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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 제6회 채만식문학상, 제10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전성태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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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은 모두 10편인데 그중 6편이 몽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몽골에 2차례 방문했었고, 2005년에는 6개월 간 체류했었다. 이때의 경험과 영감이 고스란히 소설집에 녹아 있다. 


몽골은 1992년 사회주의 체제를 버리고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나라고, 현재도 초원에서 생활하는 유목민과 자본을 좇는 도시인의 삶이 혼재되어 있는 나라다. 표제작 『늑대』는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다. 몽골의 초원에도 검은 혓바닥 같은 아스팔트가 깔리기 시작한다. 급격한 자본주의의 유입 시기에 동물과 아이들을 부려 부를 축적한 서커스 단장 노인은 늑대 무리에서도 특별한 검은 늑대를 생포하기 위해 추격한다. 그리고 단장은 자신의 어린 벙어리 여자에게 집착하고 그녀와 주위 남자들을 의심한다. 인간도 자연도 제 손아귀에 소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탐욕의 끝은 허무함이다. 검은 늑대는 죽고 벙어리 허와는 촌장의 딸 치무게와 금기를 넘어선 사랑을 한다. 그 순간 단장의 총성이 울린다. 총은 인간의 탐욕이며 동시에 폭력이다. 그것은 결국 자연과 인간 모두를 망가뜨리고 만다.


1992년 이전에는 공산주의 진영이었기 때문에 주로 북한 사람들이 몽골에 방문했고, 이후로는 남한 사람들이 방문하여 몽골 사람들은 두 한국인들에 대한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 『두번째 왈츠』는 한국인 소설가가 오래전 북한 사람들이 몽골을 떠날 때 홀로 남아 정착한 어느 북한 여자를 찾는 이야기다. 사실 북한 여자는 핑계에 불과하고 매력적인 몽골 여성 냐마와 여정을 함께 하는 게 속내다. 북한 여자를 찾는 동안 몽골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몽골 사람은 북한 사람도 남한 사람을 물어보고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을 자신들을 통해 알려 한다고 말한다. 이건 마치 중매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궁금해하며 물어보는 남녀 같다. 추억이 없어 그리움도 없다는 화자에게 몽골의 노 시인은 추억이 없어도 그리워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북한 여자를 찾아가는 일은 중요하지 않으니 둘이서 돌아가자 냐마에게 말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냐마는 그녀를 꼭 찾아야겠다며 끝까지 북한 여자를 찾는다. 결국에 북한 여자의 마지막 행적을 찾아냈지만 그녀는 사망한 뒤였고 냐마는 서럽게 운다. 화자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이 몰아친다. "우리가 끝내 알 수 없는 것들을 다 무어라 불러야겠는가?" 몽골 노 시인의 중얼거림에 끝내 알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매는 인생의 비의가 담겨있다.


몽골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나머지 작품들도 저마다의 깊이와 해학이 있다.『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탈북자들이 강을 건너는 이야기다. 강을 건너야 하는 아기는 아낙의 등위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강 건너로 인도하는 길잡이 여자 등 뒤의 아기는 며칠 전 굶어죽었다. 강을 사이에 둔 이편과 저편 어느 곳에서도 낙원은 없는 엄혹한 현실을 말한다.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다』에선 전두환 정권 시절 아이들의 성장담이 잔잔하게 읽히고, 『이미테이션』에서는 단지 혼혈의 용모만 가졌을 뿐 순수 한국인인 게리가 사는 이야기를 통해 진짜를 좇는 이미테이션 인생을 말한다. 소설 종반에 게리는 한국인 남편과 필리핀 여성 사이의 혼혈 아가를 본다. 훗날 그 애가 길 잃은 아이처럼 우울하게 다리 위에 서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땐 게리 존슨의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한다. 게리는 다시 원장에게 뛰어간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미테이션이면 뭐 어때? 


작가는 몽골이 한국이 겹쳐 보이는 곳이자, 분단된 한국을 타자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소설 읽기도 마찬가지로 이야기 속에 나를 투영해보고 나를 타자의 시각으로 되돌아 보는 것 아닐까? 아무튼 이 책은 아주 잘 쓰인 소설집이다.

그가 나타난 뒤로 나는 하루도 몸에서 총을 떼어놓고 지내지 못합니다. 영혼이 서서히 망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걸 느낍니다. 영혼은 명백한 범죄 앞에서보다 모호한 죄의식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지요. 영혼은 죄와 짝패가 아니라 몸과 짝패이니까요. 땡볕의 낮꿈과 같은 검질긴 악몽 속에서,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같은 불안 속에서 우리는 거울을 들여다보듯 제 영혼을 만납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미친개를 잡을 생각입니다. 하여 놈의 사지를 지탱하는 여덟 가닥 힘줄을 끊어놓을 생각입니다. 아아, 두렵습니다. 이방인들이 돈을 믿을 때 우리 초원 사람들은 길조를 믿었지요. 우리는 저 굴곡 없는 대지를 오가면서도 일진을 점치고 움직였지요. 초원으로 흘러가버린 저 종소리처럼 다 옛말이 되어버린 이야기이지만. 40p

