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밌는 소설들은 아니다.


표제작 바늘은 문신을 해주는 여자의 이야기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강인한 문신을 요구한다. 자신의 몸피에 강인한 그림을 새기면 마치 자신도 그처럼 강해질 거라 믿는다. 문신을 시술하는 그녀는 추하다. 그래서 허벅지에 문신을 시술할 때 그녀의 숨결이 사타구니에 닿으면 남자들은 발기할지언정 그녀에게 성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래전 연락이 끊긴 어머니의 소식을 경찰로부터 듣는다. 미륵암 현파스님을 어머니가 살해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경찰은 자연사 같은데 괜한 얘기를 해서 일을 복잡하게 한다고 한다. 어렸을 적 여자는 간질 발작을 앓아 미륵암에 어머니와 기도를 드리러 가곤 했다. 여자는 그곳에서 지내는 고양이들에게 시기심을 느낀다. 고양이들은 아름답고, 신도들이 주는 생선과 고기를 마음껏 먹고 있었다. 여자는 새끼 고양이를 어미에게서 빼앗아 변기 속으로 던져 죽인다. 여자의 간질 발작은 나았지만 어머니는 현파 스님에 대한 연정에 여자를 버리고 미륵암으로 간다. 어머니는 왜 현파 스님을 죽였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마트 육류 코너에서 둥그런 모양의 고깃덩어리를 보고 스님 머리를 연상한다. 그리고 스님 머리통에 문신을 새기는 상상을, 고운 여자가 스님 머리를 잡고 정사하는 장면을 상상을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의 자살 소식도 듣는다.


전쟁 기념관을 찾아간 그녀는 전시된 무기들을 보고 스님을 죽이는 상상을 한다. 한편 그곳에서 가끔 마주치던 같은 라인의 801호 남자를 본다.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하러 미륵암에 다녀오고 며칠 지나 801호 남자가 806호로 그녀를 찾아온다. 여자와 달리 남자는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다. 801호 남자는 오히려 그 아름다움 때문에 군대에서 고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801호 남자는 강함을 원한다. 그 강함의 표상으로 강력한 무기 문신을 원하고 있었다. 미륵암에서 가져온 어머니의 바늘들은 끝이 전부 잘려 있었다. 예전에 어머니는 그녀에게 바늘 끝을 잘게 잘라 매일 마시는 녹즙에 넣으면 아무런 외상도 남기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남자의 가슴에 바늘을 새겨준다.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 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33p


마치 꼽추와도 같은 추한 여자와는 아무도 섹스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녀의 바늘은 생살을 뚫고 피를 내고 그 틈으로 염료를 스며들게 한다. 반대로 어머니는 바늘로 고운 한복에 아름다운 수를 놓는다. 아름답지 못해 느끼는 열등감은 새끼 고양이를 죽이게 한다. 어머니는 자신을 버리고 현파 스님에게 갔다. 어머니와 스님에 대한 분노는 차갑다. 상상 속에서 스님을 살해한다. 여자의 욕구는 억압되어 있다. 억압된 욕구의 분출은 단적으로 그녀의 육식 취향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스님 머리를 잡고 정사하는 상상으로 표상화된다. 소설 속 남자들은 모두 강해 보이는 문신을 원하고 있다. 강함에 대한 열망은 반대로 남자들이 결코 강하지 않다는 말이다. 가녀린 바늘은 결국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였다. 그녀는 약한 남자들에게 강한 바늘로 문신을 새긴다. 그리고 남성성을 원하는 남자에게 강한 무기를 그러나 역설적으로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바늘을 새겨 넣는다.


