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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
마일리 멜로이 지음, 강정우 옮김 / 책세상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유독 한국 소설은 시대에 짓눌려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사회의 불합리,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비극, 트라우마. 이것들을 꼭 말해야 한다는 작가의 시대의식 때문일까? 문학이 시대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소재가 무엇이든 그걸 주무르는 건 작가의 몫이긴 하다. 그러나 간혹 미숙한 터치로 주제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소설은 삐딱하게 읽을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외국 소설, 적어도 단편만큼은 시대 상황을 소설의 전제로 활용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이 몸담은 사회가 불합리나 트라우마가 적기 때문인지, 좀 더 보편적 인간성의 탐구에 매진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독자가 실재하는 불행에 대한 공감을 강요받지 않는 장점만은 확실하다. 사람마다 감수성이 다르고 사건에 대한 생각이 다른데 너희도 같은 슬픔을 느끼라는 식의 한국 소설을 읽을 때가 종종 있었다. 한국 소설도 조금은 시대 상황에서 자유로워졌으면 한다. 사회가 먼저 변해야겠지만.
사전 잡담은 여기까지. 이 미국 소설가의 작품들은 일상의 긴장감을 생생히 담고 있다. 기실 삶에서 파국의 씨앗은 어디 깊숙한 곳에 있지 않고, 일상을 한꺼풀만 벗기면 드러나게 되어있다. 소설집 제목은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인데, 소설에서 말하는 두 가지 길이란 불가피한 윤리적 선택의 갈림길 같은 게 아니다. 고작, 젊고 아름다운 애인과 지금 옆에 있는 현명한 아내 사이에서 고민하며 하는 생각이다. "어떤 바보가 오직 한 가지 길만을 원하겠는가?" 정말로 그렇다. 선택의 순간은 돌아보면 윤리의 갈림길이 아닌 욕망의 갈림길인 경우가 많았다. 고상한 척했지만 제 속을 들여다보면 구질구질해서 누구한테 말도 못 하는 그런 갈림길 말이다. 어쨌거나 윤리든 욕망이든 상관없이 인생에선 동시에 갈 수 없는 갈림길을 맞이할 수밖에 없고, 그때 우리의 최선은 선택한 길에 집중하여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를 줄이는 것뿐이다.
소설집의 전체적 기조와는 약간 다른 <사랑스런 리타>는 두 번 읽었다. 남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윤리에 대한 소설은 그동안에도 많았지만, 이 단편 소설은 각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
레이가 그를 쳐다보았다. 지적으로 탁월한 그의 아내. 빤히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고, 어깨에 닿은 그녀의 머리에 안심이 되었다. 그는 양면성과 욕망으로 저주받았다. 조금 더 용감한 남자였다면, 아니 조금만 더 겁쟁이였다면 간단하게 떠났을 것이다. 더 행복한 남자였다면, 또는 현실에 좀더 안주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머무르며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흥청거렸을 것이다. 마치 낡은 목욕가운처럼 그 익숙함으로 몸을 감싼 채로. 그는 이도 저도 아닌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었고, 그들이 그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실망시키고 걱정시키게 될 뿐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 메그가 시를 써서 집에 가져온 적이 있었고,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 가지 모두가 내가 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두 가지 모두를 원하는 자신의 강력한 힘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떤 바보가 오직 한 가지 길만을 원하겠는가? 2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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