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 : www.lacan.com

프랑스 정신병리학자. 파리 출생. 고등사범학교에서 처음에 철학, 후에 의학·정신병리학을 배웠다. 1932년 학위 취득 후, 생트안느 병원의 학부에서 임상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52년 국제정신분석학회로부터 제명되자, 이듬해 파리정신분석학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지도자가 되었는데, 죽음을 한 해 앞두고 이 학회를 스스로 해산하여 화제를 모았다. 66년 논문집 《에크리》의 간행으로 갑자기 유명해지고 구조주의자(構造主義者)의 한 사람이 되었다. 53년에 시작된 세미나는 64년부터 고등사범학교, 69년 벵센파리대학으로 옮겨 계속되었고 많은 청중을 모았다.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에 언어가 망각되었음을 지적하고 프로이트로 되돌아갈 것을 제창하였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상태>보다 <경상단계(鏡像段階)>가 앞선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또 환자의 언어에 밑바탕이 되는 무의식은 <언어와 똑같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이 말(파롤)이 소기(所記;시니피에)가 아니고, 능기(能記;시니피앙)의 연쇄를 나타내고 있는 데 착안하여, 연쇄방식으로 비유(比喩), 특히 은유(隱喩;메다포=抑壓)와 환유(換喩;메토니미=置換)의 구별을 중시하였다. 또 파롤을 이끄는 것은 요구가 아니고, <타자(他者)>의 욕망이라 하여 <파르스>가 그 대상이며 중심적 능기라고 하였다.

*출처 : 엥빠스 앙씨끌로뻬디


Psychanalyste français (Paris, 1901 — id., 1981).
La mère de Jacques Lacan appartenait à une famille de riches vinaigriers(식초제조인) d'Orléans et son père était le représentant de commerce de l'entreprise. Il fit ses études au collège Stanislas où il se distingua(두각을 나타내다) par sa précocité(조숙함). Son condisciple Louis Leprince-Ringuet a raconté ses dons d'alors pour les mathématiques. Il mena ses études de médecine de façon brillante, ce qui ne l'empêcha pas d'associer à celles-ci un goût prononcé(언급된, 표명된) pour les lettres et pour la philosophie (les présocratiques, Platon, Aristote, Descartes, Kant, Hegel, Marx) pour l'anthropologie (Mauss), l'histoire (Marc Bloch) la linguistique (Saussure), les sciences exactes. Alors qu'il effectuait ses études de psychiatrie, il se rapprocha des surréalistes. Il dira plus tard que l'apologie(옹호) de l'amour lui paraissait une impasse irréductible(환원되지 않는) du mouvement d'André Breton.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파리, 1901~1981)
자크 라캉의 어머니는 오를레앙의 부유한 식초제조인 가문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기업의 상무 이사였다. 스타니슬라스 중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거기서 그는 조숙함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동창생 루이 르프렝스-렝게는 그의 수학적 재능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수재로서 의학을 공부하였고, 이는 문학과 철학(전소크라테스학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마르크스), 인류학(마우스), 역사(마크 블로흐), 언어학(소쉬르), 정밀과학을 거론하기 위하여 표명된 취향과 연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접근한다. 후에 그는 사랑에 대한 옹호가 그에게는 앙드레 브르통 운동의 환원되지 않는 막다른 골목이었다고 말했다.


En 1932 paraît sa thèse de doctorat De la psychose(정신병) paranoïaque(편집증적인) dans ses rapports avec la personnalité. Ce travail constitue l'illustration(예증) clinique des potentialités que peut comporter un amour porté à l'extrême: Aimée, la malade, donne un coup de couteau à la vedette(인기 배우) qui, à titre d'idéal, représentait son amour le plus fort. Cette étude constitue de plus une rupture(파괴) totale avec les travaux des psychiatres(정신의학) de l'époque, tant le regard porté par Lacan sur la psychose paranoïaque apparaît novateur: loin de voir dans la paranoïa la simple aggravation(심화) de traits définissant le «caractère paranoïaque», Lacan considère que ce que le malade paranoïaque dénonce(드러내다) dans le monde constitue en réalité ce qu'il a en lui et qu'il méconnaît. Le mécanisme de la projection était ainsi analysé et étudié dans une approche aussi singulière que brillante et qui ne pouvait que contrarier le monde de la psychiatrie.

