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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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그 유명한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잠깐 떠올렸다.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같은 아릿한 구절을 기억한다. 신경림 시인이 그 시를 썼을 때보다 사회 전체의 생활 수준은 높아졌을지라도 여전히 살아내기에 바빠 사랑을 사치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빛이 밝으면 그늘은 더욱 어두워지기에 그 안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을 뿐이다.

 

소설 제목은 백百의 그림자인데 대략 모두의 그림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소설은 그림자를 물리적 실체로만 그리지 않는다. 소설 속 그림자는 누구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황에 따라 커지고, 일어서고, 주인에게 눌어붙는다. 그것을 이기지 못한 인간은 그림자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진다. 많은 빚을 졌던 무재 아버지, 가족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기러기 아빠,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은 여인, 고작 폐지를 두고 다른 노인과 싸워야 했던 할머니, 이들은 그림자를 따라가며 삶을 놓아버린 사람이다. 결국 소설이 말하는 그림자는 저마다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인데, 이 삶의 무게가 턱밑까지 육박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땐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이 살아지는 지경일 것이다. 어쩌겠는가. '결국 그림자를 견디지 못해서 죽(143)'는 수밖에.

 

소설 속 세계는 철거 예정인 전자상가로 요약된다. 오래됐고 보기에 안 좋으니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의 삶들은 어쩌나. '시끄럽고 분주하고 의미도 없이 빠른 데다 여러모로 사납'기만 한 도시에서 빈민들이 그림자를 따라가는 건 '왠지 홀가분(32)'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 세계의 해답이 이것뿐이라면 너무나 슬픈 일일 것이다.

 

화자의 연인 무재도 불우한 삶을 살았고, 현재 삶도 녹록지 않은 까닭에 위태로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소설 초반에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예요"라고 말하던 무재는 종반에 완벽한 좌절을 맞는다. 오래된 중고 자동차가 섬에서 퍼져버린 것인데, 이는 그저 엔진의 사망이 아닌 그들 삶에 대한 잔인한 선고와 같이 느껴진다. "마치 섬 전체가 무재 씨의 그림자인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고 서로를 의지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언어는 이렇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걸어갑시다." "노래할까요." 이 마지막 장면은 같이 걷는 사람들의 무채색 풍경이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설가가 말하는 그림자는 여러모로 영리한 은유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없다. 평소 자신의 그림자를 특별히 신경 쓰지도 않는 마당에 남의 그림자는 더욱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런 우리는 그림자가 일어선 타인에게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미안하다고,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무사 할아버지처럼 전구 하나를 습관적으로 더 내어줄 수 있는가? 소설의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아픈 세상에서도 사랑만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소설가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은교 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런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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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
마일리 멜로이 지음, 강정우 옮김 / 책세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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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한국 소설은 시대에 짓눌려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사회의 불합리,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비극, 트라우마. 이것들을 꼭 말해야 한다는 작가의 시대의식 때문일까? 문학이 시대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소재가 무엇이든 그걸 주무르는 건 작가의 몫이긴 하다. 그러나 간혹 미숙한 터치로 주제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소설은 삐딱하게 읽을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외국 소설, 적어도 단편만큼은 시대 상황을 소설의 전제로 활용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이 몸담은 사회가 불합리나 트라우마가 적기 때문인지, 좀 더 보편적 인간성의 탐구에 매진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독자가 실재하는 불행에 대한 공감을 강요받지 않는 장점만은 확실하다. 사람마다 감수성이 다르고 사건에 대한 생각이 다른데 너희도 같은 슬픔을 느끼라는 식의 한국 소설을 읽을 때가 종종 있었다. 한국 소설도 조금은 시대 상황에서 자유로워졌으면 한다. 사회가 먼저 변해야겠지만. 

