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박생강 지음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건투를 비는 물건

 

  

1983년생인 롯데 빼빼로, 기억이 희미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 과자가 1971년생인 농심 새우깡과 함께 아기 시절 처음 접하고 가장 흔히 먹었던 가공과자였던 것 같다. 쑥하고 아래 앞니 오르고 추접스럽게 이유식을 곱씹으며 어른처럼 야무지게 제 몫의 쌀밥을 먹는 그날을 기다릴 때부터였다. 한손에 꼭 잡히고 녹여 먹을 수도 있는 짭짤한 새우과자와 달리 반드시 오독오독 씹어 먹어야 하는 초코 발린 막대과자를 어른들이 건넨 것은 빨리 이 아기가 이와 턱을 단련시켜 사람구실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걸까. 어쨌든 오물오물한 그 작은 입에도 잘 들어오는 슬림한 몸매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초콜릿이 묻힌 그 과자를 굳이 마다할 일이 없었다.

 

특정 회사의 상품을 전 국민이 대놓고 소비하는 날, 기억이 맞다면 이 괴이한 날은 별의별 궤변을 늘어놓으며 호들갑 떨던 세기말에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뜬금없이 등장했는데 이상하게 온 국민이 별 저항 없이 즐기기 시작하더니 오늘에 이르렀다. 1995년 수능이니 1994년 날씬해지라는 선물 따위의 도시전설은 막상 그해를 겪은 내 기억엔 없고 21세기에 와서 주워들은 소리다. 이상하게 그 전에는 아무 때나 먹던 이 과자를 데이가 생기고 나선 별일 없으면 매년 특정 며칠만 먹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데이를 별로 의식하는 것도 아니다. 생기면 먹고, 심심하면 만들거나 사고, 가래떡이든 빼빼로든 맛있으면 다 좋고 둘 다 못 먹고 돼지국밥에 부추를 한 가득 넣어 야무지게 퍼먹어도 상관없다.

  

두 형광색의 보색대비가 찬란한 이 물건의 존재를 안 것은 10월 말 열린책들 출판사 카페에 올라 온 한 남자의 1인 시위 현장이라는 대놓고 다른 의도(신간 홍보)가 드러나는 게시글 때문이었다. 그 남자가 사진에서 들고 있던 책 제목 캘리그래피는 그대로 책 표지에 쓰였다. 신인인가, 재밌는 필명이군하며 업데이트되는 추가 정보를 확인해보니 기성작가였다. 본명 대신 새 필명을 지은 <수상한 식모들>의 박진규, 아 그 작가. 지금은 종합출판사지만 열린책들의 출발이자 대표 정체성은 외국’ ‘문학이었다. 외국 문학 번역 전문 출판사에서 종합출판사로 거듭난 이후에도 문학에 있어선 지금껏 한 번도 한국 문학을 다루지 않았다. 출판사에겐 처음 내는 한국 문학책이고, 작가에겐 새 필명으로 처음 내는 소설이다. 잘 되어야 하는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박생강이라는 필명이 무척 친근하였다. 성자saint와 악당gang의 혼성이라거나 생각의 강이라는 그의 진의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였다. 작가도 처음 생강이 몸에 좋다는 것에 충동적으로 지었다는 것처럼 이 독자에게 생강은 생강이었다. 반가운 이유는 저자와 정반대로 익명성과 무책임성을 드러내는 모든 네티즌 활동에서 굳이 이름을 입력해야 할 땐 무조건 김오뎅이니 김감자니하면서 김씨 성과 두 글자 음식의 조합으로 짓는 나였기 때문이다. 음식 작명 좋아하는구나하며 혼자 반가워라 하고 혼자 엉길 수 있는 것은 대면이 아닌 그가 낳은 책으로 그를 접하는 방구석 독자의 망측한 특권.