1932년에 인성과 관련하여 편집증적인 정신병에 대한 박사논문을 발표한다. 이 연구는 극단적 사랑이 포함할 수 있는 잠재성에 대한 임상적 예증으로 이어진다. 즉 사랑받는 사람, 환자는 이상적으로 가장 강렬한 자신의 사랑을 대변하는 인기 배우를 칼로 찌른다. 이 연구는 당시 정신의학의 업적을 모두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편집증적 정신병에 대한 라캉의 관점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라캉은 편집증 환자에게서 단순히 «편집증의 특징»을 정의하는 심화된 특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편집증 환자가 드러내는 것이 실제로 그 안에 가지고 있는 것과 그가 간과하는 것을 구성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의 메카니슴은 생소할 뿐만 아니라 기발한 접근으로 연구 분석된 것이었고, 정신분석학계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C'est par l'étude du cas Aimée et par sa tentative d'une description phénoménologique de cette personnalité, que, dira-t-il, il fut conduit à la psychanalyse, qui constituait pour lui le seul moyen de déterminer les conditions subjectives de la prévalence* du double dans la constitution du moi. Vers 1933, il rencontra des psychanalystes berlinois qui partaient aux États-Unis. Il connut Loewenstein, qui devint son analyste, et avec lequel il entretenait une relation de confiance fondée sur une rigueur intellectuelle commune.

그가 자아의 구축에서 드러나는 이중적 이환율의 주된 조건들을 정의하는 그만의 방식을 세운 것은 사랑받는 여자의 사례에 대한 연구와 그 인성의 현상학적 묘사에 대한 시도를 통해서였다. 1933년경 그는 미국으로 떠난 베를린 정신분석학자들과 만난다. 그는 자신의 분석가가 된 로벤스타인을 알게되고 그와 더불어 엄격한 지식 조직에 기반한 신뢰관계를 맺는다.

*이환율(罹患率, prevalence rate) : 어떤 기간(일반적으로 1년) 내에 발생한 환자수를 그에 대응하는 인구로 나눈 비율. 질병발생률이라고도 한다. 질병별 또는 성별·나이·지역 등 인간집단별로 계산할 수도 있다. 이환율은 어떤 인간집단에서 어떤 질병의 발생률이 높고 낮은가를 논하여(記載疫學) 구하는 것이므로, 계산상 분모가 되는 인구는 그 질병에 걸릴가능성이 있는 인구이다. 예로써 자궁암에 대한 이환율에서는 여성 인구를 분모로 해 계산한다.

Le paysage psychanalytique français de l'avant-guerre était quelque peu disparate(서로 어울리지 않는): chacun semblait y avoir été délégué(대표로 파견하다) par sa «chapelle» pour contrôler la pensée de Freud, et se recommander d'elle. Freud, rappelons-le avait, après 1920, introduit la thèse selon laquelle le moi constituait une sorte d'instance régulatrice(조절하는) entre le ça (source des pulsions) le surmoi (agent des exigences morales) et la réalité.
전전(戰前)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적 이행은 조화롭지 못한 것이었다. 각각은 프로이드의 사상을 조정하기 위해 자신들의 «제단»에서 대표로 파견된 듯 했고, 스스로를 프로이트 사상의 대변인으로 자처했다. 프로이트는 1920년 이후 이드(개인의 본능적 충동, 성적 충동의 근원)와 초자아(도덕적 존재의 주체) 사이에 있는 일종의 조절적 순간인 자아에 대한 이론을 소개했다. 
  
