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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들의 집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평점 :
[피에로들의 집] 무대화된 현실, 삐걱거림의 판타지아
수년 전부터 나는 도시 난민을 소재로 한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가족 공동체의 해체를 비롯해 삶의 기반을 상실한 채 실제적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유대가 붕괴되면서 심각하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존재들이다. 나는 이 훼손된 존재들을 통해 새로운 유사 가족의 형태와 그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고 싶었다. 이는 삶의 생태 복원이라는 나의 문학적 지향과도 맞물리는 것이었다. - 작가의 말 中(p.247)
성북동엔 ‘아몬드나무 하우스’가 있다. 1층에 고흐의 <꽃 핀 아몬드나무>가 걸린 이 4층집은 북카페지만 영업은커녕 로스팅머신도 없고, 기실 ‘마마’의 품속으로 모여 든 ‘고아’ 같고 ‘난민’ 같은 이들이 같이 사는 공동 주택이다. 누구 하나 평탄한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아몬드나무 하우스’의 동거자들은 서로의 사연은 알고는 있지만 함께 짊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한 데 살면서 ‘가족’ 의식을 키워나가는데 ‘마마’는 숨소리조차 없는 침묵으로 그들의 욕망을 묵살한다. 이 기묘한 집에 ‘마마’의 제안을 받은 김명우가 집사로 들어온다. 마치 ‘아몬드 나무 하우스’의 완성은 김명우인 것처럼 그가 입주하자 장사가 시작되고, 이야기가 폭주한다. 마마, 명우, 난희, 보라, 현주, 윤정, 정민, 윤태가 얼키고 설켰던 시간들.
일독을 마쳤을 때 너무나 괴상한 기분이었다. 처음엔 완성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피에로들의 집>은 ‘도시 난민’과 ‘유사 가족’이라는 매력적인 주제가, ‘영화․그림․음악․책’이 종횡무진 하는 현란한 양념을 얹어, ‘슬럼프’와 ‘세월호’라는 작가의 내외적 작가의 문제와 결합한 소설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전혀 섞여 있지 않다. 분명 한 편의 소설인데, 조각조각 구획화된 글로 읽힌다. 교과서 같은 결말 처리에 그 동안 읽었던 모든 것들이 허무하고 평이하게 느껴지며 온 힘이 빠진다. 11년 만에 완결한 장편소설이라면, 그 소설은 역작 아니면 졸작일 확률이 높다. 이 소설은 후자구나 하고 진저리쳤던 한참 동안의 시간을 정리할 찰나 다른 생각이 스쳤다. 원래 이런 소설, 이상하고 낯선 소설이라고.
순간 나는 절망 이후에 찾아온다는 체념과 마주하고 있었다. 말해 무엇하랴만,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잃고 삶을 허비하게 되면 어떤 기회라도 늘 다른 이의 몫으로 돌아가게 마련이었다. - p.13
누군가와 헤어졌다는 사실보다 그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뒤에 남겨진 자의 더한 고통이자 혼란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사라짐의 의미도 조금씩 변해갔다. 한동안은 그녀를 탓하고 원망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후 긴 자책의 시간이 찾아왔고 지금은 그녀가 오직 살아 있어주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과 강요된 체념만이 남게 되었다. - p.50
“저야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런 저런 얘기를 듣다보니 난민을 거둬 보살피는 대모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봐야겠죠. 지금 아몬드나무 하우스에 살고 있는 이들 모두가 실은 난민이나 고아 같은 존재들이니까요. 어쩌면 당신도 난민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마마로 살아가는 거겠죠. 남달리 외롭게 살아온 분이거든요.” - p.93
<피에로들의 집>의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김명우가 지인들에게 늘 듣는 소리가 있다. 말을 ‘연극 대사조’로 한다는 것. 가만히 보면 <피에로들의 집> 자체가 ‘무대화한’ 현실 ‘이야기’이다. 소설 자체가 현실에 바탕을 둔 허구(이야기)인데 <피에로들의 집>은 그 소설을 다시 연극화함으로써 현실과의 이질감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보니 이 책이 동시대에 실재하는 인물과 장소와 사물의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 작위적인 판타지로 느껴졌던 것이 비로소 수긍이 간다. 완벽하게 작가가 설계한 세트장 서울 위에 펼쳐지는 인형극을 보는 느낌이랄까. 계간지 연재 당시 제목이 ‘피에로들의 밤’이었다는 걸 듣자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작가는 소설의 무게중심을 피에로의 ‘속성’에서 ‘연대’로 맞추기 위해 ‘밤’을 ‘집’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 책은 연극(피에로)이 끝나고 난 뒤(밤)의 심정으로 ‘읽는 연극’이라고.
