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사회의 거대한 트라우마를 예술로 치유(혹은 위로)하는 게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에 합당한 자세는 무엇일까.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어떤 이들의 슬픈 삶을 한없이 슬픈 눈으로만 들여다보아서 기어이 영영 슬픈 삶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위로하는 자의 안도로 끝날 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 <귀향>은 보지 않았지만 <귀향>이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은 이유도 아마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미국의 거대한 트라우마인 9.11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 이야기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9살 소년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까. 소설은 열쇠의 주인 Black을 찾아다니는 소년의 여정과 드레스덴 폭격 당시 가족과 애인을 잃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소년은 그 여정을 통해 상실의 아픔이 저마다의 개별적 이야기이면서도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알아간다.

 

문학에서의 피해자 중심주의란 가해자가 얼마나 악랄했고 피해자가 얼마나 불쌍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닐 것이다. 그건 별로 좋지 않은 방식의 동정일 것이다. 명백한 가해자가 있는 테러 사건임에도 소설에선 증오의 문장이 보이지 않는다. 소설은 소년의 여정을 증오가 아닌 그리움의 연속으로 그린다. 그 과정을 통해 모든 슬픔 속에서 슬픔을 이겨내고 애도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소년과 독자 모두 확인한다. 이처럼 희생자를 진정으로 기리는 방법은 그들이 놓고 온 삶이 아름다웠음을, 그들 삶이 잊혀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어찌됐든 "모두가 모두를 잃는"다는 인류 보편의 아픔을 확인하며 위로받는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클리셰인데, 소설은 이것을 독특한 형식으로 극복한다. 소설은 소년이 스크랩한 사진, 할아버지 서간문의 빽빽한 활자, 아버지가 읽으며 표시했던 첨삭 기호, 할머니의 타자기 서간문 등을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그것들을 읽으며 독자는 소년의 경험을 추체험하게 된다. 할머니의 왠지 슬픈 자간과 할아버지의 고통스러운 활자 겹침을 지나가면 잊지 못할 마지막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 장면으로 소설가는 우릴 대신해 말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이라고.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그 감동이 가시기도 전에 세월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참 안타까운 사회의 안타까운 독자들일 것이다. 가해자는 누구인가. 피해자는 왜 그들인가. 요즘 나는 그들이 왠지 세상의 많은 죄를 대속한 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들은 예술로 위로받기에 앞서 현실에서 제대로 위로받았어야 한다. 알량한 예술로 그들을 위로하는 척하는 건 어쩌면 염치없는 일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끝났음을 알았단다, 그녀에게 스포츠를 좋아하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내게 체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어, 나는 그녀에게 쓰러진 나무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지,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돌아갔고, 내 마음도 그녀를 따라갔어, 하지만 나는 내 껍질과 함께 남겨졌어, 그녀를 다시 만나야 했어, 왜 그래야만 하는지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그 욕망이 아름다웠던 거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잘못이 있을 수는 없는 거란다. 1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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