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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평점 :
김훈의 전공이라고 할만한 역사 소설이다. 그의 역사 소설은 일반적인 역사 소설과는 다르게 읽힌다. 신형철은 김훈의 역사를 두고 "우리의 현재가 이미 역사라는 형식으로 과거에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수단"이라 말했고, 박진은 "역사적 과거를 과감하게 현재화하고, 역사 속 인물에게 작가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이입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평론가와 독자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김훈을 읽겠지만 그의 역사가 현재와 분리되지 않는 실존적 고민이라는 지점에서 대체로 합의가 이뤄질 것이다.
이 소설이 다루는 역사는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다. 멀지 않은 과거라서 더 아프고 생생한 과거인데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몇 년 전 영화 <변호인>와 <국제시장>을 생각해본다. <변호인>의 역사를 긍정하는 사람은 <국제시장>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았고,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둘 다 재밌게 봤으니 줏대 없다고 해야 할까 ㅎㅎ.
나는 두 영화가 말하는 역사를 모두 긍정하면서도, 거기에 중요한 무언가가 빠졌다는 생각을 한다. 두 영화는 어쨌거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시절을 견뎌온 한국을 긍정하고 결국 인간은 선하다는 결론으로 안착한다. <변호인>의 곽도원과 그 일당이 악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사실 독재 체제의 현현에 가깝다. 한편 <국제시장>의 악은 가난과 전쟁이다. 열혈 변호사가 독재와 싸워서 승소를 이끌어내고, 소시민이 질곡의 역사를 통과하며 살만한 현재를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감동은 할 수 있어도 현재의 고민을 투영해 바라볼 수 있을까? 과연 그렇다면 한 걸음씩 진보한 세상은 왜 아직도 더럽고 치사한가. 왜 차가운 바다에서 학생들이 죽어야 했을까. 설명할 수 없다. 시대가 인간을 억압하는 이야기에서 한 층 더 깊이 들어가야 현재의 고민과 접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난 이 소설을 시대에 짓눌린 무력한 인간이 왜 또 다른 인간에게 고통 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읽었다.
이 소설엔 많은 인물의 개인사가 펼쳐지는데 그중 마장세와 오장춘의 이야기가 가장 유의미해 보인다. 마장세는 베트남에서 동료들과 고립됐을 때 총상 입은 동료를 죽이고 생환한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학생 때부터 도시락을 훔쳐먹었던 오장춘은 군대에서 휘발유를 빼돌리는 일에 동참했다. 이 둘은 처벌받지 않는다. 마장세가 죽인 동료는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고 마장세는 훈장을 받는다. 오장춘은 휘발유 횡령 사건 당시 병사였다는 이유로 수사가 유야무야 종결되어 처벌받지 않는다.
그러나 저 둘을 도덕적으로 쉽게 단죄할 수 있을까. 생환하기 위해 어차피 죽을 동료를 죽인 것을, 어차피 산길에서 매연으로 휘발될 기름으로 가난을 버텨보려 한 것을, 안전한 우리가, 가난하지 않은 우리가 단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실 지금 우리는 거기에 '잘잘못을 들이댈 수는 없(220)'을 것이다.
그들은 원주민이 죽어서 불법 사업이 발각되고 나서야 단죄된다. 그들의 죄를 미리 엄하게 물어 사회에서 격리했다면 이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그들이 사라진 빈자리는 다른 누군가가 채울 가능성이 많다. 더욱이 잘잘못을 들이대기 어려운 일에 일일이 엄벌을 가하기엔 세상의 죄는 너무나 많다.
원래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인간들의 세상이기에 불행은 반복되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맞는 말일 것이다. 다만, 허무를 허무로만 남기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작가의 질문에 독자는 고민으로 대답해야 윤리적 독서가 될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세상을 어떻게 좋은 세상으로 만들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개인을 단죄할 수는 있어도 시대는 단죄하지 못한다. 시대엔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을 괴물로 만들어 쉬운 단죄로 윤리적 우월감을 공유하는 것보다는 시대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공유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렇게 살았다, 고 나는 느낀다. 과거가 현재에서도 반복되는 세상에서 윤리는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전투가 끝난 고원에서 종군 사제가 나뭇가지를 얽어서 시체들 앞에 십자가를 세우고 미사를 드렸다. 인간의 죄가 마침내 사해지기를 울면서 기도했다. 시체들만이 미사에 참례했다. 이 모든 살육과 파괴가 어떤 의미에 도달하는 것인지를 사제는 울면서 하느님께 물었다. 고원의 저녁 햇살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눈 덮인 시체 위에 도 눈이 내렸다. 사제는 시체 위에 성수를 뿌렸다. 날이 저물고 사제는 부대로 돌아갔다. 나무 십자가가 고원에 남아서 눈을 맞았다. 계곡과 능선이 눈에 덮이고 달빛이 스며서 죄는 보이지 않았다. 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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