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문장자체는 앞뒤가 맞지만 반대되는 뜻을 내포한 표현을 반어라고 합니다.
이처럼 문장자체는 앞뒤가 안맞지만 진리를 내포한 표현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배리() ·역리() 또는 이율배반()이라고도 한다. 명확한 역설은 분명한 진리인 배중률()에 모순되는 형태로 인도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부터 알려진 역설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거짓말쟁이의 역설로는 신약성서 가운데 《디도에게 보낸 편지》(1:12)에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라는 말이 있다. 선지자 자신이 그레데인이므로 이 경우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간에 모순을 낳는 것이므로 역설이다.

이 역설은 옛날부터 많이 논해 왔지만, 전칭명제()의 부정은 특칭명제()가 되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I.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이율배반도 역설의 형태를 취하여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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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꼬는 말 또는 반어(反語).

낱말이 문장에서 표면의 뜻과 반대로 표현되는 용법이다. 어원은 그리스어의 에이로네이아(eironeia:위장)이다.

소크라테스가 무지()를 가장하고 논적()에 접근, 지자()로 자부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상대방 입장의 내적 모순을 폭로하고, 그 무지를 자각하게 하는 문답법으로 사용한 일이 알려져 있는데 이것을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진의()와 반대되는 표현을 말하는데, 표면으로 칭찬과 동의를 가장하면서 오히려 비난이나 부정의 뜻을 신랄하게 나타내려고 하는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그것은 지적인 날카로움을 갖는 점에서 기지()에 통하고, 간접적인 비난의 뜻을 암시하는 점에서는 풍자와 통하며, 표리()의 차질에서 생기는 유머를 포함한다.

19세기 독일낭만파에서는 예술창작상의 지속적인 정신태도의 뜻으로 쓰여 ‘모든 것 위에 떠들면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정신적 자유를 뜻하였으며, 키르케고르는 미적() 존재에서 윤리적 실존으로의 이행()을 부정적으로 매개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들으면 뜻하지 않은 의미를 포함할 경우, 이것을 ‘비극적 아이러니’ 또는 ‘소포클레스적 아이러니’라고 하여 비극적 인물의 대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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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1월
구판절판


침묵은 나를 비누처럼 미끈거리게 만들어 붙잡기 힘들게 해주었다. -163쪽

책읽기를 도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책읽기란 가장 정신이 집중 된 상태에서 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그것이 언제나 흐리멍텅한 상태로 현실에 뒤섞여 있는 것보다 덜 두렵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즈음 나는 베르나노스를 읽기 시작했는데,정말이지 내게 꼭 필요한 작가였다. 『위선』이라는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범인(凡人)은 선에도 악에도 무심하다." 순간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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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 이블 블랙 캣(Black Cat) 5
미네트 월터스 지음, 권성환 옮김 / 영림카디널 / 2004년 9월
절판


울피의 어머니는 눈가에 웃음주름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믿지 말라고 했다.
- 그건 웃을 줄 모른다는 뜻이야.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영혼이 없어.
영혼이 뭐예요?
- 자기가 지금까지 한 좋은 행동을 모두 합한 거란다. 웃으면 그게 얼굴에 나타나게 돼. 웃음은 영혼의 음악이거든. 영혼은 이 음악을 듣지 못하면 죽는대. 그러니까 나쁜 사람들은 눈가에 웃음주름이 없는거야.-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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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4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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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미스 프랭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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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다.
 "선하신 스승님, 영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왜 날 선하다고 하느냐? 오로지 하느님만이 선하시니라."
                                      (루가복음 18장 18절~19절)



                                                                
   
 
코엘료의 소설 중에서 가장 쉬이 읽혀지지 않고, 읽으면 읽을수록 '선과 악의 문제? 그보다 더 자명한 것이 있을까'라는 오만을 부끄럽게 만드는 문제적 소설이다.
그래서 결국 복잡한 고민 끝에 내놓은 시덥잖은 결론이란 것이, 선과 악의 문제는 이렇게 편리한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없는 보다 복잡한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삶의 매 찰나마다 겪는 선과 악은 교리문답 시간에 배우는 이론적 차원을 넘어서, 판단이 명확치 않은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걸쳐 있고, 혹은 상황에 따라 상대적 가치를 지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코엘료는 절대적 가치로써의 '선'을 논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느님 뿐이라는 제사(題詞)로 이 책을 시작하고 있다.
인간의 악함에는 완성이 있을지 몰라도, 그 선함에는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완전한 선이신 하느님을 닮으려고 그저 '노력하는' 방법 밖엔 없다.
그러나 그 노력의 길엔 수많은 모호함이 존재한다. 나에게 선이 되는 것이 남에게 악이 되고, 또 그 반대의 경우를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수없이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 악이 되지만 남에게 선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행위를 우리는 '배려, 혹은 희생'이라는 말로 미화하고 있지만, 한 인간에게서 그러한 행위가 너무 자주 반복되면 그도 언젠가는 인내심을 잃게될 것이다. 
 
