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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적을 만들다] 특별하게 발생했으나 사라지게 둘 수 없는 글들
꾸준히
관심 대상이나 이상하게 연이 안 닿는 작가들이 꼭 있다.
긴긴
몸부림 끝에 드디어 에코의 책을 처음 잡게 되었다.
에세이집이라니
부담도 훨씬 덜했다.
‘특별한’
기회에
썼다는 글들이라 하였고 열네 편의 글이 실려 있었다.
7개
국어를 하며,
작가이자
철학자·기호학자·역사학자·미학자·사상가이니 학회다 강연이나 그를 부르는 곳은 너무나 많다.
<적을
만들다>에
실린 글들은 그런 발표나 강연을 위해 쓴 원고들을 출간용으로 재편집한 글들로,
일부는
이미 다른 잡지나 책에 실린 경우도 있다.
분량은
제각각이나 300쪽
조금 넘는 책을 나눠 차지하는 ‘그래봤자
짧은 글’들이고,
주제는
제각각이나 서로 겹치지 않는다.
주제와
난이도와 상관없이 가독성이 좋은 편이고,
각각의
주제와 내용이 반짝반짝 독특한 것들이 많았다.
잠을
잘 기운도 없이 지쳤던 깊은 밤에 전채요리를 즐기듯 기운과 기분을 돋울 요량으로 한 꼭지만 읽고 덮으려 했다가 단숨에 읽어버리고 말았을 만큼
재밌던 책이었다.
<적을
만들다>에
실린 글들은 꽤 오래되었다.
원서의
출간연도도 2011년이고,
2000년대에
이루어졌던 에세이들이다.
그럼에도
지금 읽어도 개성 넘치고,
읽는
이에게 풍부한 영감을 선사하는 글이었다.
그것이
에코의 저력이고 매력이다.
아주
진지하게 실재하지 않는 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하는 가짜 서평이라던가([속담
따라 살기]),
위고와
조이스를 들었다 놓았다하는 신랄한 평가들([오,
빅토르
위고!
과잉의
시학],
[율리시스,
우린
그걸로 됐어요]),
시사적인
이슈에 대한 냉철한 통찰들([천국
밖의 배아들].
[위키리스크에
대한 고찰])
등
한편 한편이 가볍게 묵직하고 무심하게 주옥같다.
특히
표제작인 [적을
만들다]는
저자 서문에서의 고백처럼 마케팅 차원에서 편집자가 밀어붙인 ‘자극적이고
팔리는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혹은
2000년대의
에코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글로 볼 수도 있다.
적은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 체계를 형성하는 중요 기제기에 치열하고 쉼 없이 적을 만들어야 한다는 독특한 견해,
그리고
이 주장이 택시 기사의 사소한 말에서 발전했다는 점은 세상을 포착하는 에코의 혜안과 융통성 있는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디를
굳이 밑줄을 쳐야할지 모를 만큼 감탄스러운 문장의 향연 속에 “수그러들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기에,
나는
내 글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게 둘 수 없었다,”라는
저자 서문 마지막 문장이 유독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특별하게
발생했으나 사라지게 둘 수 없는 글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제 글에 대한 애착과 욕망은 그런 것이다.
<적을
만들다>가
2000년대
에코의 바로미터인 것처럼,
망각되지
않고 샘솟고 또 샘솟는 사상과 문장의 여정을 앞으로도 계속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싶다.
독자에게
관심 작가에 대한 애착과 욕망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