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족의 역사 북멘토 그래픽노블 톡 1
리쿤우 지음, 김택규 옮김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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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족의 역사] 화가가 끔찍한 상처를 그려 남기는 이유는

 

 

 

 

역사에 대한 기억은 현실을 향한 응시이자 미래를 향한 전망입니다.

이 만화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 리쿤우

 

우리 가족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상처가 다시 드러났다...

전쟁 속의 인간은 선택권이 없다...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오랜 세월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역사는 잊어서는 안 되며 곡해는 더더욱 금물이다.,,

시대의 흔적인 동시에 기억이 내 삶 속에 새긴 콤플렉스...

해묵은 감정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억을 되새기는 것이다...

- 서문을 대신한 저자(리쿤우)의 창작노트 中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는 며칠 전 <기획회의> 12월호를 발행하며 올해의 출판계 주요 키워드 30개를 뽑고 그 중 최고의 키워드로 ‘추억의 반추(역사)’를 꼽았다. 고동석 <기획회의> 편집주간의 말처럼 한 사회가 집단적으로 반추하는 추억을 우리는 ‘역사’라고 말한다. 올해는 ‘역사’를 바라보는 책이 여럿 나오고 큰 인기를 누렸는데 단순한 역사책 열풍이 아니라 장르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 개인적인 시선의 미시사라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변호인>과 <명량> 등 상당히 허구를 가미한 ‘보고 싶은 대로의 역사’ 영화에 쏠린 광풍과도 맥을 함께 한다. 개인으로서의 무력함과 리더다운 리더에 대한 목마름, 그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를 드높이고픈 욕망이 다양한 방식으로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소설로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황석영의 <투명인간>이 유의미했고, 외국 소설로는 일자무식 스웨덴 사내가 온갖 20세기 세계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의 주인공이었다는 코미디물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꾸준히 베스트셀러 랭킹을 지켰다. 이러한 흐름을 대변하는 가장 상징적인 책으로. 정계 은퇴 후 안정적으로 작가로 컴백한 유시민의 <나의 한국 근현대사>를 꼽고 싶다.

 

 

역사가가 아닌 이상 개인에게 역사와 시대는 자신이 겪어 온 시간 덩어리로, 기억으로 기록되고 저장된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적 서술은 자의적이고 사적이게 마련이다. 자신과 뗄 수 없고 집안이나 가족과 뗄 수 없는 사건일수록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리쿤우의 그래픽노블 <내 가족의 역사>를 읽으며 떠오르는 추억 하나가 있었다. 대학 졸업 여행 겸 중국에 11일 동안 체류했던 경험이다. 3,200만원 4년 등록금 중 300만원도 채 회수하지 못했던 비루한 부모 등골 브레이커가 장학금을 털어 떠났던 유일한 해외여행 경험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감 등 평소 그리 좋아하는 나라도 아니었고, 현지에서도 그 짧은 기간 동안 별의별 사건에 물과 공기가 너무 안 맞아 술과 차로 연명했던 지난한 여정이었음에도 감행하고 즐겼던 이유는 중국 곳곳에 산재한 우리 독립운동유적지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임시정부조차도 국가가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 우리 같은 민간의 지속적인 방문과 우리보다 몇 백배 반일감정이 강한 중국 인민들의 오지랖 덕에 겨우겨우 보존해오고 있다. 홍커우 공원에서 조깅하다 윤봉길 의사 찾다 하며 일상적으로 윤봉길을 상기하는 인민들, 우리와 되도 않는 영어와 보디랭귀지로 난징대학살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눴던 대학생 등 역사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기억욕은 대단하였다. 대도시 한복판에 판잣집처럼 있던 독립유적지들에도 애써 참던 눈물이 터져 나왔던 것은 태양산 등 1930년대 한중 연합 무장독립전쟁 관련 유적지들에서였다. 그늘 하나 없이 작열하는 민둥산에서도 총알받이를 각오하고서라도 싸웠다는 충격적 사실, 무너진 벽들에 70년이 지난 지금도 한이 절절히 느껴지는 표어 등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광경에 온 마음이 무너졌었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그 척박하고 외진 내륙 지역에서도 조상들을 자랑스러워하며 그 끔찍한 흔적들을 보존하며 대대손손 기억하는 현지인들이었다. 그래서 <내 가족의 역사>의 창작 동기와 작가의 정서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작가인, 중국의 화가 겸 만화가인 리쿤우는 1955년생이다. <내 가족의 역사>의 큰 중심소재는 1894년에서 1895년 벌어졌던 청일전쟁과 1937년에서 1945년 벌어졌던 중일전쟁이다. 즉 그 후 출생한 리쿤우의 역사는 아니기에 ‘내 가족의 역사’다. 특히 책 후반부 중일 전쟁에 대한 부분은 작가의 장인이 겪은 1938년 쿤밍 대폭격과도 이어지기 때문에 청일전쟁보다 더 직접적인 ‘내 가족의 역사’이다. 리쿤우는 다양한 분야에서 미술활동을 해온 중국 미술계의 거목이다. 그리고 <중국인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전적 역사 만화를 그리면서 프랑스와 벨기에에 이름을 알렸다. 현대사를 소재로 한 <중국인 이야기>와 <내 가족의 역사>는 사회 고발적 성격이 강하다. 그의 자전적 역사 만화 시리즈가 몇 작품으로 끝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지금의 창작 행보는 반드시 할 만큼 하고 살 풀어야 하는 일종의 인생의 소명 같은 것이다. 그래서 역사물보다 저널리즘 르포 같은 분위기가 더 짙다. 만화의 모티브가 된, 아예 스캔까지 해버린 청일전쟁 관련 그림과 복사를 할 방법이 없어 하루 종일 걸려 일일이 사진을 찍은 중일전쟁 관련 사진의 상당 부분이 만화에 직접 삽입되다보니 더 그런 느낌이 강하다.