이 소설은 조금 다르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의 선과 악의 문제라기 보다는,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선과 악의 싸움에 집중한다. 그것을 보여주려는 싸움터의 주인은 바로 우리의 미스 프랭이다. 한편 베스코스 마을 주민들의 행동은 르네 지라르가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이론화시킨 사탄의 작용을 그대로 보여준다. 2천년 전 가야파가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하여 죽는 편이 더 낫다"(요한 18:14)고 유다인들을 선동했던 것처럼, 이방인은 금괴로 주민들을 유혹하여 기어코 '무고한' 희생양을 지목하게 한다. 사탄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분열을 조장하고, 그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생뚱맞은 사람 하나를 죽이면, 그 공개처형 과정에서 사람들이 겪는 감정변화를 통해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문제의 핵심을 비껴간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라는 것을. 유다의 군중들처럼 흥분과 광기는 없었지만, 베르타의 처형 과정은 예수의 처형 과정과 닮아있다. 또다른 부활신화(?)는 소설 속에서조차 재현되선 안되겠기에 마을 사람들이 베르타를 쏘기 직전 우리의 미스 프랭이 한 몫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의도가 약간 의심스럽다. 아니, 아주 많이 의심스럽다.
 
 
미스 프랭은 선한가 악한가
 
미스 프랭의 의도야 어쨌건 일단 그녀는 '반대합니다!'라고 외침으로써 베스코스에 난입한 폭력의 싸이클을 종식시키고 베르타의 목숨을 구했으며, 무엇보다도 이방인의 내면에서 선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미스 프랭이 '반대합니다'라고 외치기까지 그녀의 내면에서는 선과 악이 여러번 대면하였고 어떤 때는 선이, 어떤 때는 악이 우세한 듯 보였다. 그러나 선이 우세할 때도 금괴는 항상 그녀의 마음에 있었다. 그녀는 이방인에게 이제 아주 노골적으로 '내 금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요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손닿는 곳에 떨어진 횡재를 거머쥘 자격이 없는 사람들"(p.139)이라고 비웃는다. 게다가 그녀가 마을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방법은 그들의 도덕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금괴의 무용성을 들먹이며 사람들을 구슬리고 있는 셈이다. 이쯤되면 결과는 좋아도 과정이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결국 미스 프랭은 악마의 금괴를 돈으로 바꾸어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떠난다.
이 보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천사는 왜 그녀의 꿈에 나타나 "금괴 열한덩이를 맡기며 잘 보관하고 있으라고 부탁"(p.215)했을까.

"난 내 몫의 금을 챙기는게 정당하다고 생각해요."(p.150)
"난 내 몫을 다했어요. 보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구요."(p.164)
 
금괴가 악마에 사로잡혔던 이방인의 소유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녀는 이방인이 부탁한 일을 모두 실행했다. 사람들에게 이방인의 말을 전하고, 거기에다 삶에 있어서 선과 악은 "모든 것이 통제의 문제, 그리고 선택의 문제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니었다"(p.245)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으니 마을 사람의 몫이라고 했던 금괴까지 그녀의 소유라고 주장했던 것은 이제 좀 납득이 간다.
그렇다면 천사의 메세지는 무엇일까? 천사의 메세지는 하느님 역시 보상해 주신 것이라고 해석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샹탈의 선의에 대한 보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마음 속에 이기심이 공존하고 있지만, 행동하고 책임을 받아들인데 대한 보상일 것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금전적인 보상일 뿐인 것이다.
 
 
우리 자신인 미스 프랭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아


어쩌면 이 모든 판단이 부질없는 것일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샹탈의 천사가 그녀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영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인간 존재들이 매일 짊어지고 싶어하는 두려움과 가책의 짐을 그만 내려놓고 눈을 좀 붙이는 것"(p.168)일 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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