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음 | 이희재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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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60년대부터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철학 사조가 있다. 네이버 지식 백과의 설명을 빌려 말하면 이렇다. "모더니즘은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다.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이런 합리주의 모더니즘 이후의 철학 사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 되겠다. 대표 주자로는 자크 라캉, 질 들뢰즈, 폴 비릴리오 같은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문장을 들여다보면 꽤 모호하여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라캉은 이렇게 썼다. "동일한 성질을 가진 기표들의 쌍은, 동일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 자체로는 완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기표는 원으로부터 유래하되 원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는 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기표들의 전체 집합 중에서 (-1)의 속성으로 기호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표현될 수 없기는 하지만 이것의 작용까지도 표현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고유명사가 입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이것의 진술은 곧 이것의 의미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의 의미 작용을 대수식에 따라서 계산하면 이렇게 됩니다. 즉, S(기표)/s(기의)=s(진술)에서 S=(-1)이니까 s=제곱근-1이 된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다른 예도 있다. 들뢰즈다. "미분 관계는 셋째 요소, 즉 순수 잠재성의 요소를 제시한다. 승수는 상호 결정의 형식이며 이것에 따라 변수의 양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함수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미적분학은 적어도 한 양이 다른 양보다 높은 승수를 가지는 양들만을 고려한다. 물론 미적분학의 제1막은 방정식의 '탈잠재화'에 역점을 둔다. 그러나 크기와 양의 소멸이 양화 가능성이라는 요소의 출현을 위한 조건이었고 질의 분리(disqualification)가 질화 가능성이라는 요소의 출현을 위한 조건이었던 선행하는 두 숫자에서, 우리는 유사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라그랑주의 설명을 따르자면, 여기서 탈잠재화는 i(미결정양)의 승수들과 이 승수들의 계수들(새로운 x함수들)로 구성된 계열 안에서 한 변수 함수의 전개를 허용함으로써 순수한 잠재성의 조건을 마련한다. 그 변수의 전개 함수를 다른 변수들의 전개 함수와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성의 순수한 요소는 최초의 계수와 최초의 도함수에서 나타나며 나머지 도함수들과 자연히 그 계열의 모든 항들은 동일한 연산의 반복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문제는 i로부터 독립된 이 최초의 계수를 결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저자들은 말한다. 라캉의 대수식에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 등장하는 '기표', '기의', '진술'은 누가 뭐래도 수는 아니며 중간선(자의적 선택 기호)은 두 숫자의 나눗셈을 뜻하지 않는다. 따라서 라캉의 '계산'은 순전히 몽상이다. 들뢰즈의 글에서 의미 파악이 가능한 문장은 몇 개 안 되고 그마저도 진부하거나 틀렸다. 150여 년 전에 이미 심도 있게 이해된 수학적 내용을 신비화시켜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들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수학과 물리학을 이용하여 설명하려 한다. 인용한 문장들을 읽었으면 알겠지만 이런 서술 방식엔 문제가 있다. 그들은 언어상의 우연한 일치를 논증으로 확대시키곤 하는데 이는 백 번을 양보해도 비유에 불과하다. 수학과 물리학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 억지로 끼워 넣는 셈이다. 은유는 생경한 개념을 익숙한 개념에 연결해 그 뜻을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해 쓰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런 서술은 은유를 넘어 애매모호한 유추로 귀결되는데 유추란 무언가를 암시할 수는 있어도 증명할 수는 없는 방법이다. 자신의 사회학적 역사적 명제를 정당화하려면 수리논리학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적 행위를 다루는 논증을 제시(210)'하면 될 것이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이 갖는 경험적 측면을 무시하고 언어와 이론적 정립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담론이 경험적 검사를 거치지 않고도 피상적 정합성을 갖춘다면 바로 과학적 담론이 되는 걸까? 아니다. 더욱이 아직까지 현대 과학에서도 불완전하게 이해된 현상이 많은데 복잡한 인간의 문제를 다루면서 자연과학을 모방하는 건 아무런 근거가 없다. 지금 당장 엄밀한 방식으로 다루기 어려운 인간 경험의 다양한 측면들을 과학 아닌 방법으로 이해하기 위해 직관이나 문학에 의존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중의 마음을 흔든 건 인간의 삶을 이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식론적/문화적 상대주의나 관점의 다양성은 다원주의 사회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세임엔 분명하다. 이점을 저자들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명제에 옳지 않은 논증이 동반된다면 그 명제가 참이라 할지라도 진실성과 당위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다양한 영역 사이의 유추는 좋지만 그것이 논리적 명료함을 잃고 모호한 담론으로 흘러갈 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혼란을 느낀다. 이는 단순한 추론의 오류가 아니다. 모든 학문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합리성과 지적 정직성의 규범을 어기는 행위다. 문법적으로 정확하지만 아무런 뜻이 없는 문장들을 걷어내면 뭐가 남을 것인가. 근거가 뚜렷한 주장은 보통 쉽게 설명된다. 근거가 모호할 때 주장은 어려워지고 먼 길을 돌아간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정말로 인간의 삶에 맞닿아 있다면 굳이 과학적 수식을 남발하며 현학적인 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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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해도 괜찮아 - 불쾌한 터치와 막말에 분노하는 당신을 위한 따뜻한 직설
이은의 지음 / 북스코프(아카넷)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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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팔로우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좋은 글을 받아보자는 처음의 의도와 다르게 이젠 그냥 슥슥 내리면서 마음이 동하는 주제의 글만 편취해서 읽는다 (이럴 거면 도대체 왜). 문유석 판사가 이은의 예민해도 괜찮아를 읽었다는 글을 보고 스크롤을 마저 내리면서 나도 읽어봐야겠다고 주문했다. 문유석 판사가 읽었다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주문한 책이다. 심지어 '이은'의 예민해도 괜찮아,로 읽어버려서 저자 이름이 '이은'인 줄 알았다 (...).


