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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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으라차차 내 100년, 둥근 지구는 거들 뿐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알란 할배만큼 이 동요의 가사를 충실히 지킨 삶을 산 사람이 있을까. 99세 때 애지중지하던 고양이를 잡아먹은 여우에게 복수한답시고 사제 폭탄을 설치했다가 집 전체를 날려 먹는 바람에 사회복지사의 권고로 지역 양로원행 신세가 된 알란 할아버지는 이제는 죽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100세 생일 날 창문 밖으로 떨어진다. 이젠 아무리 애써도 오줌이 슬리퍼 너머로 발사되지 않는 가련한 신세지만, 2층에서 떨어져도 잠시 충격이 있었을 뿐 아무렇지 않으니 늙은 육신을 이끌고 천천히 도망간다. 무작정 버스 터미널에 가 50크로나 어치 버스표를 산다(마음 같아선 수중의 전 재산 전부를 털어 가장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으나 사람 일은 알 수 없으므로 600크로나는 다음에 쓰기로 한다). 버스 시간 다 되었는데 다짜고짜 큰 여행 가방을 맡기고 간 양아치 젊은이 때문에 잠시 도망 여정의 위기가 있었지만, 가방 주인이 어떻게 되든 나는 버스를 제때 타련다 정신으로 버스에 오르고, 얼떨결에 도둑이 된다.

 

 

50크로나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허허벌판의 한 폐역이었다. 그곳엔 60대 노인 율리우스가 역사를 개조해서 살고 있었고, 처음엔 경계했으나 적적한 일상에 말동무가 생긴 것 같아 반긴다. 그리고 큰 여행가방에 5000만 크로나가 있었고, 가방을 찾으러 온 양아치 젊은이가 무서워 일단 때려눕힌 후 냉동고에 잠시 둔다는 게 깜박하는 바람에 밤새 가둬놓아 얼어 죽게 만든다. 알란 할배는 졸지에 100세 기념 도망자 겸 도둑 겸 살인자가 되고, 일단 율리우스와 5000만 크로나를 반띵하기로 하면서 할배의 본격적인 좌충우돌 모험이 시작된다. 그의 생일과 실종에 온 지역이 주목할 만큼 ‘100세’ 존재감은 대단하다. 독자는 이 100세 할배의 모험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다는 데서 놀라고, 이 모험은 그의 과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란 점에서 놀란다. 소설은 할배의 도망과 모험이 펼쳐지는 2005년과 할배의 유년 시절부터 양로원 가기 직전까지의 지난 삶을 교차하며 보여 준다.

   

 

<포레스트 검프>보다 더 판이 크고 <그리스인 조르바> 뺨 때리는 자유영혼을 가진 알란 할배이다. 초등학교 3학년 중퇴 학력의 인간이 스웨덴, 스페인, 미국, 중국, 히말라야, 이란, 소련, 북한, 발리, 프랑스 등을 종횡무진하며 세계사의 주요사건을 경험한다는 말도 안 되는 설정임에도 500쪽 넘는 분량을 손가락에 침도 안 바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써내려가는 작가의 글재주에 부지불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더러는 완전히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이 실제 역사 사건과 마구 섞여 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그럴 수도 있겠다며 왠지 모르게 수긍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된다. 스웨덴 인구 9명 중 1명 이상 읽었다는 슈퍼베스트셀러, 무려 데뷔소설인데도 밑도 끝도 없는 현란한 스토리텔링을 보며 인기의 이유를 충분히 알 만 했고 앞으로의 작가 행보가 무척 궁금해진다. 책에서 한국전쟁도 언급되는데 이런 소설을 프랑스어 중역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스웨덴어 번역가가 있다고는 하는데 말이다). 중역이라 아쉬울 뿐, 임호경의 번역문체는 가독성도 좋고 위트 있다.

   

 

일찍 부모님을 여위었어도 가방끈이 짧아도 고자가 되었어도 알란은 아무렇지 않다. 그의 대책 없는 낙천성과 상당한 백치미, 유일하게 관심 있고 잘하는 폭약 제조 실력 덕분에 60년 이상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여러 나라의 보배로 활약하게 될지 알란은 예측했을까. 그런 것도 알란에게 의미 없다. 오늘 살아 있고, 밥과 술만 있다면 그만이고 자신이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한다. 머리 아파서 ‘정치’는 질색이라 어떤 이념에도 동조하진 않지만, 천성 때문에 앞뒤분간 안 하고 유쾌하게 살다보니 얼떨결에 파시스트의 편에 서기도 하고 냉전의 중심에서 이중첩자로 활약하기도 하며, 오만 나라의 우두머리들과 술잔 기울이는 막역지기가 된다. 믿을 수 없지만 정말이다. 이쯤 되면 그가 도덕이나 상식이라든가 등의 세속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초월적이고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성적인 독자에겐 이 황당무계하고 상당부분 비윤리적인 이 소설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만, 상상력 풍부한 마음은 피터팬 독자에겐 이보다 유쾌하고 흡족한 소설도 없다.

 

   

알란 할배와 5천만 크로나와 함께 하는 일당은 율리우스 외 남다른 핫도그 노점상 베니와 욕쟁이 예쁜 언니, 암코끼리 소냐, 갱단 두목 예르닌, 베니의 형 보세와 형사 아르손까지 점점 커져 간다. 그 사연이 얼마나 단기간에 일어나고 극적인지, 어떤 사고가 그들과 함께 하는지는 직접 책을 찾아보길 바란다. 할배의 과거든 현재든 무엇 하나 활자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책 속 가득 펼쳐져 있다. 서울의 모 자치구에선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올해의 노인 추천 도서로 선정하였다. 현재 이 소설은 대부분 20대, 30대 독자층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고 소비되고 있는데 읽고 나니 노인 추천 도서로도 손색이 없겠구나 싶었다. 이제는 끝내고자 싶었던 알란 할배의 삶은 생일날 창문 넘는 도발부터 또 다른 세기를 연다. 이 할배? 딱 100세 나이에 걸맞은 체력과 건강 상태로 이 모든 모험을 해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 몇이나 알란 할배보다 나이가 많을까? 할배 기준에선 죄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기들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 절대 따라하면 안 되는 삶이지만, 알란 할배의 답 없는 저돌 정신은 꽤 배울만한 구석이 있다. 으라차차 내 100년, 둥근 지구는 거들 뿐이다. 뛰어보자 팔짝, 앞으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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