 

 

<내 가족의 역사>를 읽으며 비장함마저 느끼는 것은 판화를 보는 듯한 진한 만화체인 것도 한 몫 한다. 한술 더 떠 <내 가족의 역사>의 경우 후반부 장인의 회고 부분은 아예 굳이 일일이 판화를 제작해 페이지를 구성하였다. 줄거리 자체는 단순한 그래픽노블이다. 골동품 시장에서 얻게 된 귀한 전쟁 자료로 직업정신을 살려 만화로 남긴다는 이야기. 머리도 식힐 겸 골동품 시장 산책에 나선 리(작가)는 자신을 그저 라오치(형제 중 일곱째)라고만 부르라는 묘한 장사치를 만나고, 이상하게 리에게 강한 호감과 신뢰를 느끼는 라오치는 리에게 자신이 ‘애국주의의 국보’로 친다는 일본의 전쟁기록화를 며칠 유상 대여한다. 작업실에 돌아온 리는 조수의 도움(번역)으로 그 그림이 청일전쟁을 아주 세세히 그림으로 그린 걸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전율을 느끼며 몰래 스캔을 뜬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림을 반납하고 대여금을 더 쳐주면서 스캔 사실을 이실직고한다. 라오치는 잠시 당황했다가, 이런 쪽에 관심이 있다면 스승님의 소장품을 소개하고 싶다고 스승님 댁으로 리를 데려가는데 그곳엔 스승이 평생 모았다는 엄청난 양의 중일전쟁 기록 사진집이 있었다.

 

 

그 사진집을 복사할 방법이 없어 일일이 사진을 찍고 인화하는데 그 사진뭉치만 5kg, 조수가 일일이 번역해 1937년에서 1938년 위주의 자료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국주의에 온 열도가 미쳐 날뛰던 시대, 뉴스에 일희일비하는 국민들을 위해 온 전쟁터를 함께 다니며, 병사보다 더 앞서고 방독면을 써서라도 사진을 다 남긴 일본인 종군기자들의 직업정신이 남긴 ‘치욕스러운 보물’이었다. 라오치의 스승이 워낙 좋은 물건을 구했고 보존도 탁월해, 사진을 사진으로 찍은 것만 보고 있노라도 마치 그 시대를 겪고 있는 듯 생생하였다. 사정없이 적에게 잔인한 일본군이 어떤 중국인 장교의 죽음엔 묵념한 것에 의아하기도 하고, 일본군의 점령에 투항한 것까진 좋은데 일본군보다 더 악랄하게 중국인을 착취한 매국노에 분노하기도 하고 조수의 번역을 들으며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쯤 장인이 겪었다는 1938년 쿤밍 대폭격 기사를 보게 된다. 그 길로 장인을 찾아가 설득하고 설득한 끝에 장인이 죽기 전 가까스로 회고담을 듣고 만다. 그 때가 1998년이었다. 그리고 2012년에야 한 권 분량의 그래픽노블로 완성할 수 있었다.

 

 

결말이 무척 극적이라(드라마에선 흔하지만 현실에선 흔하지 않는) 이 만화가 전부 사실인 게 맞는 건지, 팩션이라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떤 부분이 허구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한국어판 제목의 이유가 짐작은 가지만 왜 굳이 원제를 바꿨는지 모르겠다. 원제인 <상흔傷痕>이 훨씬 작품의 주제의식과 정체성을 명확히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골동품 시장에서 우연히 겪은 기묘한 경험과 인연은 잊고 있던 상처를 건드린다. 애써 세월이 이겨냈지만 완전히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하고 흉터를 남겼다. 그 흔적을 다시 외면하지 않고 들췄다. 누군가는 놀라고 누군가는 찡그리고 누군가는 그 흉터를 더 건드리며 생채기를 낸다. 누구는 새살이 솔솔 나는 연고를 가지고 뛰어올 것이고 누구는 말없이 안아줄 것이며 누구는 그저 한참을 서서 울다 갈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아픔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함께 견뎌 이겨낼 수 있는 존재. 같은 내용을 글만 쓰지 않고 일일이 그림으로 표현하면 시간이 몇 배나 들고 힘들다. 내용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화가는 펜과 함께 붓을 잡았고, 그도 성에 안차 판화까지 새겼다. 책 속의 문장처럼 한 개인의 가장 아픈 상처이자 한 가족의 역사에서 가장 침통한 한 페이지(p.257)일지라도 알리고 남겨서 ‘같이’ 기억하고 싶었다.

 

 

<내 가족의 역사>는 북멘토 출판사의 그래픽노블 시리즈 ‘톡’의 첫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고, 두 번째 책으론 한국전쟁을 다룬 우리 그래픽노블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가제, 근간)>이 예정되어 있다. 여러 출판사들이 10여년 가까이 고군분투한 끝에 우리나라도 그래픽노블을 꾸준히 찾는 독자층이 형성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북멘토의 ‘톡’ 시리즈는 색깔이 독특한데 ‘십 대와 어른이 함께 읽는 만화’라는 콘셉트로 평화, 인권, 노동, 생태 등을 다룬 사회성 강한 그래픽노블을 출간할 계획이라니 기대가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경구를 그렇게 좋아라하며 마구 인용하면서도, 나라가 앞장서 역사 교육을 홀대하는 우리 사회. 이 책도 ‘추억의 반추’ 유행이 역사 관심을 자극한 김에 올해가 가기 전 읽어볼 만하다고 적극 추천해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인보다 심하게 일본의 착취를 받은 우리가 더 생각과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기 좋은 책이기도 하고, 청일전쟁과 중일전쟁은 우리 역사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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