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뽀상자 (Histoires d'Enfance by Sol en Si [Solidarité Enfants Sida], 1998, 프랑스)
파울로 코엘료 외/임미경 옮김
문학동네

에이즈 아동 보호 연대가 프랑스,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의 작가들과 함께 만든 책이다. 원제는 '어린시절 이야기'이고, 제목 그대로 작가들의 경험과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어린이, 어린시절, 어린이의 마음을 그린 단편들을 모았다.
1. 뽀뽀상자La boîte à bisous/파스칼 브뤼크네르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의해 <비터문>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원한의 달』(1981)의 작가이다.
- 줄리엣은 옹알거렸다. "말을 할 수만 있다면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할 텐데. '아빠, 나를 좀 봐줘요. 나를 쳐다보는 시늉만 했지, 눈길은 그냥 스쳐가고 말잖아요.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놀아요."(13쪽)
줄리엣은 필립과 안에게서 갓태어난 딸이다. 필립은 그 핏덩이가 자신의 삶에 과연 의미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의심스러워한다. 필립에게 있어 줄리엣의 탄생은 '경이'라기 보다는 아직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없는 무의미한 몸짓일 뿐이다. 유년기의 언어를 잃어버린 어른들은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신호로 의미를 전달하려 하지만 그것을 '칭얼거리는 소리'로만 인식한다. 필립의 무관심은 이 책에 실린 낸시 휴스턴의 작품 <작은 낙원>에서 탁터 바우만이 루시에게 건네는 다음의 말과 공명한다.
- 삶을 아무 관심 없이 대하는 것이 모든 죄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죄악인 것 같아. 각각의 존재는, 삶의 매순간은, 그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그리고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라.(68쪽)
그렇지만 필립의 경우는 무관심이라기보다는 그 존재의 의미를 아직 인식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줄리엣과 소통하는 방법에 서투를 뿐이다. 줄리엣은 아픔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호소하고, 이를 통해 필립은 그것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것이 단지 '진심 어린 뽀뽀'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필립은 이제 그 자신이 줄리엣의 '뽀뽀상자'가 되어 명멸해가는 줄리엣의 존재 의미를 되살린다.
2. 선생님은 여자 La maîtresse est une femme/알렉상드르 자르댕
환상이란 어쩌면 깨어짐을 전제로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깨어지느냐에 따라 그 파편들을 수습한 뒤 우리의 모습은 그 파편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선생님의 은밀한 비밀을 알게 된 아홉 살의 나는 비로소 선생님 역시 본능적 욕망을 지닌 인간, 그러니까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한때 우리 동네 살던 아주 우아한 한 아줌마가 나처럼 멸치볶음이나 김치찌개 같은 건 먹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TV 속 연예인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이와 비슷했다. 항상 예쁘고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는 그들이 어떻게 변소 같은 곳엘 갈까.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요즘 연예인들은 적나라하고 심지어는 궁색하기까지 한 솔직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일체의 환상 없는 인간적인 모습과 그러면서도 뭔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경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쨌든 내가 나이가 들기도 했고, 풍토가 바뀌기도 한 탓으로 이런 환상들은 이미 고백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유치한 것이 되어버렸다.
선생님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환상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자기 세계의 팽창을 경험한다. 자신이 '사랑을 할 수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이로운 발견은 이제 그것을 폭로하고픈 욕구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비밀의 교환은 당사자와 나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아홉 살짜리 어린 아이에게 자신의 욕망을 들킨 선생님은 어떻게 했을까?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재치있게 인정한다. 이 조숙한 경험은 선생님의 솔직한 미소가 없었더라면 일그러진 것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아이에게 있어 이 은밀하고도 발칙한 비밀은 여인들에 대한 거의 박애적이기까지 한 사랑을 예감하게 한다.
3. 작은 낙원 Le petit paradis / 낸시 휴스턴
아이들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