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 제6회 채만식문학상, 제10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전성태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은 모두 10편인데 그중 6편이 몽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몽골에 2차례 방문했었고, 2005년에는 6개월 간 체류했었다. 이때의 경험과 영감이 고스란히 소설집에 녹아 있다. 


몽골은 1992년 사회주의 체제를 버리고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나라고, 현재도 초원에서 생활하는 유목민과 자본을 좇는 도시인의 삶이 혼재되어 있는 나라다. 표제작 『늑대』는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다. 몽골의 초원에도 검은 혓바닥 같은 아스팔트가 깔리기 시작한다. 급격한 자본주의의 유입 시기에 동물과 아이들을 부려 부를 축적한 서커스 단장 노인은 늑대 무리에서도 특별한 검은 늑대를 생포하기 위해 추격한다. 그리고 단장은 자신의 어린 벙어리 여자에게 집착하고 그녀와 주위 남자들을 의심한다. 인간도 자연도 제 손아귀에 소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탐욕의 끝은 허무함이다. 검은 늑대는 죽고 벙어리 허와는 촌장의 딸 치무게와 금기를 넘어선 사랑을 한다. 그 순간 단장의 총성이 울린다. 총은 인간의 탐욕이며 동시에 폭력이다. 그것은 결국 자연과 인간 모두를 망가뜨리고 만다.


1992년 이전에는 공산주의 진영이었기 때문에 주로 북한 사람들이 몽골에 방문했고, 이후로는 남한 사람들이 방문하여 몽골 사람들은 두 한국인들에 대한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 『두번째 왈츠』는 한국인 소설가가 오래전 북한 사람들이 몽골을 떠날 때 홀로 남아 정착한 어느 북한 여자를 찾는 이야기다. 사실 북한 여자는 핑계에 불과하고 매력적인 몽골 여성 냐마와 여정을 함께 하는 게 속내다. 북한 여자를 찾는 동안 몽골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몽골 사람은 북한 사람도 남한 사람을 물어보고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을 자신들을 통해 알려 한다고 말한다. 이건 마치 중매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궁금해하며 물어보는 남녀 같다. 추억이 없어 그리움도 없다는 화자에게 몽골의 노 시인은 추억이 없어도 그리워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북한 여자를 찾아가는 일은 중요하지 않으니 둘이서 돌아가자 냐마에게 말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냐마는 그녀를 꼭 찾아야겠다며 끝까지 북한 여자를 찾는다. 결국에 북한 여자의 마지막 행적을 찾아냈지만 그녀는 사망한 뒤였고 냐마는 서럽게 운다. 화자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이 몰아친다. "우리가 끝내 알 수 없는 것들을 다 무어라 불러야겠는가?" 몽골 노 시인의 중얼거림에 끝내 알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매는 인생의 비의가 담겨있다.


몽골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나머지 작품들도 저마다의 깊이와 해학이 있다.『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탈북자들이 강을 건너는 이야기다. 강을 건너야 하는 아기는 아낙의 등위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강 건너로 인도하는 길잡이 여자 등 뒤의 아기는 며칠 전 굶어죽었다. 강을 사이에 둔 이편과 저편 어느 곳에서도 낙원은 없는 엄혹한 현실을 말한다.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다』에선 전두환 정권 시절 아이들의 성장담이 잔잔하게 읽히고, 『이미테이션』에서는 단지 혼혈의 용모만 가졌을 뿐 순수 한국인인 게리가 사는 이야기를 통해 진짜를 좇는 이미테이션 인생을 말한다. 소설 종반에 게리는 한국인 남편과 필리핀 여성 사이의 혼혈 아가를 본다. 훗날 그 애가 길 잃은 아이처럼 우울하게 다리 위에 서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땐 게리 존슨의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한다. 게리는 다시 원장에게 뛰어간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미테이션이면 뭐 어때? 


작가는 몽골이 한국이 겹쳐 보이는 곳이자, 분단된 한국을 타자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소설 읽기도 마찬가지로 이야기 속에 나를 투영해보고 나를 타자의 시각으로 되돌아 보는 것 아닐까? 아무튼 이 책은 아주 잘 쓰인 소설집이다.

그가 나타난 뒤로 나는 하루도 몸에서 총을 떼어놓고 지내지 못합니다. 영혼이 서서히 망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걸 느낍니다. 영혼은 명백한 범죄 앞에서보다 모호한 죄의식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지요. 영혼은 죄와 짝패가 아니라 몸과 짝패이니까요. 땡볕의 낮꿈과 같은 검질긴 악몽 속에서,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같은 불안 속에서 우리는 거울을 들여다보듯 제 영혼을 만납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미친개를 잡을 생각입니다. 하여 놈의 사지를 지탱하는 여덟 가닥 힘줄을 끊어놓을 생각입니다. 아아, 두렵습니다. 이방인들이 돈을 믿을 때 우리 초원 사람들은 길조를 믿었지요. 우리는 저 굴곡 없는 대지를 오가면서도 일진을 점치고 움직였지요. 초원으로 흘러가버린 저 종소리처럼 다 옛말이 되어버린 이야기이지만. 40p

졸업한 제자와의 스캔들로 여고 미술교사를 그만두었을 때 그의 나이 마흔둘이었다. 제 인생에서 어떤 기회든 마지막 한번밖에 남지 않았다는 절박감이 밀려오는 나이였다. 격정적인 사랑은 시간이 훼손한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는 제의 같고 탈출구 같았다. 이듬해 그는 프랑스로 떠났다. 아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시 아내는 남편과 물의를 일으킨 아이가 유학을 떠나서 모든 일이 수습된 것으로 믿고 그를 어렵게 용서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아내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사랑에 대한 진실만을 폭력처럼 휘둘렀을 뿐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았다. 당시 아내가 침묵을 깨고 무슨 짓이든 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매달리거나 저주를 퍼부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는 가끔 그때를 돌이켜보곤 했다. 아마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을 유형 보낸다는 심정으로 떠났다. 그는 끝없는 자학을 통해 자신의 부도덕을 잊고자 했고 정화되길 원했다. 82p

그리움 같은 것은 그들에게 위험천만하고 한심한 언사이다. 당장 재앙이라도 불러올 주문처럼 여긴다. 내 그리움이 아무리 심미적일지라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정치적인 제동기를 가지고 `그리움`을 사용했다.
"추억이 있어야 그리움이 있을 텐데, 저처럼 젊은 세대는 북한이나 북한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나 실감이 없지요."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자르갈 시인의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확연해졌다.
"추억이 없어도 그리움은 오는 법이죠. 우리에게 그리움이 없다면 시도 없을 테지." 134p

내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내 품으로 쓰러졌다. 그러더니 마음먹고 울기로 작정한 여자처럼 소리내어 울었다. 나는 엉거주춤 서서 굴뚝 연기 잦아든 게르를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어떤 극심한 외로움과 함께 부끄러움이, 그리고 두 여자를 두고 어떤 질투심마저 들었는데 그 심리상태가 어디에서 연유하고 딱히 무어라 명명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워한 듯 그녀를 품에 안고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진심으로 자문했다. 15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