩔 거냐는 질문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며 지나쳐왔다.


(이 글은 [아홉 평 나의 집]에서 가려 뽑았습니다. 월~금 오전 11시에 새 글을 올립니다.)











반해버린 

9평 하우스는 

약 50평방미터


“그래서, 집 크기는 얼마나 되는데?”

마누라는 내 혼잣말을 냉정히 듣고는 물었다. 줄곧 집 짓기를 거절했던 남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이유를 궁금해 했다. 나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사실 나는 이때 조금 흥분한 상태이긴 했다.

나는 보통은 감정에 휘말려 행동하는 타입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냉정하게 판단해 행동하는 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만은 어쩐지 스스로 이상할 정도로 그 집의 매력에 끌려 냉정함을 잃고 있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보통의 샐러리맨에게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엄청난 쇼핑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일을 딱 하루 생각하고 결정해버린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조건들을 종합해 생각해 보면, 누군가 일부러 만든 조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조건이 빈틈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나와 달리 마누라는 대단히 냉정했다. 그 집이 정말로 우리들이 살기에 적합한지 제대로 확인하려 들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었다.

“1층은 9평이고 2층은 6평, 합해서 15평이지.”

“뭐? 9평이라고?”

마누라는 평수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되물었다.

“음, 제곱미터로 환산하면 1, 2층 합해서 50 정도 되지”

“그럼 지금보다 더 좁다는 거 아냐?”

그때 살고 있던 임대아파트는 53제곱미터였다. 이사할 거라면 지금 사는 곳보다 넓은 곳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당연했다. 게다가 단독주택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나는 조금 당황해서,

“뭐, 하지만 그 집은 언제든 증축할 수 있는 구조라고…….”라고 급히 얼버무렸다. 어찌되었든 마누라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증축이라는 이 안이한 답변이 후에 문제가 될 것을 이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이 집은 3×3=9평의 정방형 구조로 작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최소한의 주거’ 이것이 이 집에 붙여진 이름이다. 적어도 ‘최소한의 주거’라는 이름의 의미를 냉정히 생각해 볼 여유가 그때는 없었다.


건축가 마쓰자와 마코토 씨가 당시(1952년) 그린 그린 집의 일러스트. 작은 집의 구석까지 신경 써 그렸다. 정원에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 2층의 손님을 위해 술을 준비하는 부인. 생활의 느낌이 전해져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이다. [아홉 평 나의 집]의 저자 하기와라 슈는 이 그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9평의 집 '마쓰자와 주택'을 1999년에 재현한 '스미레 아오이 하우스'의 집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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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사의 명작과 만나다

내가 집을 만든 것은 약 10년 전인 1999년이다. 당시 직장에서 어떤 집을 만났다. 그 집은 전후 주택 불황이 심각했던 1952년에 지어진 것으로, 일본 주택 역사의 명작이다. 건축가 마쓰자와 마코토 씨의 자택으로, ‘최소한의 주거(最小限住居)’라고 불린다. 매년 개최되어 온 ‘일본인과 주거’ 시리즈 제4회, ‘기둥’을 테마로 한 전람회에 집의 기둥과 들보의 목조 구조만을 재현했다. 즉 집 짓기 중 상량식 때의 모습이다. 정말 아름다웠다. 3×3=9평의 정방형으로 통풍이 잘 되는 2층짜리 작은 집이다. 손에 잡힐 듯한 크기였다. 둥근 기둥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무엇보다 기분이 좋았다.

이 공간에 몸을 두고 있으니 나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집을 완성시키고 싶다’는. 집을 완성시키기 위해 선택한 손쉬운 방법은 내 집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나는 전람회의 담당자였기 때문에 그 집은 직장에서 일로 만난 것이다. “일을 집에 들고 가서 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이 경우는 “일로 집을 들고 간다.”가 된 셈이다.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기둥전은 1999년 1월 9일부터 2월 9일까지 개최되었다. 마쓰자와 주택의 목조축조가 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목조축조는 벽과 바닥면에 기대지않고 기둥과 보의축조로 지탱하는 공법이다. )


평생 임대생활을 해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당시 나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고 우리집은 4인 가족이었다. 나는 37세, 전업주부인 마누라도 37세, 스미레는 여덟 살, 아오이는 여섯 살이었다. 그때 우리가 살고 있던 곳은 방이 두 개에 부엌이 달린 53평방미터 크기의 집으로 고엔지에 있는 임대아파트(일본의 ‘아파트’는 우리의 낡은 2층 주택쯤 된다. 우리식의 아파트를 일본에서는 ‘맨션’이라 부른다. —옮긴이)였다. 역까지 15분으로 월세는 15만 8천 엔(약 210만 원)이었다. 슬슬 마음 편한 곳으로 이사할까 생각하던 중이었지만 집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돈을 빌리는 것도, 땅에 묶이는 것도 싫었다. 평생 임대 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누라는 누군가 집을 소유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매달 비싼 월세를 낼 바에야 집을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갑자기 집을 짓고 싶다는 말을 꺼내니 마누라는 꽤 놀란 눈치였다. 집을 짓는 것에는 찬성했지만, 전람회에 재현된 주량(柱梁, 기둥과 대들보)을 가지고 만들 필요는 없지 않냐는 것이었다. 건축 면적상으로 지금보다도 더 좁은 집인데, 네 식구가 정말 살 수 있을지, 나중에 곤란해지느니 처음부터 좀 더 넓게 만드는 편이 좋지 않겠냐고 했다.