졸업한 제자와의 스캔들로 여고 미술교사를 그만두었을 때 그의 나이 마흔둘이었다. 제 인생에서 어떤 기회든 마지막 한번밖에 남지 않았다는 절박감이 밀려오는 나이였다. 격정적인 사랑은 시간이 훼손한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는 제의 같고 탈출구 같았다. 이듬해 그는 프랑스로 떠났다. 아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시 아내는 남편과 물의를 일으킨 아이가 유학을 떠나서 모든 일이 수습된 것으로 믿고 그를 어렵게 용서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아내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사랑에 대한 진실만을 폭력처럼 휘둘렀을 뿐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았다. 당시 아내가 침묵을 깨고 무슨 짓이든 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매달리거나 저주를 퍼부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는 가끔 그때를 돌이켜보곤 했다. 아마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을 유형 보낸다는 심정으로 떠났다. 그는 끝없는 자학을 통해 자신의 부도덕을 잊고자 했고 정화되길 원했다. 82p

그리움 같은 것은 그들에게 위험천만하고 한심한 언사이다. 당장 재앙이라도 불러올 주문처럼 여긴다. 내 그리움이 아무리 심미적일지라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정치적인 제동기를 가지고 `그리움`을 사용했다.
"추억이 있어야 그리움이 있을 텐데, 저처럼 젊은 세대는 북한이나 북한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나 실감이 없지요."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자르갈 시인의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확연해졌다.
"추억이 없어도 그리움은 오는 법이죠. 우리에게 그리움이 없다면 시도 없을 테지." 134p

내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내 품으로 쓰러졌다. 그러더니 마음먹고 울기로 작정한 여자처럼 소리내어 울었다. 나는 엉거주춤 서서 굴뚝 연기 잦아든 게르를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어떤 극심한 외로움과 함께 부끄러움이, 그리고 두 여자를 두고 어떤 질투심마저 들었는데 그 심리상태가 어디에서 연유하고 딱히 무어라 명명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워한 듯 그녀를 품에 안고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진심으로 자문했다. 1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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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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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들은 살며 숱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자전거를 타다 종아리에 물리적으로 생긴 상처도 있을 것이고, 인간에 실망하여 가슴으로 겪는 상처도 있을 것이다. 상처는 치유되어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때론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을 수도 있다. 


한강은 데뷔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상처투성이 줄글로 일관하는 작가다. 한강은 글로써 아파한다. 



『회복하는 인간』은 동생의 발목 상처로부터 시작한다. 동생은 접질린 발목에 쑥뜸을 뜨다 생긴 화상과 이어진 감염으로 고생한다. 동생에겐 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여성적이며 아름다워서 동생이 열등감을 가질 법도 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완벽해 보이던 언니는 동생의 결점들을 부러워했다. 언니와 동생은 사이가 좋았지만 언니가 숱한 유산을 겪으며 동생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언니는 동생의 건강함이 부러웠다. 언니는 결국 병을 앓고 말라가다 죽는다. 발목의 접질림은 언니를 묻고 산을 내려오던 날 생긴 거였다. 오래전 언니는 동생 때문에 이마를 찍혔을 때 우는 동생을 달래며 이렇게 말했었다.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언니의 죽음 이후로 모든 게 견디기 힘들어졌을 때 동생은 습관처럼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자전거와 함께 쓰러진다. 그녀는 자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중얼거린다. 


그녀의 발목 상처엔 새 살이 돋고 있었다. 흉터는 남을지언정 결국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어떠한가? 마지막 동생의 중얼거림은 마치 자책같이 들린다. 언니가 날 멀리한다고 나도 언니를 멀리했어야 했을까?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언니와 끝내 화해하지 못 했던 후회로 그녀는 자신도 차라리 죽길 바란다. 마음의 상처로부터 회복되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는 상처도 있을 것이다. 



『훈자』는 무신경하고 무능력한 남편과 사는 여자가 꿈꾸는 곳이다. 회식 자리에서 스치듯 들었던 아름다운 훈자라는 도시에 한 번쯤 가보리라고 생각한다. 육아와 일에 치이는 그녀가 습관처럼 하는 일은 인터넷에 훈자를 검색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마음속 도피처 훈자도 점점 개발되어 가고 변해간다. 아이는 다시 교통사고를 겪는다. 급하게 사고 현장으로 차를 몰며 내뱉는다. "제발, 잘못되지 말아줘"

이 외침은 아이를 향한 것이지만 변해가는 자신의 이상향 훈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여자는 끊임없이 훈자를 생각했다. 이상향을 꿈꾸지만 벗어날 수 없는 삶에 짓눌리는 모습은 우리들 삶의 보편적 모습과 다르지 않기에 안타깝다.



『에우로파』는 여성성을 지닌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인아를 만나 자신의 숨겨진 여성성을 깨닫는다. 

그동안 나는 언제나 너를 특별하게 생각했어. 지금 이 순간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내가 너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하지만 그는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으면서도 남자의 몸으로 인아를 안고 싶어 한다. 인아는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질 수 없을 차가움


목성과 에우로파는 인아와 나를 상징한다. 서로를 맴돌지만 기묘한 거리가 유지되는 관계. 그래서 결코 깊게 서로를 만질 수 없는 관계. 내가 언젠가 그녀에게 깊게 상처 입히리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충동을 억누르고 목성의 달처럼 남으려 한다. 



