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김보경 옮김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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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나를 깨운 그의 편지들

   



언제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는지 모르겠다. 한때는 우체국을 집앞 구멍가게 들르듯 다니고 편지지값 지출이 상당했다. 그 땐 무슨 할말이 그렇게 많았고, 무슨 글을 그렇게 써주고 싶었을까. 편지 쓰는 걸 너무 좋아해서 내 편지를 쓰다못해 남의 편지도 참 많이 대신 써주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편지를 자주 쓰지 않게 된 이유는 이메일이나 휴대폰 문자 탓이라기 보다는 남에겐 차마 나눌 수 없는 절망이 많아지면서였다. 가장 먼저 부모님께 쓰는 편지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상황은 이전보다 안 좋아졌습니다 따위의 문장을 쓰는 것에 신물이 났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치미는 미안함에 괴로웠다. 내 가족에게도 터놓지 못하는 것들을 하물며 다른 이들에겐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 그렇게 내 삶에서 점점 편지가 멀어져 갔다. 


누군가가 인생의 책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책이 내게도 두세 권 있다. 그 중 한권이 중학생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너무나 인상 깊게 봐서 꽤 오랫동안 그 책의 세세한 문장이나 그림을 외웠다. 그러나 그의 열렬한 팬이라기엔 나는 비겁했다. 항상 이런 감성과 사유를 가지고 이처럼 맑은 글을 쓸 수 있을까 부러워하면서, 그의 다른 작품과 삶에 대해선 많이 알고 있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겁이 났던 것 같다. 내게 <어린 왕자>의 의미는 잃고 싶지 않은 최후의 순수 내지 유년시절의 아련함이 담긴 인생의 동화였다. 그래서 <어린 왕자>의 강렬한 충격과 감동만이 이 작가에 대한 내 오롯한 환상의 완전체로 마음에 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텍쥐페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이하 생편지)>를 집어든 것은 작가 소개의 내용과 몇몇 비행사를 소재로 한(자신이 투영된) 소설들을 읽으며 짐작해볼 뿐이었던 불량 독자로서의 반성이자 뒤늦게나마 작가와 똑바로 마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독서에 앞서 생텍쥐페리의 인생(작품들의 창작배경과도 연결하여)에 대해 따로 찾아보았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치열하고 힘겹게 살았고 삶과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 가까스로 죽음에서 벗어난 치명적인 부상 전적은 왜 이리 많으며, 용감한 군인이자 하늘 바보였다. 그래서일까, <생편지>를 엮은 그의 어머니 마리가 서문에 인용한 ‘우리가 아는 생텍쥐페리는 평화라곤 알지 못했다’라는 문장이 더욱 절절하고 울컥하였다. 


<생편지>는 갈리마드 출판사에서 1955년과 1969년에 생텍쥐페리의 어머니 마리 드 생텍쥐페리가 출판한 서간문 모음집을 몇 편의 편지를 추가하는 등 보완하여 새로이 발간한 책이다. 생텍쥐페리가 10살이었던 1910년부터 죽기 직전의 1944년 7월까지(마지막 편지는 그래서 유고편지이다) 어머니께 쓴 100여 통의 편지와 가족들에게 쓴 몇 통의 편지들을 담았다. 마리의 서문이 끝나면 몇십 쪽에 할애해 생텍쥐페리의 대략적인 삶을 편지 인용과 함께 빠르게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350여 쪽에 달하는 편지의 원문들을 시간 순서대로 보여준다. 단, 사적인 부분으로 삭제해도 괜찮은 부분들은 비공개하였다. <생편지>엔 생택쥐베리의 사적이고 진솔한 모습들로 가득하다. 철자가 엉망이던 꼬마시절을 지나 기숙사 학교에서 한창 대입 준비 중인 수험생에서 전쟁이 끝나길 바라며 가족을 걱정하는 조종사, 그렇게 작가이기 이전에 한 남자이자 누군가의 아들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성장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마망(maman;프랑스어로 엄마라는 뜻)하고 늘 어머니를 그리고 필담을 늘어놓는 생텍쥐페리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처음엔 생텍쥐페리의 얼굴을 떠올리면 사랑하는 엄마, 사랑스러운 엄마, 효성스러운 아들, 마음으로 키스와 포옹을 담는다는 말 같은 표현을 서슴지 않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고 조금은 낯간지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계속 읽고 있으니 종이 밖을 뚫고 나오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로맨틱한 프랑스인이고 편지가 주요 통신수단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보다 생텍쥐페리가 편지에 매달렸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았고 결혼생활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 더 컸던 것 같다. 


<생편지>는 메모노트와 수첩을 제외하고 그의 저서 중 유일하게 국역되지 않았던 책이다. 이번에 드디어 갈리마드 출판사와 생텍쥐페리 재단과 모든 절차를 완료한 끝에 나온 이 책은 시공사와 번역자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원서는 기본적으로 생텍쥐페리 편지의 실물이나 그림들을 일부 싣고 주석을 달았다. 이번에 출판된 시공사 번역본은 원주 뿐 아니라 추가적인 주석을 더 달았으며, 편지에 나오는 장소들을 번역자가 직접 찾으며 찍은 사진들이 여러 장 실었다. 다만 편지에 대한 주석을 한 편지가 끝날 때마다 미주로 정리해서 달아 놓아서 일일이 책장을 넘기며 확인해서 읽어야 되는 것은 조금 번거로웠지만 작가에 대한 애정이 높아서일까 평소와 달리 덜 툴툴댔고 더 꼼꼼히 보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생텍쥐페리의 지극히 사적이고 인간적인 면면이 궁금해 <생편지>를 읽기 시작했지만 이 책이 내게 끼친 가장 큰 영향은 가족의 소중함과 그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자존심 사수와 내식대로의 배려라는 이유로 나와 관련된 부정적인 이야기나 남이 잘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누구에게도 거의 터놓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생텍쥐페리는 전혀 개의치 않고 별별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받은 자극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부모님과의 통화해서 짧고 기계적으로 안녕하다 말하곤 부모님의 얘기만 듣는다. 변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다시 예전처럼 헤헤 편지 쓰고 싶어졌다. 

 

 원문 http://der_insel.blog.me/12013285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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