  

나는 그럴듯한 소설을 쓸 생각이 없다. 대신 그럴듯함과 그럴듯하지 않음 사이에서 꿈틀대는 어떤 자리들을 발견하고 또 찾아보려 애쓰겠다. (...)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는 이런 발견들에 대한 소설가 박생강의 첫 번째 보고서다. 눈물과 울림의 시약 대신 랑그와 파롤을 으깨 만든 달콤한 독을 페이지 곳곳에 묻혔다. 그리고 앞으로도 정결함과 천박함과 마주하는 은밀하지만 시끄러운 문학의 장소로 당신을 인도할 것이다. 그곳에 엄숙한 성소도 없다. 비빌 언덕도 없다. 어쩌면 세계의 똥 위에 주저앉은 채 실실거리며 웃는, 뿔 위에 꽃 꽂은 소 한 마리쯤이야 있겠지만. - 작가의 말

 

똘기 충만한 이 물건은 한숨에 읽는 것이 가장 맛났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만감과 함께 본문이 끝났음을 확인하고 후식을 즐기기 위해 작가의 말을 읽기 시작했다. 한 장의 그 사족을 읽고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그리고 그럴듯한 서평을 쓸 생각을 접고 내 식대로의 엉망과 예의 사이에서 꿈틀대는 어떤 독후감으로 답하기로 마음먹었다. <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를 읽으며 느꼈던 지배적인 감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놓고 한국적인 소재와 PPL임에도 소설의 정서가 의외로 한국적이지 않다는 느낌이었고, 다른 하나는 많은 생각들을 생각 없이 썼다는 느낌이었다.

 

한국소설 중에 톡톡 튀는 단편이야 수두룩하지만 이 책처럼 완결성 있고 긴 호흡으로 똘기를 유지하는 장편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이 책과 가장 정서적으로 가깝다고 느낀 것은 프랑스의 아멜리 노통브였고, 좀 더 확장하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와도 접점이 있었다. 자신의 책이 외국이나 100년 후에 어떻게 읽힐까, 문장과 어휘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선별하는 구석도 없었다. 온 책으로 소설은 일단 당장 읽어 재밌는 것이 미덕이라고, 예술과 구조미학보다는 발상과 재미가 우선한다고 포효하는 듯하였다. 수많은 아이디어를 엮으며 열심히 쓴 티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느껴짐에도 읽는 감을 가볍고 경쾌하게 만들어놓았다. 

 

 

이 시대의 인간은 어쩌면 빼빼로 피플이네. 인간은 태어나기를 딱딱하고 맛없는 존재로 태어났지. 하지만 거기에 자신의 개성이란 달콤한 초콜릿을 묻히지. 타인을 유혹할 수 있는 존재로 특별해지기 위해. 하지만 그 개성의 비율 역시 언제나 적당한 비율, 손에 개똥같은 초코가 묻어나 불쾌감을 주지 않는 적정선의 비율로 필요하네. 그게 넘어가면 괴짜라거나 변태 취급을 받기 쉽지. 그렇게 이 시대의 인간은 모두 독특한 개성을 추구하는 양 착각하지만 실은 모두 똑같은 봉지 안에 든, 더 나아가, 똑같은 박스 안에 포장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초코 과자 빼빼로와 비슷하다네.” - pp.145~146 

어쩌면 21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은 <빼빼로>가 아닐까? 빼빼로라는 소설이 있기에 어쩌면 사람들은 소설을 읽지 않는 게 아닐까?”