『밝아지기 전에』는 소설을 쓰는 그녀의 이야기다. 그녀에겐 한때 직장 선배였던 은희 언니가 있다. 은희 언니는 복막염을 앓던 동생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에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를 떠돌며 여행한다. 그녀는 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 사이 남편과 대부분의 사람이 떠났고, 은희 언니는 남았다. 둘은 서로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걸 알기에 말없이 의지할 수 있다. 은희 언니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여행지로 그녀를 초대한다. 그녀는 은희 언니를 모티프로 한 소설을 시작하지만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첫 문장에서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은희 언니는 뎅기열로 죽는다. 그녀는 소설 첫 문장을 '그녀가 회복되었다'로 바꾼다. 이렇게 가끔 우리는 이루지 못하는 것들을 글로써 열망한다. 



『왼손』은 한 남자의 제멋대로 움직이는 왼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왼손은 자기 멋대로 움직여 막말하는 상사의 입을 틀어막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첫사랑의 얼굴을 갑자기 쓰다듬기도 한다. 이 왼손은 통제되지 않은 욕망의 발현이다. 왼손으로 인해 첫사랑과 가까워지지만, 결국 자기를 망가뜨리게 된다. 제어되지 않는 욕망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자신을 죽이게 된다. 



『노랑무늬 영원』은 친구 아들이 키우는 도마뱀 이름이다. 소설 속 화자는 화가였지만 교통사고로 왼손이 망가지고 이어지는 무리한 재활로 오른손의 기능까지 잃는다. 아내가 예술은커녕 일상생활도 할 수 없으므로 밥벌이에 모든 집안일까지 해야 하는 남편도 삶에 지쳐 있긴 마찬가지다. 남편의 인내심이 바닥에서 더 내려갈 곳이 없을 즈음 대학교 동창에게 연락이 온다. 자신이 사는 동네 사진관에 너의 사진이 걸려있다며. 동창이 사는 곳으로 찾아가 사진을 찾고, 그 사진을 찍어준 사람이 대학생 때 북한산을 우연히 같이 올랐던 남자였음을 기억한다. 내려올 땐 발을 심하게 접질려 그 남자에게 업히고 부축 받아 집까지 돌아왔었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순간 그 남자의 안부가 아주 궁금하다. 수소문 끝에 알아낸 그의 소식은 2년 전 그는 미국 이민 생활 중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다. 2년 전 그녀가 교통사고로 생사를 헤맬 때 그는 총에 맞았다. 영원히 비껴가고 말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소식을 듣고 나서 아이러니하게 살고 싶다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방치된 작업실에 가서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물감을 강하게 빛나는 불순물 없는 노랑색으로 배합하고 손을 물감에 적신다. 그리고 종이에 손바닥 자국을 찍는다. 친구 아들이 키우는 도마뱀 '영원'의 잘린 앞발이 새로 돋아난 것처럼 그녀의 손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 상처는 더 이상 영원(永遠) 하지 않고 그녀의 노랑무늬는 영원하다. 



모든 이야기 속에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나온다. 『회복하는 인간』의 그녀는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념하지만 『밝아지기 전에』의 그녀는 소설로 상처를 딛으려 한다. 『왼손』의 그는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안기며 자신도 상처 투성이가 된다. 『노랑무늬 영원』의 그녀는 상처를 딛고 자신의 방식으로 일어선다. 상처도 제 각각이고 그에 대한 반응도 제 각각이다. 『노랑무늬 영원』의 그녀가 가지고 있던 노 화가 Q의 도록집에서 Q는 시간이 해결해주겠지요 라고 말했다. 인간에겐 시간을 감내하는 힘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도롱뇽 영원처럼 상처가 쉽게 아물고 살이 재생되지 않는다. 우리는 상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애초에 쉽게 회복할 수 없는 인간들은 시간을 빌려 상처를 지긋이 직시하고 단지 견뎌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 달이 더 지났지만 그 여자는 도움을 청할 제삼의 사람을 찾아내지 못했다. 남편을 설득해 상담사에게 보내지도 못했다. 남편을 설득해 상담사에게 보내지도 못했다. 다만 아이와 함께 있는 짧은 시간, 부족한 재능을 오직 열의로 보상하려 하는 희극배우 같은 사람이 되었다. 농담을 던지고 발을 구르고 깔깔 웃는 동안, 불쑥불쑥 살얼음처럼 얇고 날카로운 행복을 느꼈다. 이따금 자신이 은밀히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오히려 아이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쳐온 것은 아닌지 곰곰이 자문했다.
51p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69p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른 뒤 인아는 이어 물었다.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태어났다면 뭘 했을 것 같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다 살아낼 수 있다면 뭘 할 것 같아?)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미칠 듯 뜨겁게 치밀어 오른 말들을 내가 입에 담았다면, 우리는 처음으로 싸웠을지도 모른다. 그게 마지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답을 네가 나한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닥쳐. 닥치라고. 93p