 

사전 잡담은 여기까지. 이 미국 소설가의 작품들은 일상의 긴장감을 생생히 담고 있다. 기실 삶에서 파국의 씨앗은 어디 깊숙한 곳에 있지 않고, 일상을 한꺼풀만 벗기면 드러나게 되어있다. 소설집 제목은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인데, 소설에서 말하는 두 가지 길이란 불가피한 윤리적 선택의 갈림길 같은 게 아니다. 고작, 젊고 아름다운 애인과 지금 옆에 있는 현명한 아내 사이에서 고민하며 하는 생각이다. "어떤 바보가 오직 한 가지 길만을 원하겠는가?" 정말로 그렇다. 선택의 순간은 돌아보면 윤리의 갈림길이 아닌 욕망의 갈림길인 경우가 많았다. 고상한 척했지만 제 속을 들여다보면 구질구질해서 누구한테 말도 못 하는 그런 갈림길 말이다. 어쨌거나 윤리든 욕망이든 상관없이 인생에선 동시에 갈 수 없는 갈림길을 맞이할 수밖에 없고, 그때 우리의 최선은 선택한 길에 집중하여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를 줄이는 것뿐이다.

 

소설집의 전체적 기조와는 약간 다른 <사랑스런 리타>는 두 번 읽었다. 남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윤리에 대한 소설은 그동안에도 많았지만, 이 단편 소설은 각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

레이가 그를 쳐다보았다. 지적으로 탁월한 그의 아내. 빤히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고, 어깨에 닿은 그녀의 머리에 안심이 되었다. 그는 양면성과 욕망으로 저주받았다. 조금 더 용감한 남자였다면, 아니 조금만 더 겁쟁이였다면 간단하게 떠났을 것이다. 더 행복한 남자였다면, 또는 현실에 좀더 안주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머무르며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흥청거렸을 것이다. 마치 낡은 목욕가운처럼 그 익숙함으로 몸을 감싼 채로. 그는 이도 저도 아닌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었고, 그들이 그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실망시키고 걱정시키게 될 뿐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 메그가 시를 써서 집에 가져온 적이 있었고,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 가지 모두가 내가 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두 가지 모두를 원하는 자신의 강력한 힘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떤 바보가 오직 한 가지 길만을 원하겠는가? 2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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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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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주인공이 소년원 들어갔다가 권투 스승 만나서 복서로 성장하는 이야기. 와 촌스러워라. 이거 완전 어디서 본 이야기 아니야. 아닌 게 아니라 고아 출신 복서하면 <내일의 죠> 가 퍼뜩 떠오른다. 만화는 안 봤어도 하얗게 불태웠다는 마지막 장면만큼은 다들 한 번쯤 본 적 있을 테다. <내일의 죠>엔 멋진 라이벌과, 자신을 걱정해주는 죽은 라이벌의 애인과,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끝까지 불태우는 멋진 주인공이 나온다. 정말 멋진 청춘 드라마 아닌가. 김종서가 부른 오프닝 OST처럼 "두 주먹 불끈쥐면 내일이 샘솟"는 세계다.

 

반면 <스파링>의 주인공은 자신을 마음대로 내던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프로 복싱 매니지먼트와의 계약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경기 수를 채워야 한다. 서로 자극을 주는 멋진 라이벌도 없다. 그는 천재 복서이기에 앞서 '불가항력의 세계(25)'를 살아가는 작은 인간일 뿐이다.

 

소설 속 세계의 정의란 제멋대로 작동하는데 그를 소년원으로 보낸 가진 자들의 법이 그러하고, 복싱 연맹의 편파 판정이 그렇다. 이 구닥다리 소재가 재밌게 읽히는 건 우리 또한 세계의 정의가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느낌 아래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이 고아 복서를 미칠 듯이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 완강한 부조리를 개인이 극복할 수 있을까. 소설이 말하는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개인의 몫이다. 다만 확실한 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폭력(30)'에 망가진 인간이 "내가 당신들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라고 되물을 때, 어떤 답이든 우리가 쉽게 대답하진 못하리라는 것이다. 부조리를 방관한 사람은 대답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가진 자들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고, 네 잘못 또한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긴 소설에 나온 것처럼 지역 모든 학생들에게 천 원씩 걷는 거대 학생 조직이 있을 리가 있나 ㅎㅎ. 감성적인 척하는 내 생각의 일부도 그렇게 작동한다. 언더 도그마로는 세상의 추악함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고 믿는다. 다만 나는 소설의 언더 도그마에 약간 설득당해버렸는데 그건 순전히 소설의 몰입력과 재미 때문이다. 아무리 나와 사상이 비슷해도 노잼으로 우기면 참을 수 없다. 예스잼이면 뭐가 됐든 환영이다. 이 소설은 예스잼이다. 10년간 서평 2000편을 쓰고, 8년간 소설 공모전을 두드린 문학 독학자의 등단작이란 사실도 흥미롭다. 문학동네 소설 공모전은 작가에 대한 정보 없이 심사한다고 했다. 늘 평균 이상의 재미였다.

