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평론입니다. 출처는 맨 아래에 있습니다.
영화 <헤더스>를 오해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흔한 방법은 헤더스 그룹의 소녀들을 미국 십대영화에서 단골로 나오는 '머리 빈 치어리더' 스테레오 타입에 집어넣어 버리는 것이다.
오, 그러면 이 영화는 얼마나 흔해빠진 클리셰로 가득 찬 영화가 되어버리는가?
그러나 이 영화가 캐릭터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좀더 섬세하다.
<헤더스>는 인기 있는 금발소녀들을 풍자하는 듯 하면서도, 무시되기 쉬운 그녀들의 내면을 슬쩍 살려낸다.
학교의 최상층 계급인 헤더스의 소녀들은 개별적인 이름이 없다.
그들은 모두 헤더이다. 그들은 금발미인 헤더를 보는 시선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켜 놓았고, 또 유폐되어 있다.
그녀가 그 시선에서 나와 자신을 내보이려 할 때 그녀는 이름을 대지 못하고 더듬거린다
"나는 헤더에요, 아니 나는 헤더가 아니에요, 나는 마돈나에요. 제길, 이것도 아니에요"
1980년대의 텅 빈 풍요 속의 그녀들은 모두 공허하다.
베로니카(위노나 라이더 분)는 말한다
'난 내 머리를 립글로스를 고르거나 통금 전에 파티 세 개를 뛰는 데나 쓰고 있어. 우리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그리고 죽을 뿐이지."
고등학교에서 바랄 수 있는 것은 졸업무도회, 거기서 조금 더 나아봤자 아이비리그 진학뿐인 듯하다.
부모가 딸의 학교생활에 대해 묻는 것도 졸업무도회에 함께 갈 파트너 정도다.
이들은 자기 앞에 막막히 펼쳐져 있는 (개별적인 이름조차 사라지는, 게임쇼 호스트 같은 행복만이 존재하는) 진부한 인생, 진부한 미래를 본다.
이 지점에서 십오 년 전의 암울한 코미디는 최근작 <고스트월드>의 블랙코미디와도 만난다.
차이점은 1990년대 후반의 아이들은 고스트월드 밖을 떠돌며 일상적인 무표정을 들이밀지만, 1980년대의 아이들은 광기 어린 표정으로 고스트월드를 폭파시킬 계획을, 그래서 모두 죽여버리고 함께 죽는 꿈을 꾼다는 것이다.
"이것이 80년대의 우드스탁이야!"
자, 여기서 헤더스를 오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학교의 모두를 죽이려 하는 JD(크리스찬 슬레이터 분)의 캐릭터를, 사랑하는 소녀를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비극적인 열정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JD를 오해하고 영화를 상투적인 청춘 영화로 평면화시키기란 무척 쉽다.
이 영화의 자막은 놀라울 정도로 엉망인데, 중요한 대사는 모두 전.혀. 다르게 써놓았다.
식당에서 총격사건을 일으킨 후
“Yeah well, the extreme always seems to make an impression(극단적인 건 항상 나에게 감흥을 주지).”
라고 말하는 JD를 “한 번 본때를 보여야 귀찮게 안 하는 법이야”라고 하는 평범한 마초 남자애로 바꿔놓는 자막을 보면서 어떻게 JD에 대해 오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JD의 성격을 드러내는 대사들은 서글플 정도로 왜곡되었는데,
편의점을 찬양하면서
“(편의점이) keeps me sane(그나마 나를 정상으로 만들지)”
이라 하는 대사는
“말 그대로 편리하니까”
가 되고, 아들이 죽은 후 장례식에서
“난 게이인 내 아들을 사랑한다”
고 외치는 아저씨에 대해
“How do you think he'd react to a son that had a limp wrist with a pulse?
(그 애의 맥박이 뛰고 있어도 저렇게 얘기했을까?)”
라고 꼬집는 대사는,
“이제 아무도 그 애들이 게이인 걸 의심하지 않겠네”
라고 생각 없이 비웃는 대사로 변했다.
번역자의 가장 치명적인 모독은 JD의 마지막 대사에 가해진다.
학교를 폭파시키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후 JD는 비틀대며 건물 밖으로 나온다.
그의 몸은 폭탄으로 감싸여 있다.
자막은 JD가 베로니카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사를 이렇게 써놓았다.
“학교는 폭파시키지 못했으니 나라도 폭파시켜야지. 담배 있어? 마지막으로 불을 붙여주고 싶어.”
이 지독히 비장미 넘치고 낭만적인 대사는 꽤 많은 여성 팬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실제의 대사는
“Pretend I did blow up the school. All the schools. Now that you're dead, what are you gonna do with your life?
