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시리즈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권일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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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작가다운 작가와 그에 대한 애정과 존경으로 빚은 걸작집

 

  
 

 

일본 본격 추리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거니와 일본 문학 자체를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워낙 소설을 읽을 때 서정보다 서사를, 문장보다 세계관과 사회참여성에 마음이 기우는지라 마츠모토 세이초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사회파 추리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장르적 재미와 완성도는 본격 추리가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에도가와 란포에 대해서만큼은 막연하지만 강하게 필독 작가라는 과제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 본격 추리의 아버지이자 대란포로 불리는 위용이 무색하게 그의 책은 국내에 번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괜찮은 전집, 선집을 내는 출판사가 그 동안 없었고, 그나마 2008년 두드림에서 단편 전집을 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올 초 시공사의 장르문학 브랜드 검은숲에서 출간한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는 존재만으로 소중하고 반가운 책이었다. 그런데 그 만듦새까지 훌륭해서 무척 만족스러웠다. 출간순이 아니라 나름의 기준으로 엄선한 단편과 장편의 조합으로 책을 엮었는데, 출판사가 ‘(한국에서) 나 없이 란포 보지 마라’고 하는 듯한 환청이 들릴 것 같은 압도적인 질이었다. 작가를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이 책의 편집에 그대로 느껴지는 책이었다. 

 

 

일본의 최신 에도가와 란포 전집이자 그간의 란포 연구와 서지학적 자료를 야무지게 모아둔, 고분샤의 에도가와 란포 전집(30)’를 원전으로 하였다. 다만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편집부역자와 일본 출판사, 유족이 논의하여 단편과 장편이 있는 우리만의 또 다른 결정판으로 다시 냈다. 1권을 내며 란포의 직계손과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 평론가들이 기획한 <에도가와 란포 전집 30>의 국내 유일 정식 완역본으로 시리즈를 홍보한 걸로 봐서 엘러리 퀸 시리즈처럼 뚝심 있게 전집으로 완결할지 모르겠다. 설사 선집으로 그친다 하더라도 에도가와 란포의 마니아나 이제 관심이 생긴 독자들에게 소장 가치 200% 이상이다.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에는 단편 세편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애벌레,천장 위의 산책자와 장편 거미남을 실었다. 각 작품은 읽기 전에-작품 본문-자작 해설로 구분되어 있으며 다시 풍부한 각주를 통해 판본별 차이나 작품 관련 정보들을 담고 있다.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은 초판 한정으로 전용 케이스가 있는 3권 분권 반양장 누드사철본으로 나왔다. 2쇄부터는 일반 단권 양장본(케이스 없음)으로 나온다고 하는데, 누드사철본이 예상외로 아주 튼튼하고 종이가 완전히 펴져서 읽기 편했다. 분권으로 되어 있어 휴대하기도 좋았고.

 

 

소설은 재밌어야 한다. 재밌으면 된다.’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을 읽으며 소설의 의미와 도리는 이것이라고 깊이 깨달았다. 실린 네 편 중 어느 하나 평범하고 재미없는 소설이 없다. 에도가와 란포는 1923년 등단하였다. 순수소설과 장르소설의 경계가 없으며 일본형 추리소설이 구축되지 않았던 시대, 젊은 에도가와 란포는 오늘날 문학계에 자신의 위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거미남을 발표하기 전에는 오히려 통속소설이 판치고 순수소설이 위기인 것에 심한 고민과 좌절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는 소설에 어떤 철학(사상)이나 가치관도 담지 않았다. 그저 읽기에 재밌는 소설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였고, 자신의 재능을 자신하지 못하였다. 등단한 지 3(1926난쟁이발표)만에 심한 비관에 빠져 2년 휴필한 적도 있는 그였다. 에도가와 란포는 작가와 소설, 평론의 관계에 대해서도 유의미한 질문을 던진다. ‘자작 해설’, 흔히 작품은 출간되는 순간 작가의 품을 완전히 떠나기에 평론이 존재하고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한 해석을 독점할 권리가 없다고 하는데 그는 반드시 자기 작품마다 평을 붙였다. ‘자작 해설은 과장된 표현이지만 적어도 자기 작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며 끝까지 놓지 않았다.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1929)-단편: 일본적 미학의 세계로 초대하는 꿈결 같은 환상기담

1929년 발표한 단편소설. 작가에게 흔한, 문예지 독촉에 급히 쓴 작품인데 뜻밖에 상당히 란포에게 상당한 애착 작품이 되었다. 처음 쓴 원고를 너무 졸작이라고 찢었다가 1년 반 후에 급히 쓸 소설을 고민하다가 개작했다는데, 대단히 일본적인 미학이 살아 있는 환상기담이다. 오시에(압화의 일종) 속 아가씨에 매료되어 상사병에 걸린 남자가 결국 스스로 오시에 속에 들어가버리고, 그 오시에를 가지고 다니며 서글퍼하는 남자의 동생이 전하는 기묘한 이야기.