남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도록 방치하는 것은 종종 그 자체로 위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꾸만 내가 모르던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지고 또하나의 나로 자리잡히게 되면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내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급기야 나조차 내가 누구인지 헷갈릴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서서히 나를 잠식하고, 그러다보면 기어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내가, 정작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마치 우주에 버려진 미아처럼 텅 빈 공간을 떠다니게 될 수도 있었다. 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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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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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거대한 트라우마를 예술로 치유(혹은 위로)하는 게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에 합당한 자세는 무엇일까.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어떤 이들의 슬픈 삶을 한없이 슬픈 눈으로만 들여다보아서 기어이 영영 슬픈 삶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위로하는 자의 안도로 끝날 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 <귀향>은 보지 않았지만 <귀향>이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은 이유도 아마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미국의 거대한 트라우마인 9.11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 이야기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9살 소년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까. 소설은 열쇠의 주인 Black을 찾아다니는 소년의 여정과 드레스덴 폭격 당시 가족과 애인을 잃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소년은 그 여정을 통해 상실의 아픔이 저마다의 개별적 이야기이면서도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알아간다.

 

문학에서의 피해자 중심주의란 가해자가 얼마나 악랄했고 피해자가 얼마나 불쌍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닐 것이다. 그건 별로 좋지 않은 방식의 동정일 것이다. 명백한 가해자가 있는 테러 사건임에도 소설에선 증오의 문장이 보이지 않는다. 소설은 소년의 여정을 증오가 아닌 그리움의 연속으로 그린다. 그 과정을 통해 모든 슬픔 속에서 슬픔을 이겨내고 애도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소년과 독자 모두 확인한다. 이처럼 희생자를 진정으로 기리는 방법은 그들이 놓고 온 삶이 아름다웠음을, 그들 삶이 잊혀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어찌됐든 "모두가 모두를 잃는"다는 인류 보편의 아픔을 확인하며 위로받는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클리셰인데, 소설은 이것을 독특한 형식으로 극복한다. 소설은 소년이 스크랩한 사진, 할아버지 서간문의 빽빽한 활자, 아버지가 읽으며 표시했던 첨삭 기호, 할머니의 타자기 서간문 등을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그것들을 읽으며 독자는 소년의 경험을 추체험하게 된다. 할머니의 왠지 슬픈 자간과 할아버지의 고통스러운 활자 겹침을 지나가면 잊지 못할 마지막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 장면으로 소설가는 우릴 대신해 말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이라고.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그 감동이 가시기도 전에 세월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참 안타까운 사회의 안타까운 독자들일 것이다. 가해자는 누구인가. 피해자는 왜 그들인가. 요즘 나는 그들이 왠지 세상의 많은 죄를 대속한 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들은 예술로 위로받기에 앞서 현실에서 제대로 위로받았어야 한다. 알량한 예술로 그들을 위로하는 척하는 건 어쩌면 염치없는 일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끝났음을 알았단다, 그녀에게 스포츠를 좋아하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내게 체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어, 나는 그녀에게 쓰러진 나무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지,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돌아갔고, 내 마음도 그녀를 따라갔어, 하지만 나는 내 껍질과 함께 남겨졌어, 그녀를 다시 만나야 했어, 왜 그래야만 하는지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그 욕망이 아름다웠던 거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잘못이 있을 수는 없는 거란다. 1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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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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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전공이라고 할만한 역사 소설이다. 그의 역사 소설은 일반적인 역사 소설과는 다르게 읽힌다. 신형철은 김훈의 역사를 두고 "우리의 현재가 이미 역사라는 형식으로 과거에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수단"이라 말했고, 박진은 "역사적 과거를 과감하게 현재화하고, 역사 속 인물에게 작가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이입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평론가와 독자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김훈을 읽겠지만 그의 역사가 현재와 분리되지 않는 실존적 고민이라는 지점에서 대체로 합의가 이뤄질 것이다. 


