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없는 환상곡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손가락 없는 환상곡] 슈만에 휘감긴 청춘과 광기 
 

"슈만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를 전편에 배치하여 교묘하게 엮어낸 이 작품은 그에 대한 오마주이자 불완전한 청춘군상에 대한 보고이며, 음악으로 상징되는 ‘완벽’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갈망을 다룬 수작이다."             - 출판사 서평 中 
 
 
  
  

'나'는 음대 피아노과를 중퇴하고 의대에 입학해 지금은 의사로 일하고 있다. '나'는 의대 재학 시절엔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편지로, 의대졸업 후엔 음대 동기에게 구두로 어떤 소식을 전해 듣는다. 고등학교 동창인 나가미네 마사토가 피아니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나가미네는 고등학교 시절 사고로 손가락이 잘려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한 것은 이 소식을 전한 친구들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과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나'는 이 미스터리에 대해 30년이 다 되어가도록 침묵했고 애써 부정하였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는 나가미네 미사토를 잊을 수 없었고, 수기를 쓰며 지난 날을 회고하기 시작한다.
 


'나'가 그렇게 나가미네 미사토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그가 '나'의 청춘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나'가 슈만에 빠지고, 어쭙잖은 음악평론을 쓰고, 뒤늦게 입시를 준비해 재수까지 하며 음대에 진학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나가미네와 함께 했던 자신의 청춘시절을 어제일처럼 또렷히 기억하며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잔인하고 불완전하지만 아름답다는 것을 반증하듯, 시간 앞에 육체는 쇠락하지만 청춘의 감정과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음을 반증하듯 중년인 '나'의 수기는 생생하고 풋풋하다. 

<손가락 없는 환상곡(원제: 슈만의 손가락)>은 2010년 슈만의 탄생 200주년과 일본 최대 출판사인 고단샤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책이다. 제목처럼 이 책은 이슈만의 생애와 음악에서 소설 설정의 모티브를 얻거나 적극적인 인용을 하면서 전개된다. 실제로도 고등학교 때 이후로 50대인 지금까지 음악을 하고 있는 작가는 피아니스트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소설을 완성했는데, 그래서 이 책은 작가가 슈만에게 헌정하는 오마주의 결정체인 동시에 어느 정도 자전성이 가미된 청춘 독백이기도 하다. 원제가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슈만의 존재를 강조했다면 번역 제목은 손가락과 환상곡의 주체인 작중 인물에 주목한 느낌인데 어떤 관점에서 감상해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손가락 없는 환상곡> 속 슈만의 음악들

아래 언급된 작품들은 작중 연주되는 곡들만 추린 것으로 실제론 더 많은 슈만과 타 음악가의 음악을 만날 수 있다. 

p.019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op.54
p.035 다비드 동맹 무곡집 op.6
p.124 피아노 소나타 제2번 사단조
p.141 환상곡 다장조
p.150 리더크라이스
p.202 피아노 소나타 제3번 바단조 '관현악 없는 협주곡' op.14
p.267 천사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유작)



* 책의 뒷표지에 있는 QR코드를 찍으면 시공사 장르문학 블로그의 '슈만의 곡으로 읽는 <손가락 없는 환상곡>' 포스트와 연결되니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도 감상을 배가시키는 한 방법일 것이다. http://m.site.naver.com/00WX0 

   

오쿠이즈미 히카루는 경력이나 작품 수에 비해(1986년 등단) 국내에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1994년 작 <돌의 내력>만 몇 년 전 번역되었기에 국내 독자에겐 낯선 작가이다. 가장 최근작인 <손가락 없는 환상곡>은 작년 일본의 각종 도서차트에 오르고 관련 음반이 나오며 폭발적인 반응이었는데 국내 반응은 어떨지 궁금하다. 이 책의 장르를 음악소설, 청춘소설, 미스터리소설 정도로 논할 수 있는데, 놀라운 것은 이 소설이 장르문학이 아닌 순수문학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미스터리·스릴러적 요소를 가미하고, 몽환적이고 탐미적인 문체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서 장르문학보다 장르성이 강한 독특한 순수문학 작품이다. 


음악, 청춘, 미스터리를 종횡무진 오가고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이 소설의 다채로움은, 매력인 동시에 보는 관점에 따라 약점이 되기도 한다. 작품의 얼굴이 많아 다양한 측면에서 소설을 해석하고 즐기기 좋은 작품이지만 그래서 어느 쪽으로도 강하게 집중하질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 소설을 전적으로 장르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아쉬움이 더 클 수 있다. 하지만 순수문학으로 보면 특이하고 실험성 강한 의미 있는 작품이고, 즐길 거리가 다양한 것은 분명 미덕이다. 한편 옮긴이의 말과 참고문헌은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며 이번 번역판엔 한국 독자를 위해 작가가 따로 서문을 써 인상 깊다.

 

서술의 격정이 절정에 치달을 때 '나'의 수기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 불완전한 틈 사이로 자잘한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들의 판단을 흐리면, 그 모든 것을 뒤집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슈만을 걷는 이 청춘과 광기의 환상곡은 오쿠이즈미의 히카루의 유미적 문장에 날개를 단다. 슈만의 광적 추종자로 행보조차 슈만을 닮았던 나가미네와 그런 나가미네를 동경하며 그의 비밀을 알고 의문을 품는 '나', 30여년 만에 봉인을 풀고 좇는 환상곡의 손가락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 음악을 소재로 청춘의 불안과 완벽에의 집착을 어우른 소설 <손가락 없는 환상곡>, 여러모로 묘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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