 

애벌레(1929)-단편: 작가관을 엿볼 수 있는 전설적 금지소설

일본의 군국주의와 대동아공영 광기는 19세기 말부터 해가 갈수록 강해져 갔다. 만주사변 직전에 일본이 개입했던 전투의 피해자를 소재로 한 애벌레는 당대 일본인들에겐 너무 야하고 엽기적인데다가 반사회적이라 처음엔 악몽으로 제목을 바꾸며 출간하기도 하고 검열을 피해 복자(……)를 남발을 했으나 오랫 동안 금지소설이었다. 촉망 받던 군인이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사지를 잃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에 몸뚱이만 있는 애벌레 같은 꼴이 된다. 집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역전되고, 아내는 본심을 드러내는데, 강렬한 결말을 대표로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애벌레이미지가 대단히 세다. 란포는 반전이나 장애인혐오로 쓴 게 아니라, 그저 기발하고 독특한 소설을 쓰고 싶어 쓴 것인데, 대단히 시대를 앞서나간 전설적 문제작이다.

 


천장 위 산책자(1925)-단편: 자칭타칭 작가의 초기 대표작이자 아케치 고고로’ 시리즈 일종

일본의 가옥구조를 잘 모르는 타국인들에겐 천장 위(지붕 아래) 공간이 낯설어서 다락방으로 흔히 번역되곤 하였던 작품. 역시 작가들에게 흔한, 소소한 일상을 집요하게 소재로 잡고 발전시킨 소설이다. 천장 위 산책에 빠진 범죄 오타쿠라는 주인공 설정이 독특하다. 일본의 최초 사립탐정 캐릭터이자 일본 3대 명탐정 캐릭터(에도가와 란포의 아케치 고고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다카기 아키미쓰의 가즈미 교스케)’ 중 하나인 아케치 고고로(1925년 창조)가 등장하는 단편소설 중 하나이다.

 

거미남(1929-30)-장편: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에도가와 란포의 첫 통속소설. 아케치 고고로’ 시리즈 일종, too

흔히 장르문학을 대단히 통속적이고 순수문학의 반대 개념으로 여기는 것과 달리, 일본 본격 추리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는 통속소설 집필을 꺼렸다. 고단샤의 끈질긴 설득 끝에 <거미남>을 시작으로 여러편의 통속소설을 쓰게 되는데 원고료도 많이 주고 수정 요구를 하지 않는 고단샤에 태도를 우호적으로 바꾼다. 목적 달성(교미) 후 수컷을 잡아 먹는 잔혹하고 소름끼치는 암거미를 닮은 살인마 거미남(푸른 수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상한 회사 채용공고로 시작해 결말까지 계속 반전하며 독자가 편안할 틈을 안 주는 전개가 매우 인상적인 작품. 아케치 고고로가 활약하는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1.변신 소망 평생 간직한 코스프레 소망

2,투명인간 소망과 혐인증 근저에 흐르는 히키코모리사상

3.태내 소망 벽장 속의 향락

4.엿보기 취미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본다

5.렌즈 선호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로서의 장치

6,아사쿠사 취미 범죄애호자의 장난감 상자

7.구경거리 취미 애착과 향수의 모티브

8.유토피아 소망 파노라마 취향이 낳은 인공 낙원

9.인형 사랑 인공물에 담긴 영원한 아름다움

10.성적 도착 반복해서 묘사된 페티시즘의 쾌락

11.잔학 선호 향수로서의 그로테스크

12.탐정소설 취미 명탐정들에게 바치는 오마주

13.괴기 취미 표현 방식으로서의 괴기적 연출

14.자기애 자신과 관련된 자료 수집과 셀프 패러디, 잔학성

노무라 고헤이(란포 연구가/3p.214)

 

 

란포 연구가인 노무라 고헤이는 에도가와 란포 소설을 읽는 키워드를 14개로 꼽았다. 역자처럼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속 네 편의 키워드를 나름대로 분석하며 2권엔 어떤 작품이 담길지 예상해보는 것도 이 책과 노는 한 가지 방법이다. '결정판'을 붙이면서 결정판스럽지 않은 평범한 선집, 전집이 많은데 시공사의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결정판'이란 이름에 걸맞는 걸작선이었다. 일단 이 책을 보고나면 다른 출판사의 란포 번역본이 읽기 싫을 정도로 공들인 번역과 편집이 남다른 책이다. 「거미남」은 초역이라 그렇다치더라도 나머지 세 편은 이미 번역된 적이 있는데도 새로 읽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에도가와 란포. 일본의 본격 추리 소설을 논할 때 그를 빼놓을 방법이 있을까. 드디어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들을 읽기 좋은 전집(선집)이 나왔다. 에도가와 란포에 대해 그렇게 잘 알지 못하고 일본 장르문학의 고전을 읽는다는 의무감으로 읽은게 더 컸는데, 이 책 덕에 란포의 매력에 푹 빠졌다. 비슷한 생각으로 읽기를 망설이는 독자에게 강력 추천한다. 출판사와 번역자의 성실함과 세심함도 대단하지만, 역시 에도가와 란포가 작가다운 작가이기 때문에 책이 이만큼 완성도 있고 반짝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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