건축 면적 외에도 커다란 문제가 두 가지 더 있었다. 우선은 땅이다. 우리에게는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이 없었다. 땅도 없는 사람이 아무리 집을 짓고 싶다고 해 봐야 현실성이 없다. 전람회가 끝날 때까지 약 1개월 안에 땅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번째는 돈이다. 착수금을 어쩔 것인가. 빌릴 수는 있을까. 연봉에서 얼마쯤 빌릴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것보다 집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문제는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인데, 내게는 처음부터 답이 있었다. 설계는 기둥전람회의 디자인을 부탁했던, 동년배인 고이즈미 마코토 씨에게 부탁했다. 성실은 기본이고 디자인을 생각하는 그의 사고와 표현법에 공감하고 있었다.

시공은 전람회에서 재현을 부탁했던 이바타 건축에 부탁했다. 예전에 마쓰자와 마코토 씨의 일을 여러 번 해 보기도 했고, 우연이지만 우리가 이사를 생각하고 있던 지역에 있는 회사다. 사람들이 많이 고민하는 설계와 시공이 금세 정해져 버렸다, 라고 할까. 신뢰할 수 있는 두 곳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집을 집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10년간 살고서 발견한 것들

나는 이 집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동안 남의 이야기라 생각했던 집 짓기를 내 것으로 실감할 수 있게 되었고 집을 만드는 사람의 기분을 알게 되었다. 자기 집을 짓는다는 것과 주거에 대한 생각에도 자신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10년을 살고 나자 이 집의 좋은 점을 실감했다. 집의 이름은 두 딸에게서 따와 ‘스미레 아오이 하우스’라고 붙였다. 아이가 자라는 집이라는 기분을 담았다. 두 딸아이들은 이제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되었다.

집 짓기 책은 많이 있지만, 이 책에는 내가 실제 체험한 집 짓기와 살아있는 느낌을 적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집 짓기는 내 일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전람회는 끝났지만, 자신의 집에 전시장을 옮겨와 여전히 전람회를 계속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또는 작은 집에 4인 가족이 사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꽤 특이한 집이다. 또, 이 책에는 평소 디자인 관련 일을 하며 보거나 듣거나 했던 나의 생각들이 모여 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이 책 속의 나는 생활인으로서의 입장과 전문가로서의 입장을 왔다 갔다 한다. 이 책이 이제부터 집을 만들려는 사람은 물론, 자신과 주거의 관계를 새로 보려는 사람, 이제부터의 주거는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참고가 된다면 행복하겠다.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조금만 발상을 바꾸면 매일 기분 좋은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기분 좋은 집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집에 대한 생각을 한번 자유롭게 해 보자. 자신에게도 사회에게도 좋은 집은 무엇일까. 모두들 한 발 내딛어 본다면 좋겠다.


1999년. 스미레는 여덟살 아오이는 여섯살. 막 이사 와서 박스 안에서 놀고 있다.



2010년 2월. 스미레는 열여덟살, 아오이는 열여섯살. 미대생이 된 스미레는 집을 떠나 혼자 살 예정이다. 좋은 물건을 고집해 찾아다니고 있다.


(이 글은 신간 [아홉 평 나의 집]의 '여는 글'입니다. 월~금 오전 11시, 한달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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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dandy 2012-10-2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보니, 집과 식구가 정말 한 가족이라는 느낌이네요.
 

˝4인 가족이 작지만 기분 좋게 살 수 있는 집˝

일본의 '국민주택' 아홉 평의 집 이야기


평생 임대생활을 각오하고 있던 샐러리맨의 내 집 짓기 분투기.

땅 찾기부터 고집대로 집 짓기까지의 모든 이야기, 그리고 10년간 인생이 바뀐 이야기.


공사 완성시 촬영한 준공 사진. 건물 앞의 데크는 나와 디자이너 고이즈미 씨가 직접 만들었다. 1999년.


준공 후 10년. 벽에 넝쿨이 무성하다. 통풍 공간이 있는 리빙룸은 여전히 마음에 든다. 마치 오픈 카페 같다. 벽에 장식되어 있는 데생은 미대를 목표로 하고 있는 아오이의 그림이다. 2010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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