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템과 타부(Totem and Taboo)
프로이트 Sigmund Freud(1856-1939, 오스트리아 프라이베르크)
김종엽 역
문예마당
1995.11.15. 영풍문고
1. 근친상간에 대한 공포
토템이라는 이름은 영국인 J. Long이 1971년 북아메리카 홍인종들로부터 인용한 토탐Totam에서 기원한다. 토템은 통상 어떤 동물이며, 드물게는 씨족 전체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식물이나 자연현상일 수도 있다. 토테미즘은 족외혼 제도와 결부되어 있는데, '같은 토템에 속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성관계를 맺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혼인할 수 없다'. 이것은 근친상간적 성관계를 아주 엄격하고 세심하게 방지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법칙을 위반한 대가는 '죽음'이다. 그러나 이것이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일시적 사랑인 경우에도 같은 처벌을 받는다. 따라서 이는 종족의 열성인자를 배출(즉, 기형아의 출산과 같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따른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토템과 결부된 족외혼은 어머니와 누이들과의 근친상간을 방지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씨족에 속하는 모든 여성들과의 성적 결합을 금지한다. 우리는 정신분석을 통하여 사내아이가 최초로 택하는 성적 대상은 어머니나 누이로서 그 선택이 근친상간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매우 유아기적인 흔적이라 할 수 있다.
▶ 즉,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통해 남아에게는 근친상간적 성적 본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원시부족에 대한 관찰을 통해 근친상간의 본능을 억제하기 위한 기제로서 토템이라는 종교적 제도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규칙을 어겼을 때의 종교적 공포는 근친상간을 효과적으로 통제한다.
2. 타부와 양가 감정
타부는 폴리네시아 말로 한편으로 '신성한, 성별된' 무엇이고, 다른 한편으로 '무시무시한, 위험한, 금지된, 부정한' 것이다. 타부의 반대말은 폴리네시아어로 '노아noa'인데 그 의미는 '평범한, 늘 접근 가능한'이다. 이러한 개념은 '성스러운 두려움 holy dread'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타부에 의한 제약은 '자기 기준적'이며, 이를 위반한 자는 그 자체로 타부시된다. 동물과 관련된 금지는 주로 해당 동물을 죽이거나 먹는 것에 대한 금지로 토테미즘의 핵심을 이룬다. 타부는 신성한 것과 부정한 것 모두 공통적으로 '접촉하기를 꺼린다'는 특징이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적용되는 타부가 있는 반면, 개인의 경우 타부를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을 '강박증 환자'라고 부른다.
4. 토테미즘의 유아기로의 귀환
근친상간은 자연적 본능이다. 따라서 이를 억제하기 위해 금기가 생겨났고, 그 방편이 족외혼이다. 그런데 근친상간에 대한 공포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우생학적 위생학적 문제는 원시부족에게서 고려되기에는 너무도 고차원적인 문제이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원시인류는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형태였고, 이들 사이에서 남아가 태어나면 아버지가 여자들을 놓고 그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보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아들에게 어머니나 다른 여자들과 성교하지 말것, 즉 족내 성교를 금하는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러 명의 아들들은 이러한 명령을 어기고 부친살해에 이른다. 그러나 그 뒤에는 살해에 대한 죄책감이 따르고,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희생제를 치른다. 그것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토템을 죽임으로써 금기에 대한 억압을 해소하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표출한다. 이것은 한 대상에 대한, 앞에서 언급한 '양가감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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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고대 세계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는 미트라스 종교와 경쟁하게 되었다. 황소를 죽인 미트라스에 관한 묘사로부터 미트라스 혼자서 아버지를 제물로 삼아, 다른 형제들을 괴롭혔던 공동죄책을 면하게 해주는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 하나, 그리스도의 경우, 그는 자진해서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형제집단을 원죄로부터 구원하였다.
원죄 교리는 오르페우스에서 유래한다. 이 교리는 신비종교 안에 포함되어 있다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여러 학파로 침투되었다. 인간은 젊은 디오니소스-자그레스를 죽여 토막친 거인족의 후예로서, 이 범죄의 무거운 짐이 인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한 단편에는 세계의 통일이 어떻게 태고의 범죄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여기에서 나온 모든 것들은 그 벌을 나중에도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인족의 그러한 행위는 연합하여 죽이고 찢는 특징들을 보여준다. 오르페우스 자신의 죽음과 같은 고대의 많은 다른 신화들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여기에서 살해되는 쪽이 젊은 신이라는 점이 우리들을 곤란하게 한다.
기독교 신화에서 인간의 원죄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인간을 원죄의 압박으로부터 구원하였다면, 우리는 그가 대속한 죄가 살해행위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감정에 깊이 뿌리밖고 있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복수의 법칙에 따르면 살인은 다른 생명을 제물로 바침으로써만 속죄될 수 있다. 따라서 자기 희생제물은 살인의 죄를 암시한다.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삼아 하느님 아버지와의 화해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속죄되어야 할 죄는 아버지를 죽인 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pp. 220-221)
이러한 아버지와의 화해에는 이중성의 법칙이 존재한다. 아버지에 대해 최대의 속죄를 하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해 아들도 아버지에게 대항한다는 소망을 달성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나란히, 아니 실제로는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여 스스로 신이 된다. 아들의 종교가 아버지의 종교를 대치한다. 이 대치의 표시로서 고대의 토템 향연이 성찬식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형제 집단이 아버지 대신에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그것에 의해 신성해지며 아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기독교의 성찬식은 그 근본에 있어 아버지를 새롭게 제거하는 것이다. 즉, 속죄되어야 할 죄를 반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