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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뽀 상자
파울로 코엘료 외 지음, 임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은 어른이 되는 과정의 일부이면서, 신기하게도 그 자체로 완전한 세계를 이루는 독립적 시공간이다. 과거를 떠올릴 때 분명 기억의 저 먼 끝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서도 현재의 나와 어린시절의 나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은, 그것이 단순히 시간적으로 가장 먼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곳에는 지금의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한때 우리 안에서 찬란히 빛을 발하던 보석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 책의 열 일곱가지 이야기는 바로 어린 시절의 그 보석들이 어떻게 아름답게 보존되거나 볼품없이 훼손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은 프랑스의 에이즈 아동 보호 연대(Sol en Si)가 에이즈에 걸린 어린이와 그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쓰였다.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 넓게는 부모의 부주의나 유전적 요인에 의해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은 어쩌면 그 태생부터 어른들에 의해 망가진 보석을 갖고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름답게 가꿔줄 수 있는 것 역시 어른들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이 책은 다양한 어린시절의 경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무심한 아빠의 사랑과 진심을 담은 뽀뽀가 결국은 아이에게 충만한 생명력을 불어넣고('뽀뽀상자'), 아이의 소중한 꿈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어른들의 배려는 죽어가는 아이를 살려낼 수도 있으며('기차를 기다리는 아이'), 어린시절에 대한 작은 이해는 아이의 삶의 색채를 결정할 수도 있다('선생님은 여자').
반면 지나친 관심과 개입, 인내심과 믿음의 부족은 자칫하면 아이의 순수한 작은 낙원을 짓밟을 수도 있다('작은 낙원')고 경고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아이들에게 사랑만큼 중요한 것은 없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위나 앞에서가 아니라 옆에서 그들의 걸음걸이를 방해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걸어야함을 일깨워준다.
아이들을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겠지만, 자유와 방치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를 찾는 것은 역시 참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린시절에 대한 부분기억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은 아닐까. 누구나 갖고 있었지만 이내 그때의 꿈과 빛나던 보석을 묻어놓은 채 견고한 안개의 성채를 쌓아올려, 애쓰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그런 곳에 우리의 어린시절이 유폐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 안개를 걷고 어린시절의 성채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와 방치 사이에서 가장 알맞은 위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라는 말이 있다. 에이즈에 걸려 언제 우리 곁을 떠날지 모르는 아이에게 조기 영어교육을 강요하고 수많은 학원에 보내려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어린시절은 짧고 그래서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모자르다. 아이들의 꿈이 다치지 않도록 애틋한 마음으로 호밀밭의 끝에 서 있는 파수꾼이 된다면, 우리 역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어린시절의 보석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