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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1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나의 투쟁1] 철저히 이기적인 투쟁은 만인의 욕망을 자극한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글쓰기밖에 없다. -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100%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음악 따위, 미련 없이 포기하겠습니다(p.39)...세상이 끝날 때까지, 나는 음악에 뼛속까지 중독되어 있고 싶다.(p.75)” 스물여덟 김윤아가 솔로1집 에세이에 적은 글이다. 친구와 광화문 교보문고로 달려가 한참 긴 줄을 썼다가 사인을 받고 악수를 청했다. 태어나서 처음 가본 출간 기념회였고, 처음 잡아본 유명인의 손이었다. 빨개진 얼굴, 허공에서 한참 떨었던 손. 김윤아는 음악이라면 나는 글이다. 지금도 글에 안 써질 때 나는 오른손바닥을 펼쳐 한참을 쳐다본다. 바로, 2001년의 공기와 기분에 휩싸인다. 기억하려는 나만의 의식, 잊지 않으면 멈추지 않을 수 있다.
매일 무언가를 쓰고 지운다. 서른을 넘기니, 책 한권이 없음에도 모든 지인이 나를 글쟁이로 인식한다. 인정을 받으면 응원을 받는다. 그때부터 꿈은 간절한 바람이 아니라 존재의 정언명령이 된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확보해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에 예민하고, 그것을 위해 약속을 취소하거나 잠을 안 자는 등의 짓을 기꺼이 한다. 시간 낭비를 질색하면서 그것에 한창 몰입하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행복해 한다. 종류만 다를 뿐, 모든 인간에게 그런 것이 하나씩 있다. 타인들에겐 이상하지만, 자신에게는 절대적이고 당연한. 그런 투쟁을 아는 이에게 『나의 투쟁』은 짜릿한 관음거리다.
“1. 작가님에게만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2. 작가님(의 작품)이 대중이 돈을 지불할 만한 존재인가요?” 출판기획서나 초고를 가져가면 출판사(편집자)는 대개 이 두 가지 잣대를 들이대며 거부한다. 출판 뿐 아니라 모든 문화예술 장르가 콘텐츠와 생산자가 너무 많다. 경쟁력은 작품성보다 인지도에서 확보하는 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확실한 대중의 수요만 있다면, 창작을 돕거나 대리할 사람은 차고 넘친다. 그런 의미에서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은 충격적이다. 출판사와 글쟁이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치며 묻는다. 당신 출판사는 이런 원고를 망설임 없이 출간할 수 있는가. 당신은 이런 소설을 시작하고 완성할 수 있는가.
잉바르 암비에른센이 쓴 『엘링』이라는 소설이 있다. 1996년 완간해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어지고 수출도 하며 노르웨이에서 히트친 소설인데 거기 이런 대목이 나온다. “노르웨이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의 시집은 평균 몇 부나 팔릴까? 잘은 모르겠지만 마흔 부 정도가 최고가 아닐까 생각된다. 출간 직후 주위 친구들에게 뿌린 책은 제외하고 말이다.” 『나의 투쟁』을 번역한 손화수의 말처럼 노르웨이의 문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해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요 뇌스베 등 노르웨이 스릴러가 상당히 인기가 있다. 크누트 함순 등 꾸준히 번역되는 작가들이 있고 노르웨이어 전문번역가도 등장하였다.
노르웨이의 총 인구는 530여만 명, 독서 인구가 많다 하더라도 20여 년 전 잉바르 암비에른센의 지적처럼 글쟁이들에게 결코 안락한 나라가 아니다. 『나의 투쟁』은 그런 노르웨이에서 인구의 10%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린 책이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고, 3,622쪽에 달하는 6부작 대작 소설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면 아주 골 때린다. 두서없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일기장, 철저한 사소설이다. 작가 스스로 상업적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독자를 만족시키려 쓴 작품이 아니며, 독자가 작가에게 엿 먹었다고 느껴도 좋다고 패기 넘치게 말한다.