조만간 또 떠날 거야. 돌아와보니까 그래야 한다는 걸 알겠어. 106p

저물 무렵에야 돌아와 제대로 씻지 못하고 잠들었다. 윤이가 부르는 소리, 깨우지 말라고 동생이 달래는 소리를 들은 것이 생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얼핏 잠이 엷어질 때마다 숲의 산책로가 어른거렸다. 하루에 두 번, 움직일 수 있는 한 걸었던 그 길가에 흰 질경이꽃이 핀다. 여린 잎들이 버드나무에 돋아난다. 어지러운 햇빛이 돌아온다. 희거나 목이 길거나 부리가 노란 새들이 온다. 생명이 온다. 조금 더 버티면. 후회와 고통을, 깊게 찌르는 자책을, 안 지워지는 얼굴을 등지고 조금 더. 128p

그 과정에서 어떤 부도덕도, 죄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일뿐이었다.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며, 그도 그때의 그가 아닌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을 따름이었다. 외딴섬에 단둘이 표류된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질식시켰다. 그렇게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갔다. 서로에 대한 배려, 이타적 관계, 우정, 동료의식 들은 강 저편에 남았다. 애초에 완전한 타인이었다는 것- 그 한 가지 명료한 사실만이 이편의 강가에 남았다. 243p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심성이 여리고 다정했었다. 그러나 닳아간다. 타이어가 닳는 것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조금씩, 닳아간다는 것을 의식 못하면서 조금씩, 바퀴가 미끄러워진다. 미끄러워지고, 미끄러워져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 2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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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e 2016-05-05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 돌 얘기가 없네요. 전 그 단편이 제일 좋았습니다ㅎㅎ

쥬드 2016-09-12 23:17   좋아요 0 | URL
앗 파란 돌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시 찾아봐야겠네요 ^_ㅜ
 
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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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명민은 인간 극장을 즐겨 본다고 한다. 인간 극장은 배우가 나오지 않는 대본 없는 이야기다. 연기와 별 관련 없어 보이는 인간 극장에서 연기를 배운다고 한다. 어째서일까. 극이 아닌 실제 생에선 기쁨과 슬픔은 과장되는 법 없이 담담하다는 게 그 이유다. 드라마에서 크게 당황하거나 슬퍼할 일에도 사람들은 의외로 의연하다. 그리고 쉽게 절망하지 않고 삶을 이어나간다. 김명민은 이런 진짜 삶의 모습을 캐치하고 연기에 응용시킨다는 이야기였다.


소설집 대성당은 인간 극장과도 같은 이야기들의 묶음이다. 『깃털들』에선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 않던 부부가 직장 동료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는다. 그곳에서 직장 동료 부부의 아이를 보는데 끔직이도 못생겼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동료 부부는 어쩐지 불쾌한 외양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부는 아이를 갖고 싶다 생각한다. 행복은 남의 눈으로 재단할 수 없는 온전한 자신의 문제였음을 은연중에 깨달았던 것일까. 그런데 정말 재밌는 건 이야기가 온전히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를 낳고 나서 아내는 뚱뚱해진다. 부부는 권태에 빠지지만 화자는 두루 평안하다 말한다. 동료 집의 공작새 조이는 날아가 버렸다. 물질도 생각도 영속되는 건 없다. 작가가 진짜 말하고 싶은 건 인생이 가지는 의외성, 불영속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셰프의 집』은 갑작스럽게 셋집을 비워줘야 하는 부부의 이야기다. 집을 비워주고 다른 집을 구해야 하지만 이는 별거하던 부부가 다시 서로를 긍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보존』에선 남편의 실직, 냉장고의 고장이 이어진다. 이래저래 불운하지만 부부는 일단 새 냉장고를 사러 경매장에 가야 할 뿐이다. 


만사형통의 행복한 삶이었는 데 무슨 까닭에선지 그저 맥주만 마시며 알코올 중독이 되고, 필름이 끊기는 게 술을 많이 마신 내 탓이 아니라 술에 물을 안 넣고 얼음을 넣은 탓이라는 괜한 핑계를 대기도 한다.  (『내가 전화를 거는 곳』


이렇듯 본질도 불분명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생에서 어차피 해답은 없다. 큰 기쁨, 큰 슬픔, 큰 재미도 없는 인간 극장 같은 소설집 대성당에서 사소한 불행들을 살펴보고 견지해야 할 삶의 태도를 확인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진짜 보는 법을 알려주는 맹인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못생긴 아기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버드와 올리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아마 그들은 못생겼다고 해도 어쨌든 괜찮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아기니까. 지금은 이런 시기를 거치는 것뿐이지. 조만간 다른 시기가 찾아 올거야. 이런 시기도 있고 다른 시기도 있는 것이니까. 결국에는 그러니까 모든 시기가 지나가고 나면, 모두 괜찮아질 거야.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39p

"어쨌거나 뭔가 하긴 해야지. 일단 이것부터 해보는 거야. 만약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그게 인생이야. 그렇지 않아?" 1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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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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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참으로 불행하다고 생각될 때, 가진 것도 없이 태어났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게 엉망으로 돌아갈 때. 그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많은 청춘들이 이런 시간에 놓여있다. 이런 청춘들에게 많은 걸 가진 사람이 청춘은 원래 그렇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죽빵 한 대 날려주고 싶지 않을까? (ㅎㅎㅎ) 


그럼 이런 식의 위로는 어떨까. 내 얘기를 들어봐. 나도 너만큼 힘들어. 그런데 그냥 어떻게든 살아.


