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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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주인공이 소년원 들어갔다가 권투 스승 만나서 복서로 성장하는 이야기. 와 촌스러워라. 이거 완전 어디서 본 이야기 아니야. 아닌 게 아니라 고아 출신 복서하면 <내일의 죠> 가 퍼뜩 떠오른다. 만화는 안 봤어도 하얗게 불태웠다는 마지막 장면만큼은 다들 한 번쯤 본 적 있을 테다. <내일의 죠>엔 멋진 라이벌과, 자신을 걱정해주는 죽은 라이벌의 애인과,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끝까지 불태우는 멋진 주인공이 나온다. 정말 멋진 청춘 드라마 아닌가. 김종서가 부른 오프닝 OST처럼 "두 주먹 불끈쥐면 내일이 샘솟"는 세계다.

 

반면 <스파링>의 주인공은 자신을 마음대로 내던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프로 복싱 매니지먼트와의 계약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경기 수를 채워야 한다. 서로 자극을 주는 멋진 라이벌도 없다. 그는 천재 복서이기에 앞서 '불가항력의 세계(25)'를 살아가는 작은 인간일 뿐이다.

 

소설 속 세계의 정의란 제멋대로 작동하는데 그를 소년원으로 보낸 가진 자들의 법이 그러하고, 복싱 연맹의 편파 판정이 그렇다. 이 구닥다리 소재가 재밌게 읽히는 건 우리 또한 세계의 정의가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느낌 아래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이 고아 복서를 미칠 듯이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 완강한 부조리를 개인이 극복할 수 있을까. 소설이 말하는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개인의 몫이다. 다만 확실한 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폭력(30)'에 망가진 인간이 "내가 당신들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라고 되물을 때, 어떤 답이든 우리가 쉽게 대답하진 못하리라는 것이다. 부조리를 방관한 사람은 대답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가진 자들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고, 네 잘못 또한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긴 소설에 나온 것처럼 지역 모든 학생들에게 천 원씩 걷는 거대 학생 조직이 있을 리가 있나 ㅎㅎ. 감성적인 척하는 내 생각의 일부도 그렇게 작동한다. 언더 도그마로는 세상의 추악함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고 믿는다. 다만 나는 소설의 언더 도그마에 약간 설득당해버렸는데 그건 순전히 소설의 몰입력과 재미 때문이다. 아무리 나와 사상이 비슷해도 노잼으로 우기면 참을 수 없다. 예스잼이면 뭐가 됐든 환영이다. 이 소설은 예스잼이다. 10년간 서평 2000편을 쓰고, 8년간 소설 공모전을 두드린 문학 독학자의 등단작이란 사실도 흥미롭다. 문학동네 소설 공모전은 작가에 대한 정보 없이 심사한다고 했다. 늘 평균 이상의 재미였다.

남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도록 방치하는 것은 종종 그 자체로 위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꾸만 내가 모르던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지고 또하나의 나로 자리잡히게 되면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내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급기야 나조차 내가 누구인지 헷갈릴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서서히 나를 잠식하고, 그러다보면 기어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내가, 정작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마치 우주에 버려진 미아처럼 텅 빈 공간을 떠다니게 될 수도 있었다. 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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