제목을 의식하지 않으면 처음 <피에로들의 집>은 대단히 디테일이 살아 있는 섬세하고 현실적인 소설처럼 느껴진다.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의 묘사부터해서 배경 설명이 매우 자세한데다가 실재했던 것이나 그를 비슷하게 바꾼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몬드나무 하우스’의 이야기로 들어가면서 인물, 구성, 전개가 상투적이고 단순해진다. 여기에서의 섬세한 묘사는 현실성을 높이는 게 아니라 소설을 더욱 극적이고 작위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그래서 인물 각자는 비련의 주인공 심정으로 자기 삶에 몰두하지만 독자들은 심드렁하다. 예상한 지점에 대모는 아프고 입주자들은 퇴장한다. 다들 적절할 때에 사고나고, 떠나고, 만나고, 죽는다. 그 모든 일에 김명우가 있으며 남의 인생 해결과 자기 성장을 동시에 도모한다.
“네, 기성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때로 무차별적으로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걸까요? 더군다나 기득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거칠어지죠. 그런 난폭한 방식으로 자기 보상을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 같은데도 말예요.”
그는 계속 얘기하고 싶은 눈치였고 나는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텔레비전을 통해 사회적 재난을 시청하면서 그때마다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는 부류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녁을 먹고 나서 일가족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한가롭게 차를 마시면서 말예요. 타인의 불행을 목격하면서 내가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대적인 안도감을 느낀다는 거죠.” - p.147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다름 아닌 박윤정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지난겨울 그녀가 여행했던 행로를 따라 내가 지금 이곳에 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김현주와 정민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내가 다시 아몬드나무 하우스로 돌아가기 위해 떠나왔다는 사실을 절로 알게 되었다. 거기엔 내가 해결해야 할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 p.244
그 와중에 작가는 ‘세월호’로 힘든 심정이나(당시 연재를 중단했었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티나게 드러낸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우며 총체적 난국이다. 하지만 제목을 의식하고 보면 이 책의 모든 괴상함이 ‘삐걱거림의 판타지아’로 느껴진다. 아마추어스러움, 진부함, 현실적인 비현실 등 책 안에서 수없이 부딪히고 있는 이질감과 한없이 흠처럼 느껴졌던 것을 모두 ‘피에로’라는 상징 뒤로 숨길 수 있다. 과장, 공허, 거짓, 조롱 등 광대놀음 그 자체로. 정서는 무대 중이 아닌 무대 후로. 그렇게 보면 더러는 낭만적이고 더러는 측은하며 만감이 교차해 제법 독후감이 괜찮아진다. <피에로들의 집>은 그래서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 소설이다. 누군가는 열광하고 의미 부여하며 소설을 한참 곱씹고 즐기겠지만, 누군가에겐 작가 이름을 다시 확인하며 기함하고 실망할 소설이다.
윤대녕 작가와 <피에로들의 집>의 가장 큰 적은 작가 자신, ‘윤대녕’의 네임 벨류(문단의 위치)다. 문단의 중요 스승이자 중견작가가 정통 문예지(『계간 문학동네』)에 연재․발표한 소설이 아니라 신인 작가가 쓴 소설이었다면 분명 더욱 후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형식적 실험, 아이디어만 건질만한 평작이었다. 숱한 퇴고를 했음에도 책 속에 작가가 글을 쥐어짜는 고통이 곳곳에 느껴졌고, 여러모로 반듯하고 모범적이었지만 그래서 감탄하지 못하는 소설이었다. 윤대녕 스스로도 오랫동안 지향하고, 구상하고, 시도했던 주제라고 밝혔듯 <피에로들의 집>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소설은 반드시 다시 나올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 미래가 있다면 프로토타입으로 견뎌볼 만한 소설이다.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출간 기념, 소진시까지 '윤대녕 필사노트' 증정 中
4-5mm 두께의 손바닥 노트다. 윤대녕의 전작을 발췌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