이 책은 김애란이 20대 중반에 쓴 소설들의 모음집이다.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대부분이 20대이며 모두 가난하고 답답한 현실을 살고 있다. 


『도도한 생활』은 가난한 집에서 자란 여자의 이야기다. 만둣집을 하는 집에서 어머니는 딸을 위해 피아노를 사줬다.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가세는 기울지만 어떤 이유인지 어머니는 피아노는 팔지 말자고 한다. 딸의 반지하 자취방에 옮겨진 피아노는 집주인의 엄포로 절대 울리는 법 없다. 비가 엄청나게 오는 날 빗물이 사정없이 반지하로 스며들고, 설상 가상으로 만취한 언니의 전 남자친구가 집에 찾아와 쓰러진다. 물이 정강이까지 차오르는 순간 화자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을 두드린다. 도저히 도도해질 수 없는 삶의 밑바닥에서 피아노 음정이 체념처럼 도-도-하며 울린다. 


『침이 고인다』는 삶에 찌들어 사는 말단 학원 강사의 이야기다. 원룸에서 자취하는 그녀에게 어느 날 후배가 하룻밤만 재워달라며 찾아온다. 하룻밤을 지내보니 당분간 같이 지내는 것도 괜찮지 싶어 후배에게 일감을 주며 같이 지내게 된다. 피곤한 생활에서 위안이 돼주는 후배였지만 박봉에 때로 모멸감까지 주는 학원에서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후배와의 동거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서로를 조금씩 견디는 일이다. 더 견디기 힘들어졌을 때 그녀는 후배에게 어색하게 이별을 통보한다. 짐은 천천히 정리하라 말했지만 샤워를 끝내고 나온 순간 이미 후배는 집에 없다. 시간이 얼마 지나 그녀는 후배가 절반을 떼어 준 인삼껌을 발견한다. 그것은 후배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가 남겨준 마지막 한쪽의 절반이었다. 후배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껌 한 통을 주고 떠났다고, 그래서 껌을 씹으며 어머니를 기다리고 찾았지만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면 입에 침이 고인다고 했다. 후배가 그녀의 집에서 떠나야 했을 때도 침이 고였을까. 한 사람을 받아들일 때 언젠가 다시 떠나보내야 하는 걸 안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다. 그녀는 후배가 준 인삼껌 반 쪽을 씹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야기는 이별의 방법과 이별 후 느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성탄 특선』은 가난해서 크리스마에 섹스를 하지 못 했던 커플의 이야기다. 4년 차를 맞는 커플은 한해는 1년 차엔 여자가 가난해서, 2년차엔 남자가 가난해서, 3년 차 땐 잠시 이별했던 때라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해본 적이 없다. 올해는 둘 다 주머니 사정도 풀렸으니 로맨틱한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자 다짐하지만 방을 예약하지 않아 밤새 러브호텔 방만 찾아 헤매다 결국 각자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간다. 가난해서 누려본 적이 없었고, 누려본 적이 없으니 누리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도 모를 정도로. 이 커플의 이야기가 해학적이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 안타까운 커플이 내년 크리스마스엔 꼭 근사한 러브호텔에서 섹스할 수 있기를 바란다. (ㅎㅎ)


『자오선을 지나갈 때』는 노량진 재수생들의 이야기다. 노량진은 누구나 잠시 지나가는 곳으로만 생각하지 영영 머물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화자는 취직이 안 돼서 보습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잠시 스쳐갈 뿐이라고 생각했던 노량진역을 지나며 왜 여전히 자신은 '지나가고 있는 중'인 걸까 생각한다. 그리고 7년 전 재수 생활 때 힘이 돼줬던 남자아이를 추억한다. 그때 빽빽하게 늘어선 수강 신청 줄에서 밀려날 때 손을 잡으라던 외침이 문득 떠오른다. 


『칼자국』에선 칼 하나로 국수를 끓이며 온 가족을 먹여살린 어머니를 잔잔하게 회고하고, 『기도』에선 취업 준비생과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중년의 노동부 직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두 절박한 삶 속에서 기도하듯 살고 있음을 말한다.  


『네모난 자리들』에선 두 개의 방이 나온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날 키웠던 어둡고 아무것도 없는 빈방, 그리고 짝사랑했던 선배 살았던 방. 선배가 휴학을 하고 찾아간 그의 방엔 아직도 불이 켜져 있다. 이 모든 부재 속에서 우리는 존재를 다시 확인한다. 