빼빼로는 문장 아닌 막대 과자로 구성된 과자 상자에 통과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1111일에 가까워 오면 그 과자를 통해 자신이 상상하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건 대개 사랑에 대한 환상이지만, 그 환상은 얼룩지고 음산해지며 종종 우울하게 가라앉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그때뿐이다. 시답잖은 베스트셀러를 읽은 뒤에 던져 버리듯 빼빼로데이가 지나면 이내 그 과자는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빼빼로라는 소설을 쓴 사람은 누구야? 아니면 이 과자를 만든 제과업체야? 아니면 이 과자를 통해 욕망하는 우리 모두야?” - p.245

 

 

제목에 충실해 처음 중간 끝 모두 골고루 빼빼로와 빼빼로포비아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운다. 빼빼로와 관련된 온갖 들과 철학이 휘돌고, 더러는 뜻밖의 애로나 예상할 수 있었던 농담과 결합하기도 한다. 소설은 19세 연상 빼빼로포비아 애인 때문에 고민인 스무살 대학생을 상담하는 민형기와 그 사실을 알고 3자 대면을 신청한 빼빼로포비아 당사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만철이란 학생이 학교과제로 쓰고 있는 단편소설의 내용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실재하는 김만철의 지인들에서 따왔고, 우연히 소설의 설정과 같은 인물이 나타나기까지 한다. 김만철의 소설과 현실이 교차하는 탓에 슬슬 긴장과 집중이 커질 때쯤 지금까지의 전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작가는 기상천외한 본론을 들이민다. ‘3단 반전쯤 있는 액자소설이라고 정의하면 될까.

  

사장님이 외계인이고 첫사랑이 외계인 혼혈이었다는 이야기가 펼쳐질 즈음 정신없이 펼쳐지는 SF활극에 잠시 빼빼로와 빼빼로포비아는 잊게 된다. 아니, 사실 책 전체를 읽으면 빼빼로와 빼빼로포비아를 생각 외로 독서 중에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의 입과 글을 통해 읊어지는 빼빼로에 대한 정보들 자체도 사실인지 아닌지 별 중요하지 않다. 빼빼로란 이름은 중요한 걸까. 열병처럼 몰두했다가 금세 식는 애정의 대상, 특별히 맛나고 사랑스러운 것 없이 죄다 비슷비슷한데도 자기는 예외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어떤 가늘고 길며 무언가 발라진 막대과자라는 설명만 있다면 삐삐로나 쿤타킨테 같은 이름이어도 어느 문화권, 어느 시대의 독자들도 소설을 이해하고 즐기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빼빼로를 싫어하고 혐오하는 포비아는 흔치 않더라도, 빼빼로 피플과 빼빼로 데이에 저항하는 이들은 숱하게 많다. 별에서 온 사장님과 강아지와 알약들이 벌이는 사건사고는 얼핏 빼빼로를 고민하는 지구인들을 위축시키는 것 같지만, 결국 이 기막히고 허무맹랑한 스토리텔링은 우리의 존재를 드높인다. 문제의식을 가질 줄 아는 살아 있는 지구인이라면 언젠가 김만철처럼 호송아트와 실리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소설보다 작가의 얼굴을 먼저 안 것은 조금 불행이었다. 얼핏 보고 넘어간 그의 얼굴과 책 속에 언급된 프로필이 어우러진 이미지가 소설을 읽으며 민형기, 김만철, 강사, 사장 모두에서 조금씩 나눠진 것 같다고 자꾸 자의적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다.

 

다분히 빼빼로 데이를 의식하는 듯한 제목과 소재의 책, 그러나 출간일은 의외로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어쩌면 빼빼로 데이 전까지 책을 읽을 시간을 충분히 준, 출판사의 더 둔 한 수일지도 모른다. 김만철과 최향기의 상상처럼 사장은 정말 빼빼로포비아였을까, 어쨌든 그는 빼빼로보다 압도적으로 맛이 좋은 스윗 스틱이라는 막대과자를 만든다. 허구인 줄 알면서도 먹고 한낮 광화문 거리에서 눈물 아롱지고 싶었다. 작가도, 소설도, 캐릭터도 물건이었다. 가볍지만 그런 소설들이 주는 정크푸드 뒷맛이 없다. 실험성과 독창성을 내세우는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제 발상 주체 못함도 없다. 영리하고 깔끔하게 이야기와 색깔 모두 지킨다. 건투를 빈다,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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