Or Lacan fait son entrée sur la scène psychanalytique en invoquant(내세우다) une autre thèse: «le moi, écrit-il, se construit à l'image du semblable». Cette image qui est renvoyée par le miroir. L'investissement(정신력 집중, 투하) libidinal(리비도의, 성욕의) qui est provoqué chez l'enfant comme étant la sienne
sera le point d'ancrage des identifications futures ouvrant pour chaque sujet la possibilité de se reconnaître comme différent de l'autre, comme sujet autonome(자율적) de désir. C'est lors du XVe congrès international de psychanalyse qui se tint à Marienbad en 1936, que Lacan, alors âgé de 35 ans présenta une communication intitulée: Le stade du miroir, théorie d'un moment structurant et génétique de la constitution de la réalité conçu en relation avec l'expérience de la doctrine psychanalytique. Ce fut une entrée magistrale(현학적), qui bouscula(뒤죽박죽으로 만들다) les esprits. Le texte fut accueilli sans enthousiasme et resta longtemps inédit. Ce n'est que treize ans après, lors du XVIe congrès de psychanalyse à Zurich (juillet 1949) que Lacan reprit ce thème, mais sous un titre différent: Le stade du miroir comme formateur de la fonction du Je, telle qu'elle nous est révélée dans l'expérience psychanalytique (in Écrits, 1966).

그러나 라캉은 다른 이론을 내세우며 정신분석학으로 진입한다. 즉, «자아는 유사한 것의 이미지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거울로 되비춰진다. 그 자신의 것이었던 어린 시절의 성욕에 대한 집중은 각각의 주제에 대해 욕망의 자율적 주체로서, 타자와 다름을 인식하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미래의 동일시의 정착점이 된다. 1936년 마리엔배드에서 열린 15회 국제 정신분석학 학회에서 라캉은 당시 35세의 나이로 다음 제목의 한 보고서를 발표한다. "거울의 장, 정신분석학적 이론의 경험과 관련한 현실 구성의 구조적 기원론적 순간의 이론" 이것은 현학적 시도였으며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논문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출판되지 않았다. 13년 후 취리히에서 열린 제 16회 정신분석학 학회(1949년 7월)에서 라캉은 이 논문을 다시 발표한다. 그러나 "'나'의 기능의 창조자로서의 거울의 장, 정신분석학적 경험에서 우리에게 밝혀진 바대로(출판,1966)."이라는 다른 제목으로였다.

Ce texte, soulignons-le, est d'une importance extrême: il s'agit d'un texte fondateur, que Lacan qualifiera plus tard lui-même de «premier pivot» de sa pensée. Il constitue, en effet, les prémisses(전제) d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théorie lacanienne.

이 논문은 매우 중요하다. 기초적 텍스트로서 라캉은 나중에 그 스스로 이것이 자기 자신의 «최초의 축»이라고 평가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라캉이론의 기초적 개념들의 전제를 구축한다.

En 1953, Lacan démissionna de la Société psychanalytique de Paris, dont il était le président. Avec Daniel Lagache, Juliette Favez-Boutonnier, Françoise Dolto, il fonda la Société française de psychanalyse. Le motif de la rupture fut la décision de la SPP de fonder un Institut de psychanalyse chargé de délivrer un enseignement de la psychanalyse réglé et diplômable, à l'image de celui de la faculté de Médecine, ce à quoi Lacan s'opposait. Au reste, le séminaire de Lacan, les cours de Lagache à la Sorbonne, le charisme(카리스마) de F. Dolto attiraient la majorité des étudiants, qui les suivirent.

1953년 라캉은 그 자신이 의장이었던 파리의 정신분석학학회(SPP)를 떠난다. 다니엘 라가슈, 쥴리에뜨 파베-부또니에, 프랑소와즈 돌토와 더불어 그는 정신분석학 프랑스 학회(SFP)를 설립한다. 그가 학회를 떠난 이유는 의과대학과 그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정신분석학 교육을 시키고자 정신분석학 제단을 설립하려는 SPP의 결정이었다. 게다가 라캉의 세미나와 소르본에서의 라가슈의 강의, F. 돌토의 카리스마는 그들을 따르는 대다수의 학생들을 매혹했다.

