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할아버지와 사촌동생.
할아버지께서는 평생 고기를 낚으셨다.
가만히 꼬마 동생이 서툴게 낚시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계신다.
할아버지게서는 어떠한 원칙으로 평생을 살아가셨을까?
20년전 품안에 있던 손자는 비로소 그것이 궁금해졌다.
1. 증상
만사가 귀찮다. 겨울이면 늘 이렇다. 사회적으로 늘 하이텐션의 핏대를 자랑하는 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저혈압의 모계유전을 따랐다. 혈압이 낮으니 피가 늦게 돈다. 잠이 깨는 아침에 특히 피가 덜 돈다. 의식과 육신의 기상 시간이 늘 다르다. 항상 몸이 지각한다. 피가 몸에 도는 속도가 느리니, 덩달아 몸도 늦게 데워진다. 루피는 기어 세컨드 쓰면 금방 피가 끓던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추위를 많이 타고, 피가 모자라는 발끝은 특히 차다. 정신은 뜨거운 심장을 가졌는데, 생물학적으로 냉혈한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늘 정신이 탁하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자발적으로 예열되지 않는 몸뚱이를 덥히기 위해선, 온수 샤워를 해야 한다. 샤워기는 수압이 셀수록, 물은 약간 뜨거운 게 좋다. 더러움과 피로가 씻기며 활력이 돋는 느낌이다. 겨울이 싫다. 신체 리듬과 생활패턴이 다 야행성에 맞춰져 있다. 축구도 공부도 글도 다 한밤중에 잘 된다. 아니 아예 집중이라는 것은 밤에만 된다. 낮엔 피로와 싸우고 산만함과 싸워야 한다. 오늘도 낮 시간을 버렸다. 따지고 보면 난 20대의 대부분을 이렇게 살아왔다. 누가 시킨 것도 처벌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이렇게 살아왔다. ‘아침형 인간’ 좋다는 부추김에,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지만, 저혈압의 굴레를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에라 그냥 되는대로 살기로 했다.
2. 진단
세상에 내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다. 수십 년을 살아온 한 인격체의 해묵은 습속을 어떻게 일격에 개조할 수 있을까. 만난 지 10분 만에 하나님의 뜻을 설파하고 주입하려는 뭇 기독교인들의 전도가 대부분 성과가 없듯, 생각은 개종하거나 회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살아온 수십 년의 사고방식은 단숨에 혁명적으로 바꿀 수 없다. 이것을 인정해야 하는 데, 그때의 나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여전히 잘되지 않고 어렵기만 하다. 살붙이고 산 내 어머니도, 내 동생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게. 원래 세상의 이치고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나조차 나를 바꾸지 못하니까.
‘생각이라는 것은 천천히 스며들고 물들어 가는 것이다.’ 내 색깔을 유지하며 옆에서 바르게 사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그 이상은 오지랖이다. 한두 번의 대화나 논쟁으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그 사람 주변에 유의미한, 그러면서도 본인과 다른 선택지로 버텨주는 것이 역시 최선이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자기만의 경험에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도 그것은 열반이나 해탈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보통 사람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인 것이다. 나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3. 처방
영원히 비범한 사람도, 영원히 평범한 사람도 없다. 내가 한번 이겼으면, 언젠간 나는 한 번 질 것이다. 여러 차원에서 이기고 지고를 주고받는 것이 동등한 관계다. 항상 이기거나 항상 지는 관계라면, 필시 그것은 장기 말을 부리는 사람 같은 지배-복종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고민은 동등한 관계에 지속성에 관한 물음이다. 또한, 어떻게 사람을, 또 나 자신을 대할지에 관한 원칙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도 글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이렇게 자문자답을 길게 하는 것도 어쩌면 재능이고 어쩌면 병리 현상이 아닐까.
여하튼 한 분야에서 조금 두각을 드러냈을 때, 그래서 몇몇 호의와 칭찬이 너무 쉽게 얻어질 때, 사람은 쉬이 교만해지고 자기객관화와 자기교정 능력은 둔해진다. 자신의 비범함에 취해 평범한 다수를 부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비범함과 평범함은 사실 태양이 비추는 순간의 각도 차이다. 그것을 영원이라 착각하는 것에서 나는 인간관계의 비극이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되니까 너도 할 수 있다.’ ‘내가 해봐서 아는 데’ 따위는 상담이 아니고 공감도 아니고 조언도 아니다. 그냥 자기 자랑이다. 잘 되면 ‘자기 덕’이고, 못되면 ‘나는 되던데….’ 하고 끝나는 그런 조언은 악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힘든 사람, 남은 자존감까지 갈취해서 자기를 높이려는 얄팍한 기만에 불과하다. 사람의 마음에는 글로 미뤄 알 수 없는 수많은 속사정이 녹아있다. 거짓공감으론 마음을 살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돌팔이를 만난다면, 나는 내 인생을 묻지 않기로 한다.
‘유능하다는 이미지’를 갖는 사람은 보통 게을러지는 경우가 잦다. ‘나는 너희가 하지 못하는 큰 기획을 했으니 디테일은 알아서 하라.’는 하나 마나한 말이다. 악마와 천사는 모두 디테일에 숨어있는 걸 어쩌겠나. 그 용의 눈알을 찍는 마지막 붓은 디테일인 걸. 디테일은 성실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게으른 자가 경쟁에 임할 경우는 적에게 제거되지만, 협력에 임할 경우는 동료에게 쫓겨난다는 것을 명심하기로 한다. 선민의식은 늘 나를 좀 먹는다.
오늘의 긴급함을 위해 미래를 약속하는 버릇, ‘~된다면 ~를 주겠다.’ 따위의 영어식 조건절을 입버릇처럼 하는 사람을 피하기로 한다. 공수표를 남발하다 보면 인간관계에도 파산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 힘이 없거나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치게 만들어 서다. 만일, 그 사람을 믿고 싶거든 말이 아니라 ‘행동의 교환’을 살피도록 한다. ‘행동의 등가’만이 관계에 지속성을 부여한다. 동등한 행동을 책임질 수 없다면 부추기지도 말아야 한다.
스물일곱이 되기까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대학 시절 처음 스물일곱의 학교 선배를 봤을 때, ‘뭔 저런 아저씨가 있어?’ 하고 놀랬더랬다. 그러던 내가 그 나이에 들어섰다. 나는 그때 보다 확실히 피가 식었다. 점점 자기 분수를 알고 그 선을 넘지 않고 기다리는 것도 꽤나 큰 미덕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자기 분수의 무거움, 책임감의 압박. 뜨거운 심장을 가진 생물학적 냉혈한은 오늘도 1인분을 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1인분하기가 이렇게나 어려운지를 체감하고 있다. 글의 절반만이라도 살아보고 싶다고 시린 발의 사내가 밤기운을 받아 나에게 편지를 쓴다. 나이 먹기 싫다. 굿밤.
-2017.12.02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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