『플라이데이터리코더』는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 자란 어린아이가 추락한 비행기의 블랙박스를 어머니라 생각하는 이야기다. 물론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삼촌의 거짓말 덕이었지만. 어찌 됐든 아이는 철 상자를 정말 어머니처럼 여기며 하지 못 했던 이런 말 저런 말을 한다. 하지만 블랙박스를 조사원들이 수거해야 하므로 어머니 블랙박스와도 또 이별해야 한다. 눈물 흘리며 아이는 "잘 가요. 엄마, 잘 있어야 해요."라고 말한다. 훗날 조사단이 블랙박스 안의 녹음물을 해독했을 때 대부분은 잡음뿐이라 해독할 수 없었고 조종사의 마지막 메시지인 듯한 말 한마디를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안녕"


모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결핍을 겪고 있다. 쉽사리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단지'라는 웹툰이 있다. 그 웹툰은 자신의 비참했던 가족사를 이야기하는데 많은 독자의 공감을 통해 지지받는다. 만화든 문학이든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건 같은 경험이다. 공감으로 위로한다. 이 단순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명제를 20대의 김애란은 아주 잘 깨닫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시대를 고스란히 미문(美文)에 담은 이 소설집은 아마 앞으로도 두고두고 읽힐 것이다. 

엄마는 장사를 끝낸 뒤 작은방에 누워 피아노를 청했다. 나는엄마의 발 박자에 맞춰 `따오기`나 `오빠 생각`을 연주했다. 허공에서 발 박자를 맞추던 엄마의 양말 앞코는 설거지물에 진하게 젖어 있었다. 그 발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엄마의 젖은 마음 한 조각 같았다. 16p

불규칙한 내신 등급과 달리, 내 브래지어 후크는 꾸준히 한 칸씩 늘어났다. 피아노는 가게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잊혀져 갔고, 나는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이불을 이고 집을 떠나온 이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복작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방에서, 이 거리에서, 이 시장과 저 공장에서, 이 골목과 저 복도에서, 그늘에서, 창 안에서, 세상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 도- 하고 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사람들 저마다 자기도 모르게 까닭 없이 낼 수 있는 음 하나 정도는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하고. 어쩌다 어릴 때 음악 따윌 배워 그 울음의 이름을 알게 됐으니, 조금은 나도 시대의 풍문에 빚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19p

첫 월급을 탔을 때 누구를 만나, 어떻게 돈을 써야 할지 몰라 당황했었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는 일만 하다 죽을 수는 없다고, 매일 어깨에 의자를 이고 등교하는 아이처럼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 순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손가락이 나뭇가지처럼 기다랗게 자라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나는 손가락만 진화한 인간 타자수가 되어 `다음 중 맞는 답을 고르시오`라는 문장을 끊임없이 치고 있었다. 그리고 산더미만 한 문제지를 들고 인쇄소에 찾아가면, 그걸 전부 나더러 풀라는 것이었다. 나는 건포도를 오물거리며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하고 안도했다. `8월에는 동대문에 옷을 사러 가야지. 화장은 언니에게 배우고, 아르바이트는 반드시 집 밖에서 하는 걸로 해야겠다.` 도 다음엔 레가 오는 것처럼 여름이 끝난 후 반드시 가을이 올 것 같았지만, 계절은 느릿느릿 지나가고 우리의 청춘은 너무 환해서 창백해져 있었다. 33p

어쨌든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그녀는 그날 밤, 후배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어쩌면 그 한마디 때문에 후배와 살게 된 건지도 몰랐다. 후배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꾸했다. 응.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 61p

오늘은 일 년 중 가장 고요한 도시를 만날 수 있는 날이다. 새벽 1시, 하나 둘 꺼져가던 불빛도 보이지 않고 거리의 사람들이 사라질 때- 서울은 고장 난 멜로 디 카드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사내는 가짜 아디다스 추리닝을 입고 옆구리에 비빔면을 낀 채 하늘을 바라본다. 낮게 낀 구름 사이로 전신줄이 오선지처럼 뻗어 있다. 사내의 얼굴 위로 눈송이가 떨어지며 스륵 녹는다. 악보를 지나 가장 낮은 음을 향해 내려가는 음표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만지면 따뜻할 것 같은 노란 눈이다. 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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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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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소설들은 아니다.


표제작 바늘은 문신을 해주는 여자의 이야기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강인한 문신을 요구한다. 자신의 몸피에 강인한 그림을 새기면 마치 자신도 그처럼 강해질 거라 믿는다. 문신을 시술하는 그녀는 추하다. 그래서 허벅지에 문신을 시술할 때 그녀의 숨결이 사타구니에 닿으면 남자들은 발기할지언정 그녀에게 성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래전 연락이 끊긴 어머니의 소식을 경찰로부터 듣는다. 미륵암 현파스님을 어머니가 살해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경찰은 자연사 같은데 괜한 얘기를 해서 일을 복잡하게 한다고 한다. 어렸을 적 여자는 간질 발작을 앓아 미륵암에 어머니와 기도를 드리러 가곤 했다. 여자는 그곳에서 지내는 고양이들에게 시기심을 느낀다. 고양이들은 아름답고, 신도들이 주는 생선과 고기를 마음껏 먹고 있었다. 여자는 새끼 고양이를 어미에게서 빼앗아 변기 속으로 던져 죽인다. 여자의 간질 발작은 나았지만 어머니는 현파 스님에 대한 연정에 여자를 버리고 미륵암으로 간다. 어머니는 왜 현파 스님을 죽였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마트 육류 코너에서 둥그런 모양의 고깃덩어리를 보고 스님 머리를 연상한다. 그리고 스님 머리통에 문신을 새기는 상상을, 고운 여자가 스님 머리를 잡고 정사하는 장면을 상상을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의 자살 소식도 듣는다.


