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그 나름대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지식이나 주체를 동요하게 만드는 강력한 지진과도 같다. 그것은 말의 텅 빈 상태를 만들어낸다.
좀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서구 언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문제다. 동사는 있는데 주어나 목적어가 없으면서도 타동사인 경우, 예컨대 인식하는 주체도 없고 인식되는 대상도 없는 인식행위를 서구인이라면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젓가락 두 쪽을 한데 모으면 음식물을 ‘꼬집는다‘는 또 다른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 ‘꼬집다‘라는 단어의 어감이 지나치게 세고 공격적이긴 하다. 왜냐하면 음식물은 들려져 운반되는 데 꼭 필요한 압력 이상은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질에 의해 더욱더 유연해지는 젓가락의 몸짓에는 어머니가 아기를 옮길 때 조심스럽게 주의하는 것처럼 모성적인 측면이 있다. 이때 사용되는 힘은 더 이상 욕구에 관련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서 우리는 음식에 대해 온전한 태도를 갖게 된다.
...시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인쇄된 문화를 통해 대개 정보가 소통되는... 정체성과 소유권을 통합하지도 않는다.
분라쿠는 무대의 세 군데 장소에서 동시에 읽히는 세 가지의 구별된 글쓰기를 행위로 옮긴다. 꼭두각시 인형, 조종자, 연사는 각기 실행된 몸짓, 목소리의 몸짓을 나타낸다.
반면 분라쿠는 행위와 몸짓을 구분한다. 분라쿠는 몸짓을 과시하며 그 행위가 보이게 만들고 예술과 노동을 동시에 나타내며 각각에게 자신의 글쓰기를 확보시킨다.
동양의 여장남자는 여성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기호화한다. 그는 자신의 모델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기의로부터 분리된다. 여성스러움은 읽히기 위해 표현되는 것이지 결코 보이는 것이 아니다. 위반이 아니라 번역이다. 이제 기호는 훌륭한 여자 역할에서 쉰 살의 평범한 가장으로 전이된다. 그는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은유는 과연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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