(세상의 모든 학교가 모두 폭파됐다고 생각해봐. 이제 네가 죽는다고 하면 마지막으로 뭐 할 거니?)”다.
그 대답으로 베로니카는 담배를 꺼낸다.
이 왜곡이 주는 효과는 상당하다.
자막의 대사는 마치 홍콩 느와르 영화 속 남성연인-반영웅이 할 법한 말이 되어 베로니카와 JD를 별개의 자아를 가진 이성간의 연인 관계로 묶어둔다.
그러나 실제의 대사는 JD가 베로니카의 또 다른 자아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 영화는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중얼거리는 소녀의 짧고 강렬한 꿈으로도 읽힌다. 세상과도 친구와도 자기 자신과도 소통하지 못한 채 일기장 위에만 말을 토해내는 길 막힌 소녀는 자신이 만든 악몽 속에서 성장한다.
그녀가 ‘죽이고 싶어…’라고 일기에 글을 쓰는 밤, 그날 처음 만난 소년 JD가 그녀의 방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살인이 시작된다.
그녀가 의도하지 않은 살인, 그러나 그녀가 원했던 살인들.
베로니카는 JD를 사랑한다.
JD는 베로니카를 사랑한다.
그 사랑-위장된 나르시시즘은 잔혹하다.
베로니카와 자신 밖에 없는 JD에게 그 둘을 건조하게 말려버리는 세계는 없어져 마땅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베로니카-JD가 공허한 세계, 고스트월드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다같이 자살하는 것.
“우리의 불타는 몸은 세계에 대한 저항이다”,
“사람들은 불타버린 학교의 재를 보면서 말하겠지- 여긴 스스로를 파괴시킨 학교의 자리야. 그건 사회가 학교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학교가 바로 사회이기 때문이지.”
십대들에게 학교는 사회이고 학교건물은 불타버려 마땅한 건물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결말은 JD의 생각과는 다르게 간다.
그것은 <헤더스>가 시스템은 증오하지만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미미하나마 애정을 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의 결말은 베로니카가 자신의 반영을 넘어 타인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학교 계단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보기보다 자신의 일기를 쓰기 바쁘던 베로니카는 살인행각 속에서 타인들의 유서를 쓰며 타인의 내면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 말미에서 그녀는 자신의 일기와 이별을 고한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며 일기의 첫머리를 쓰고 자신의 목을 매단 척 위장한다. 그리고 그 자살 퍼포먼스는 JD의 폭발/사라짐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자신을 반영하던 내면의 상을 죽이면서, 거울을 깨뜨리면서, 베로니카는 타인과 소통을 하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베로니카는 자신과의 전쟁을 헤치고 죽음의 세계에서 돌아온다.
처음 영화에 나올 때처럼 유행하는 옷을 입고 곱게 화장을 한 소녀가 아니라 지저분하고 편안한 옷에 재투성이 얼굴, 흐트러진 머리로 담배를 피우며 학교 복도를 걷는다.
자신 밖에 볼 수 없고 타인과 소통할 수 없었던 영화 초반의 베로니카는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며 유행코드로 차려 입었고, 잘 나가는 친구들과 만나면서 그 외피로 비어있는 자신을 채우려 했다.
그러나 베로니카의 옷차림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편안해진다.
마지막 화염을 지나 복도를 걷는 베로니카의 눈은 단단한 광기로 차있다.
그녀는 시스템에 먹히거나 동화되지 않으면서 자신 내면의 낡은 틀을 부숴버렸다.
죽음을 거치고 돌아온 베로니카는 마사에게 말을 건다.
“졸업무도회의 데이트는 조각나 버렸어. 그날 별 일 없으면 나와 같이 비디오나 보지 않을래?”
마사는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고 웃으며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인다. 둘이 복도 끝 창가로 걸어가 이야기를 나눌 때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언급되는 졸업무도회는 영화 속 소녀들이 학교에서 기대할 만한, 거의 유일한 미래였다.
고스트월드는 폭파되지 않았다.
진부한 세상에 불타는 시신들이 던져지지도 않았으며 여전히 JD의 말처럼 ‘일곱 개 주의 일곱 학교를 돌아다녀도 다른 것은 사물함 자물쇠 번호 뿐’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저항의 여지가 있다.
거울을 깨고 돌아온 베로니카는 고스트월드의 가짜 꽃, 졸업무도회를 거부하고 마사에게 함께 보내는 시간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 작품명: 헤더스 (Heathers)
▶ 제작년도 : 1989년 (코미디)
▶ 감독 : 마이클 레만
▶ 제작국가 : 미국
▶ 출연 : 위노나 라이더, 크리스찬 슬레이터, 셰넌 도허티, 리잔느 폴크
▶ 상영시간 : 1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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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홍문보미 기자
정말 한정판 틴케이스 dvd 사고 싶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