전쟁 기념관을 찾아간 그녀는 전시된 무기들을 보고 스님을 죽이는 상상을 한다. 한편 그곳에서 가끔 마주치던 같은 라인의 801호 남자를 본다.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하러 미륵암에 다녀오고 며칠 지나 801호 남자가 806호로 그녀를 찾아온다. 여자와 달리 남자는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다. 801호 남자는 오히려 그 아름다움 때문에 군대에서 고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801호 남자는 강함을 원한다. 그 강함의 표상으로 강력한 무기 문신을 원하고 있었다. 미륵암에서 가져온 어머니의 바늘들은 끝이 전부 잘려 있었다. 예전에 어머니는 그녀에게 바늘 끝을 잘게 잘라 매일 마시는 녹즙에 넣으면 아무런 외상도 남기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남자의 가슴에 바늘을 새겨준다.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 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33p


마치 꼽추와도 같은 추한 여자와는 아무도 섹스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녀의 바늘은 생살을 뚫고 피를 내고 그 틈으로 염료를 스며들게 한다. 반대로 어머니는 바늘로 고운 한복에 아름다운 수를 놓는다. 아름답지 못해 느끼는 열등감은 새끼 고양이를 죽이게 한다. 어머니는 자신을 버리고 현파 스님에게 갔다. 어머니와 스님에 대한 분노는 차갑다. 상상 속에서 스님을 살해한다. 여자의 욕구는 억압되어 있다. 억압된 욕구의 분출은 단적으로 그녀의 육식 취향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스님 머리를 잡고 정사하는 상상으로 표상화된다. 소설 속 남자들은 모두 강해 보이는 문신을 원하고 있다. 강함에 대한 열망은 반대로 남자들이 결코 강하지 않다는 말이다. 가녀린 바늘은 결국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였다. 그녀는 약한 남자들에게 강한 바늘로 문신을 새긴다. 그리고 남성성을 원하는 남자에게 강한 무기를 그러나 역설적으로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바늘을 새겨 넣는다.


천운영의 소설바늘은 추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억압된 욕망의 분출을 이야기한다. 이런 기조는 다른 단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월경에서는 성장이 멈춘 여성성이 부족한 여자와 농염한 은하수 계집이 대비된다. 가질 수 없는 여성성에 대한 열등감은 성관계를 관음 하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포옹에서는 곱사등이 여자가 매표소 일을 하며 우연히 본 남자를 자신의 약혼자라고 망상을 한다. 그리고 그 남자와 결혼을 약속했다고 가족들에게 허언한다. 또 다른 여자는 기댈 곳이 전혀 없는 화장품 판매원이다. 그녀는 집주인 할아버지에게 몸을 허락하고 50만 원을 받는다. 그녀는 어렸을 적 싸움소 훈련꾼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 아버지에게 심한 매질을 당한 후에 그녀를 위로해주는 건 슬픔에 민감한 소 '태풍이'였다. 아버지가 총애하는 강한 싸움소 '돌쇠''태풍이'를 뿔로 받고 괴롭힌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을 '돌쇠'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심한 매질을 당한 다음날 '돌쇠'는 힘 한번 못 쓰고 무기력한 패배를 당한다. 그 패배로 아버지는 싸움소 네 마리를 잃는다. 그날 밤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돌아와 '태풍이'와 그녀에게 채찍질을 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잠든 후 '태풍이'를 풀어주고 외양간에 불을 지른 후 집을 나온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는 폭력은 대물림됨을, 그리고 폭력의 사슬을 끊는 건 역설적으로 다른 폭력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반면 남녀의 성 정체성을 뒤집은 묘사로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작품들도 있다. 에서는 남자의 할머니는 흡사 마녀와 같이 묘사된다. 남자의 할머니는 육식을 즐겨 한다. 결혼하겠다는 남자의 말에 느닷없이 송치를 구해오라 한다. 남자는 늘 할머니를 불편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초식동물 같은 미연을 더욱더 갈구한다. 유령의 집에서는 남편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부인이 더 이상 참지 않고 목발로 남편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행복 고물상에서는 부인이 남편에게 폭력을 일상적으로 행사하는 설정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행하는 가정 폭력을 미러링 한다. 이렇게 역전된 성 인식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준다. 작품을 읽는 어떤 여성들은 일련의 통쾌함 마저 느낄지도 모르겠다.