이 소설이 다루는 역사는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다. 멀지 않은 과거라서 더 아프고 생생한 과거인데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몇 년 전 영화 <변호인>와 <국제시장>을 생각해본다. <변호인>의 역사를 긍정하는 사람은 <국제시장>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았고,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둘 다 재밌게 봤으니 줏대 없다고 해야 할까 ㅎㅎ.


나는 두 영화가 말하는 역사를 모두 긍정하면서도, 거기에 중요한 무언가가 빠졌다는 생각을 한다. 두 영화는 어쨌거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시절을 견뎌온 한국을 긍정하고 결국 인간은 선하다는 결론으로 안착한다. <변호인>의 곽도원과 그 일당이 악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사실 독재 체제의 현현에 가깝다. 한편 <국제시장>의 악은 가난과 전쟁이다. 열혈 변호사가 독재와 싸워서 승소를 이끌어내고, 소시민이 질곡의 역사를 통과하며 살만한 현재를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감동은 할 수 있어도 현재의 고민을 투영해 바라볼 수 있을까? 과연 그렇다면 한 걸음씩 진보한 세상은 왜 아직도 더럽고 치사한가. 왜 차가운 바다에서 학생들이 죽어야 했을까. 설명할 수 없다. 시대가 인간을 억압하는 이야기에서 한 층 더 깊이 들어가야 현재의 고민과 접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난 이 소설을 시대에 짓눌린 무력한 인간이 왜 또 다른 인간에게 고통 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읽었다.


이 소설엔 많은 인물의 개인사가 펼쳐지는데 그중 마장세와 오장춘의 이야기가 가장 유의미해 보인다. 마장세는 베트남에서 동료들과 고립됐을 때 총상 입은 동료를 죽이고 생환한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학생 때부터 도시락을 훔쳐먹었던 오장춘은 군대에서 휘발유를 빼돌리는 일에 동참했다. 이 둘은 처벌받지 않는다. 마장세가 죽인 동료는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고 마장세는 훈장을 받는다. 오장춘은 휘발유 횡령 사건 당시 병사였다는 이유로 수사가 유야무야 종결되어 처벌받지 않는다.


그러나 저 둘을 도덕적으로 쉽게 단죄할 수 있을까. 생환하기 위해 어차피 죽을 동료를 죽인 것을, 어차피 산길에서 매연으로 휘발될 기름으로 가난을 버텨보려 한 것을, 안전한 우리가, 가난하지 않은 우리가 단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실 지금 우리는 거기에 '잘잘못을 들이댈 수는 없(220)'을 것이다.


그들은 원주민이 죽어서 불법 사업이 발각되고 나서야 단죄된다. 그들의 죄를 미리 엄하게 물어 사회에서 격리했다면 이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그들이 사라진 빈자리는 다른 누군가가 채울 가능성이 많다. 더욱이 잘잘못을 들이대기 어려운 일에 일일이 엄벌을 가하기엔 세상의 죄는 너무나 많다.


원래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인간들의 세상이기에 불행은 반복되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맞는 말일 것이다. 다만, 허무를 허무로만 남기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작가의 질문에 독자는 고민으로 대답해야 윤리적 독서가 될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세상을 어떻게 좋은 세상으로 만들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개인을 단죄할 수는 있어도 시대는 단죄하지 못한다. 시대엔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을 괴물로 만들어 쉬운 단죄로 윤리적 우월감을 공유하는 것보다는 시대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공유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렇게 살았다, 고 나는 느낀다. 과거가 현재에서도 반복되는 세상에서 윤리는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전투가 끝난 고원에서 종군 사제가 나뭇가지를 얽어서 시체들 앞에 십자가를 세우고 미사를 드렸다. 인간의 죄가 마침내 사해지기를 울면서 기도했다. 시체들만이 미사에 참례했다. 이 모든 살육과 파괴가 어떤 의미에 도달하는 것인지를 사제는 울면서 하느님께 물었다. 고원의 저녁 햇살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눈 덮인 시체 위에 도 눈이 내렸다. 사제는 시체 위에 성수를 뿌렸다. 날이 저물고 사제는 부대로 돌아갔다. 나무 십자가가 고원에 남아서 눈을 맞았다. 계곡과 능선이 눈에 덮이고 달빛이 스며서 죄는 보이지 않았다. 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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