마침내 엘리베이터를 벗어나면, 아이들을 유모차에 앉힌 후 모자와 장갑을 씌우고 10분을 걸어 유아원으로 데려간다. 길에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오후에 아이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와 피할 수 없는 일상의 전쟁을 재개하기까지는 다섯 시간이 있는데, 나는 이 시간 동안 글을 쓸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내게 꼭 필요하다. 나는 엄청난 양의 외로움이 필요하며, 최근 5년의 경우처럼 이 외로움을 얻지 못하면 절망, 심지어는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버리거나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으로 변해버린다. 성인이 된 후 정말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집착에 가까운 하나뿐인 야망은 혼자 있는 시간을 얻지 못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위협 속에 있던 나의 야망은 시간이 흐르면서 마치 페스트처럼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벗어나야만 했다.
시간은 나를 비켜 흘렀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이 손가락 사이의 모래알처럼 스르르 흘러내려 사라져버렸다. 글쎄, 내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저녁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장을 보고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돌보는 일? 젖은 빨래를 말리고, 옷가지를 잘 접어 옷장에 차곡차곡 넣고, 정리를 하고, 탁자와 의자, 벽장을 닦는 일? 이건 투쟁이다. 비록 영웅적인 투쟁이라 할 수는 없지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 치워도 치워도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방, 눈을 뜨고 있는 한 한도 끝도 없이 뒤를 따라다니며 돌봐주어야 하는 아이들 등 내 힘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어떤 지배적인 것들에 맞서는 투쟁인 것이다. - pp.52~53
철저히 이기적인 책이다. 투쟁하기 위해 썼고, 그 자체가 투쟁인 책이다. 삶을, 글을. <나의 투쟁1>은 2008년에 쓰기 시작해 2009년에 출간하였다. 작가는 1968년생,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에 자신―결혼을 두 번 하고 아이가 셋 있는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작가―을 돌아보고 자신을 써내려간다. 그는 1998년 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했고 2004년 두 번째 소설을 냈다. 두 작품 모두 호평을 받았으나 첫 책과 두 번째 책 사이의 공백만큼, 세 번째 책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생 글쓰기를 야망하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남자는 고민 끝에 좋은 글을 쓰려는, 평생 글을 쓰려는 자신의 투쟁을 그대로 기록해나간다.
모든 창작자에게 자전적 콘텐츠는 큰 유혹이다. 물론 경험은 모든 작품의 바탕이 된다. 하지만 사건이나 지인을 그대로 쓰는 것은 가장 쉽지만 위험하다. 자신과 지인의 삶에 피해를 입힐 수 있고, 경험한 것에만 의존해 쓰면 창의력을 계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작가는 책을 내면 낼수록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일부로 자전소설은 안 쓰려 안간힘을 쓴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출간 전 『나의 투쟁』에 등장하는 실재 인물들에게 원고를 보내 미리 읽고 익명이나 가명 처리를 할 것인지 물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군나르 삼촌이나 전처 토니에와는 법정까지 갔다고 한다.
그만큼 묘사가 세밀하다. 2장으로 나뉜 <나의 투쟁1>은, 2008년의 시점에서 현재의 일상 묘사와, 자신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20대를 거쳐 서른 즈음 겪은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린 자녀들과 집안일에 대한 신랄한 스트레스 묘사부터, 소년 시절 생식기 외모에 대한 고뇌와 첫경험을 향한 시행착오, 윙베 형과의 일 등 한 소재 한 소재에 정성들여 기록한다. 퍼붓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해 기억해내고 집착해 기록한다. 특히 태어나서 처음 겪은 시신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부분은 그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어했을 만큼 천착했던 주제였던 만큼 1권 안에서 비중이나 서술이 독보적이다.
이렇듯 문학이 일어나고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자리하고 있는 강렬한 세부적 요소들을 분해하고 해체해야 한다. 분해하고 해체하는 작업이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파괴에 가까운 작업이다. - p.302
『나의 투쟁』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전 세계 32개국에 출간되고 자국과 해외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다. <나의 투쟁1>을 읽으며, 현재 독자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희망을 준 집필이고 출판이라고 생각했다. 독서는 계속 민주화되고 있다. 그런데 그 방향이 독서 인구와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보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글쓰기 강좌와 강연, 자비출판이나 독립출판의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많은 작가가 책을 내는 것보다 글쓰기 수업으로 더 돈을 많이 버는 시대다. <나의 투쟁1>에서 읽은 것은 타인의 처절한 이기적 투쟁이었지만, 느낀 것은 만인의 욕망이었다. 남은 다섯권에서, 무엇을 더 마주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