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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좋은 시간이야, 페르귄트
김영래 지음 / 생각의나무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떠나기 좋은 시간이야 페르귄트]
잠시 새의 입장이 되어 책과 함께 날았다
새들의 세계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저는 국경 없는 새들의 나라의 '명예 시민'이 되고 싶은 소망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한 마리의 까치를 통해 풀어 보았습니다. (중략) 이 작품은 까치를 주인공으로 한 '새의 오디세이'입니다. 거대 도시 서울의 변두리에서 '아작'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한 마리의 까치가, 몽골과 시베리아를 거쳐 남태평양에 이르는 장대한 여행을 통해 '페르귄트'라는 이름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 작가의 말 中
입센의 극시 페르귄트는 전형적인 탕아의 이야기이다. 심각한 몽상가이자 사고뭉치였던 젊은 페르귄트는 돈과 권력을 찾아 세계를 떠돌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산전수전 다 겪고 나이 들어 무일푼으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입센은 페르귄트를 통해 부와 권력 추구가 가져오는 정신의 황폐, 야망의 덧없음 등을 그렸다. 태평양을 떠돌다 한 배 위에서 쉬어가려던 페르귄트를 발견한 선원(새와 소통할 수 있는)은 그의 사연을 대충 듣고나선 이 노르웨이의 이야기를 말하며 꼭 페르귄트 같은 새라고 이야기를 한다(글쎄 별로 비슷한 점은 없는데 정처없는 방랑 때문일까). 그리고 그 때부터 이 까치는 페르귄트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다시 태어난다.
<떠나기 좋은 시간이야 페르귄트>는 첫 장편소설 <숲의 왕>으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았던 시인 겸 소설가 김영래 작가의 2010년작이다. 참고로 작가는 작년 상반기에는 이 책은 하반기에는 또다른 새에 대한 소설을 출간하였다. 책 속의 작가의 말이나 소설 내용, 작가 소개를 읽으며 뭔가 감지되는 남다름이 있어 찾아보니 생태소설가로(한국문학에선 거의 장르 개척자나 다름 없는) 불리우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작가의 작품들은 생태학적 사유를 강조하고 자연친화적이다(그리고 한국적이다). 우리의 나무, 동물 등을 소재로 인간사회에 경종을 울리기도 하고 훈훈한 자연의 이야기를 통해 마음의 정화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떠나기 좋은 시간이야 페르귄트>는 한국의 평범한 소년까치 아작이 성장하면서 여행을 꿈꾸고 긴긴 여정을 하며 경험하고 깨닫는 이야기이다. 망우리에서 태어난 아작의 소년 시절을 보여주며 소설은 시작한다. 인간에 비해 현저히 빠른 새의 시간을 살아가는 아작은 순식간에 어른 까치가 된다. 아작은 다른 친구들처럼 한국의 서울에 예쁜 암컷 새를 만나 둥지를 틀고, 즐겨 찾아가는 고마리 분교에서 놀며 평범하게 살지 않고 결심을 한다, 한국을 떠나겠다고. 그 결심의 이유도 없고, 그래서 언제 끝날지 어디로 갈지 등의 여정의 목적도 없다. 몽골, 시베리아, 태평양, 일본 등을 돌며 그곳의 까치나 다른 종의 새들을 만나기도 하고, 고난과 맞닥드리기도 한다.
이러한 아작의 서울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자연스럽게 까치에 대해 알 수 있다. 까치는 단순히 우리나라의 대표적 텃새를 넘어 우리나라에서 기원해 전세계로 퍼진 새이다. 아작의 서울 이야기를 통해선 까치의 습성 같은 것을, 여행 이야기를 통해선 까치가 퍼진 곳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소설이 문장면에서 수려하거나 내용면에서도 별로 인상적이지 않아 문학성은 좀 떨어진다는 것이다. 굉장히 수수하고 투박한데, 그럼에도 <떠나기 좋은 시간이야 페르귄트>가 좋았던 것은 읽으면서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있으면 작가가 참 맑은 사람이구나, 그래서 이런 맑은 글을 쓸수 있구나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점이 있다. 읽는 동안 잠시 새의 입장이 되어 페르귄트의 여행에 나를 잠시 실어봤던 책, 그 점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