Mais il fallait mettre un terme à(~에 종지부를 찍다) un nomadisme(유목, 방랑생활) qui dura dix ans. Il fallait, affirmaient certains, réintégrer l'Association psychanalytique internationale. Les négociations furent menées par trois élèves de Lacan: Wladimir Granoff, Serge Leclaire et François Perrier. Elles aboutirent à(~귀착되다) une sorte de troc(물물교환): l'IPA acceptait de reconnaître la SFP, en échange de quoi Lacan renonçait à former des analystes. Ce fut un refus. En 1963, Lacan fonda seul l'École freudienne de Paris. Certains le suivirent. Son travail se révéla d'une grande fécondité. En 1980, les premiers signes de la maladie le conduisirent à dissoudre(없애버리다) son école. Lacan mourut en septembre 1981.

그러나 10년 동안의 노마디즘은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국제 정신분석학 협회(IPA)를 통합해야만 했다. 협상이 라캉의 세 학생을 통해 진행되었다. 그들은 블라디미르 그라노프, 세르쥬 르클레르 그리고 프랑소와 페리에였다. 그들은 일종의 물물교환을 행했다. 즉 IPA는 SFP를 인정하고 그 대가로 라캉은 분석가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거부였다. 1963년에 라캉은 홀로 파리에 프로이트 학교를 세운다. 일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의 업적은 매우 풍부하게 드러난다. 1980년 첫번째 병적 징후로 학교가 문을 닫기에 이르고 라캉은 1981년 9월 사망했다.

Le but de Lacan était d'assurer à la psychanalyse une assise scientifique. Il voulait démontrer qu'il ne s'agissait pas, avec elle, d'une théorie, mais de la recherche des conditions objectives qui déterminent la vie mentale.
라캉의 목표는 정신분석학에 과학적 토대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의 이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삶을 규정하는 객관적 조건들에 대한 연구를 보여주고자 했다. 

 
*Yahoo! Encyclopédie


카트린 클레망《악마의 창녀》, p.113

4 우리의 이야기는 세미나로부터 시작한다 中에서

라캉은 50년대에 마샬 플랜의 이데올로기적 결과를 공격했다. 다시 말해 1947년 미국이 유럽의 재건을 돕기 위해 승인한 막대한 투자가 정신분석학의 발전에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타락한 사회복지 사업이 되었고, 방법상 프로이트의 사상은 결여되어 있었다. 마샬 플랜과 함께 미국인들은 코카콜라, 담배, 추잉 검과 더불어 영화와 정신분석에 대한 자신들의 전망을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라캉이 부상했다. 라캉의 프로이트에로의 복귀는 아주 프랑스적인 반항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인종주의에 대해 생각지도 못했던 70년대부터 인종주의의 부활을 예견했다. 1969년 그는 좌파들이 무시무시한 권력욕으로 고무될 것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라캉은 우리에게 자신을 지배할 주인을 찾고 있던 히스테리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여성 정관사를 지워 버렸다. 남성 세계의 합의 속에 있지 않다면 여성 정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 정관사는 일반적으로 남성들에 의해 주어진 호칭이다. 단수의 여성 정관사는 존재하지 안지만 여성 복수 정관사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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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2004-07-2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마드(nomad)는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용어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은 용어이다.

노마디즘은 이러한 노마드의 의미를 살려 철학자 이진경이 들뢰즈의 저서 《천(千)의 고원》(1980)을 강의하면서 남긴 글을 정리하고 보충해서 2002년 출간한 책의 제목으로, 우리말로는 유목주의로 번역된다.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도 쓰인다.

노마드란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것, 곧 한 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뜻한다. 철학적으로는 철학·문학·정신분석·신화학·수학·경제학 등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의 여행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