천운영의 소설바늘은 추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억압된 욕망의 분출을 이야기한다. 이런 기조는 다른 단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월경에서는 성장이 멈춘 여성성이 부족한 여자와 농염한 은하수 계집이 대비된다. 가질 수 없는 여성성에 대한 열등감은 성관계를 관음 하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포옹에서는 곱사등이 여자가 매표소 일을 하며 우연히 본 남자를 자신의 약혼자라고 망상을 한다. 그리고 그 남자와 결혼을 약속했다고 가족들에게 허언한다. 또 다른 여자는 기댈 곳이 전혀 없는 화장품 판매원이다. 그녀는 집주인 할아버지에게 몸을 허락하고 50만 원을 받는다. 그녀는 어렸을 적 싸움소 훈련꾼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 아버지에게 심한 매질을 당한 후에 그녀를 위로해주는 건 슬픔에 민감한 소 '태풍이'였다. 아버지가 총애하는 강한 싸움소 '돌쇠''태풍이'를 뿔로 받고 괴롭힌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을 '돌쇠'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심한 매질을 당한 다음날 '돌쇠'는 힘 한번 못 쓰고 무기력한 패배를 당한다. 그 패배로 아버지는 싸움소 네 마리를 잃는다. 그날 밤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돌아와 '태풍이'와 그녀에게 채찍질을 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잠든 후 '태풍이'를 풀어주고 외양간에 불을 지른 후 집을 나온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는 폭력은 대물림됨을, 그리고 폭력의 사슬을 끊는 건 역설적으로 다른 폭력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반면 남녀의 성 정체성을 뒤집은 묘사로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작품들도 있다. 에서는 남자의 할머니는 흡사 마녀와 같이 묘사된다. 남자의 할머니는 육식을 즐겨 한다. 결혼하겠다는 남자의 말에 느닷없이 송치를 구해오라 한다. 남자는 늘 할머니를 불편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초식동물 같은 미연을 더욱더 갈구한다. 유령의 집에서는 남편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부인이 더 이상 참지 않고 목발로 남편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행복 고물상에서는 부인이 남편에게 폭력을 일상적으로 행사하는 설정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행하는 가정 폭력을 미러링 한다. 이렇게 역전된 성 인식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준다. 작품을 읽는 어떤 여성들은 일련의 통쾌함 마저 느낄지도 모르겠다.


소설집 내 모든 작품에서 사람들은 가난하다. 가진 것이 없어 늘 무언가를 열망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다. 눈보라콘은 부라보콘을 열망하는 이야기다. 늘 자신의 앞에서 놀리듯 부라보콘을 먹는 소녀를 보고 부라보콘을 먹는 상상을 한다. 부라보콘은 가난으로 인해 가지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눌려 있던 사춘기 소년의 성적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소년은 부라보콘을 먹는 상상을 하다 팬티에 사정한다. 소년은 부라보콘을 먹을 돈이 없어 그나마 가끔 사기 쳐 얻어낸 돈으로 짝퉁인 눈보라콘을 먹을 뿐이었다. 소년의 친구 '하봉'은 그 돈으로 가짜 나이키 스티커를 모으는 데 집착한다. 어느 날 소년은 부라보콘을 먹던 소녀를 만난다. 소녀와 이야기해보니 소녀가 먹던 것은 부라보콘이 아니라 눈보라콘이었다. 소녀는 가짜 휘발유에 가장 많이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정답은 진짜 휘발유였다. 진짜를 향한 열망 그 자체가 삶에선 진짜인 것이다. 부라보콘을 원하지만 먹지 못하고 반값인 눈보라콘만 먹을 수 있었을 뿐이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 소년은 눈보라콘 속에서 늘 행복했다고 소회한다. 영도를 떠나는 날 소년은 그렇게 성장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소설들은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의 소설 안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은 항상 대비되어 있다. 빈곤층과 추한 여자들의 욕구는 억압되어 있다. 육적(肉的) 묘사는 적나라하지만 문장은 건조하다. 이 불편함 들 속에서 삶은 폭력적임을 확인한다. 결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아니다. 그러나 미추의 대비와 삶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역설적 기표들이 숨어있는 이 문장들은 충분히 미학적이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 뭉뚝한 발가락......
남자가 말한 전혀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게 하는 이유들이다.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추하다는 추상어가 명백히 눈앞에 펼쳐져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나는 말까지 더듬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 바늘 끝에서 나오는 문신을 보고 추함과 연결시키는 사람은 없다." 13p