소설집 내 모든 작품에서 사람들은 가난하다. 가진 것이 없어 늘 무언가를 열망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다. 눈보라콘은 부라보콘을 열망하는 이야기다. 늘 자신의 앞에서 놀리듯 부라보콘을 먹는 소녀를 보고 부라보콘을 먹는 상상을 한다. 부라보콘은 가난으로 인해 가지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눌려 있던 사춘기 소년의 성적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소년은 부라보콘을 먹는 상상을 하다 팬티에 사정한다. 소년은 부라보콘을 먹을 돈이 없어 그나마 가끔 사기 쳐 얻어낸 돈으로 짝퉁인 눈보라콘을 먹을 뿐이었다. 소년의 친구 '하봉'은 그 돈으로 가짜 나이키 스티커를 모으는 데 집착한다. 어느 날 소년은 부라보콘을 먹던 소녀를 만난다. 소녀와 이야기해보니 소녀가 먹던 것은 부라보콘이 아니라 눈보라콘이었다. 소녀는 가짜 휘발유에 가장 많이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정답은 진짜 휘발유였다. 진짜를 향한 열망 그 자체가 삶에선 진짜인 것이다. 부라보콘을 원하지만 먹지 못하고 반값인 눈보라콘만 먹을 수 있었을 뿐이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 소년은 눈보라콘 속에서 늘 행복했다고 소회한다. 영도를 떠나는 날 소년은 그렇게 성장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소설들은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의 소설 안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은 항상 대비되어 있다. 빈곤층과 추한 여자들의 욕구는 억압되어 있다. 육적(肉的) 묘사는 적나라하지만 문장은 건조하다. 이 불편함 들 속에서 삶은 폭력적임을 확인한다. 결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아니다. 그러나 미추의 대비와 삶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역설적 기표들이 숨어있는 이 문장들은 충분히 미학적이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 뭉뚝한 발가락......
남자가 말한 전혀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게 하는 이유들이다.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추하다는 추상어가 명백히 눈앞에 펼쳐져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나는 말까지 더듬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 바늘 끝에서 나오는 문신을 보고 추함과 연결시키는 사람은 없다." 13p

남자의 가슴팍에 새겨진 마산대표의 `ㅁ`자는 글자라기보다는 작은 액자처럼 보인다. 육체에 새겨진 글귀는 그걸 새겼을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노력`이나 `저축`같은 글귀가 그렇다. 한번 열심히 잘살아보겠다는 의지와 결의가 살을 파는 아픔을 이겨내게 만들었을 것이다. 역으로 문신에는 앞으로 감수해야 할 삶의 시련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육체와 그 위에 새겨진 글귀 사이에 공존하는 어떤 것. 그것은 아름다운 상처, 혹은 고통스러운 장식이다.
남자의 작은 액자에 호랑이를 한마리 그려준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로 눈을 부라리고 있다. 참숯을 곱게 갈아 몸통 깊숙이 줄무늬를 새겨넣는다. 사각형 안에 갇힌 호랑이는 고작 마산대표가 아니라 조선시대 무관을 대표하던 흉배문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섯 개의 사각형 안에는 일, 삼, 팔, 비, 똥, 다섯 개의 광을 그려넣는다. 남자는 어느 화투판에서도 느긋할 수 있는 오광을 몸 안에 숨기고 있게 되었다. 인생에 있어 그렇게 막강한 숨긴 패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여유롭겠는가. 27p

그러나 나는 미연과 함께 살고 싶다. 아이를 낳아 목말 태우고 미연과 함께 숲에 가 나무냄새도 맡고, 미연이 해주는 풋풋한 음식을 먹으며 살고 싶다. 내 욕망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숨쉬며 지내다가 자신의 숨소리를 듣게 될 때 느끼는 부자연스러운 인식 같은 것이었다.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을 때 편안한 숨쉬기 속도에서 어긋나버려 몹시 답답하고 힘들게 숨을 고르는 것처럼. 아무리 자연스럽게 숨을 쉬려 해도 폐활량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는 것처럼.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아야만 자연스럽게 숨을 쉴 수 있는 법이다. 나는 미연을 원하지 말아야 했는지 모른다. 52p

하지만 나는 눈보라콘을 좋아한다. 눈보라콘 속에는 부라보콘을 향한 욕망과 열망이 들어 있다. 눈보라콘도 나처럼 부라보콘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눈보라콘이 부라보콘의 대용물밖에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눈보라콘에는 다른 가짜들과는 구분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눈보라콘에게 동지애까지 느낀다. 99p

파랗게 질린 어머니의 얼굴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심벌즈 소리가 멎었다. 그때까지 나느 현실세계가 아닌 먼 우주 공간을 날고 있었던 것 같다. 교문을 나서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침묵이 슬픔 때문인지 화가 났기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내 어깨를 잡은 어머니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을 뿐. 어머니는 목도리를 벗어 벽에 걸고 나서야 어정쩡하게 서있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듯 확실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그 말은 내 심장 깊숙이 와 박혔다. 그것은 내겐 너무 가혹하게 들렸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내가 그런 일을 하지 못했을 거라는 건지 아니면 몹시 혼이 났을 거라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어머니한테 영원히 버림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눈보라콘이나 부라보콘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모든 것은 눈보라콘을 먹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니까. 104p

모든 것이 다 잘 풀리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희망에 가득 찬 순간 어두운 소식을 접한 것이다. 하지만 죽음도 위안이 될 수 있다. 불행에 단련된 사람은 제 앞에 닥친 희망을 낯설어하게 된다. 영감의 죽음은 할멈에게 채워진 족쇄를 열 희망의 열쇠일 뿐이다. 할멈은 양로원에서 편안한 노후를 맞을 것이다. 나는 할멈을 위안하는 척하며 내 가슴을 쓸어내었다. 1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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