남자의 가슴팍에 새겨진 마산대표의 `ㅁ`자는 글자라기보다는 작은 액자처럼 보인다. 육체에 새겨진 글귀는 그걸 새겼을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노력`이나 `저축`같은 글귀가 그렇다. 한번 열심히 잘살아보겠다는 의지와 결의가 살을 파는 아픔을 이겨내게 만들었을 것이다. 역으로 문신에는 앞으로 감수해야 할 삶의 시련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육체와 그 위에 새겨진 글귀 사이에 공존하는 어떤 것. 그것은 아름다운 상처, 혹은 고통스러운 장식이다.
남자의 작은 액자에 호랑이를 한마리 그려준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로 눈을 부라리고 있다. 참숯을 곱게 갈아 몸통 깊숙이 줄무늬를 새겨넣는다. 사각형 안에 갇힌 호랑이는 고작 마산대표가 아니라 조선시대 무관을 대표하던 흉배문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섯 개의 사각형 안에는 일, 삼, 팔, 비, 똥, 다섯 개의 광을 그려넣는다. 남자는 어느 화투판에서도 느긋할 수 있는 오광을 몸 안에 숨기고 있게 되었다. 인생에 있어 그렇게 막강한 숨긴 패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여유롭겠는가. 27p

그러나 나는 미연과 함께 살고 싶다. 아이를 낳아 목말 태우고 미연과 함께 숲에 가 나무냄새도 맡고, 미연이 해주는 풋풋한 음식을 먹으며 살고 싶다. 내 욕망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숨쉬며 지내다가 자신의 숨소리를 듣게 될 때 느끼는 부자연스러운 인식 같은 것이었다.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을 때 편안한 숨쉬기 속도에서 어긋나버려 몹시 답답하고 힘들게 숨을 고르는 것처럼. 아무리 자연스럽게 숨을 쉬려 해도 폐활량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는 것처럼.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아야만 자연스럽게 숨을 쉴 수 있는 법이다. 나는 미연을 원하지 말아야 했는지 모른다. 52p

하지만 나는 눈보라콘을 좋아한다. 눈보라콘 속에는 부라보콘을 향한 욕망과 열망이 들어 있다. 눈보라콘도 나처럼 부라보콘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눈보라콘이 부라보콘의 대용물밖에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눈보라콘에는 다른 가짜들과는 구분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눈보라콘에게 동지애까지 느낀다. 99p

파랗게 질린 어머니의 얼굴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심벌즈 소리가 멎었다. 그때까지 나느 현실세계가 아닌 먼 우주 공간을 날고 있었던 것 같다. 교문을 나서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침묵이 슬픔 때문인지 화가 났기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내 어깨를 잡은 어머니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을 뿐. 어머니는 목도리를 벗어 벽에 걸고 나서야 어정쩡하게 서있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듯 확실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그 말은 내 심장 깊숙이 와 박혔다. 그것은 내겐 너무 가혹하게 들렸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내가 그런 일을 하지 못했을 거라는 건지 아니면 몹시 혼이 났을 거라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어머니한테 영원히 버림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눈보라콘이나 부라보콘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모든 것은 눈보라콘을 먹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니까. 104p

모든 것이 다 잘 풀리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희망에 가득 찬 순간 어두운 소식을 접한 것이다. 하지만 죽음도 위안이 될 수 있다. 불행에 단련된 사람은 제 앞에 닥친 희망을 낯설어하게 된다. 영감의 죽음은 할멈에게 채워진 족쇄를 열 희망의 열쇠일 뿐이다. 할멈은 양로원에서 편안한 노후를 맞을 것이다. 나는 할멈을 위안하는 척하며 내 가슴을 쓸어내었다. 18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