이은의가 누군가 하고 봤더니 <삼성을 살다>의 저자였다. 저자는 삼성에서 겪은 성추행 사건에 대항하여 싸우고 로스쿨로 진학했다. 책은 성희롱/추행/폭행 피해 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로서 그것들에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전하는 실용적인 메시지와, 성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전언을 담았다.


책의 초반은 항상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을 위한 실용서로 읽힌다. 남성인 내가 과연 이걸 읽어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내가 성폭력 피해자의 아주 가까운 주변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계속 읽었다. 가령 가해자의 체액이 묻어있는 휴지 등의 증거물은 비닐봉지 말고 종이봉투에 넣어 보관하는 게 낫다던가 (비닐봉지는 DNA 오염률이 더 높다), 사건 후 가해자와의 모호한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건 금물(사과받는 내용이 아니면 역이용되기 쉽다)이라는 조언은 성폭력 전문 변호사가 전하는 생생한 노하우다.


중반부터는 저자가 변호사가 되어서도 겪는 각종 성추행의 경험을 늘어놓는다. 성추행 가해자들도 남자 변호사들이다. 내용은 이렇다. 모임에서 헤어질 때 악수를 하는데 검지를 쭉 뻗어 손목을 꾹 누르면서 묘한 표정을 짓는다던지(세상에), 남자 변호사들 모임에 초대해놓고 여자가 없으니 도우미를 부른다던지 (...). 읽는 사람이 역겨울 정도인데 당사자는 어땠을까. 성폭력은 남자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해있다.


저자는 직장 내 성희롱이 성문제가 아니라 계급 문제임을 지적한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여성이 많은 이유는 직장 내에서 통상 여성이 약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교수 학생 관계에서 성폭력 문제가 발생한다. 책과 상관없는 잡담이지만 남고를 나온 나도 성추행을 당했다. 복싱 선출 체육 선생은 나만 보면 귓불을 만지면서 말을 걸었다. 표정은 어찌나 비릿하던지, 진짜 싫었다. 그때 나도 학생으로서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그 선생을 피하고 다니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기엔 또 기숙사 사감이라 자주 볼 수밖에 없었다. 아, 구린 기억이다.


일반적인 직장은 아니지만 병원에서도 계급 차이에 의한 성희롱을 종종 목격한다. 보통 남의사들이 선배 여의사에겐 꼼짝 못하지만, 후배 여의사나 여학생, 간호사들에겐 종종 성추행을 저지르곤 하니 저자의 지적은 정확한 것 같다. 그래도 병원은 그나마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덜 저평가 받는 곳이다. 일반 직장에선 여전히 유리천장이 공고해 거의 항상 여성이 약자가 된다. 그러므로 성추행 문제는 근본적으로 사회의 성차별 구조와 맞닿게 된다. 출산, 육아가 여성의 채용과 승진을 막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게 안타깝다. 성차별을 실질적으로 해소하려는 국가적 노력은 이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종장에서는 주변인의 윤리를 말한다. 현실에서 보통의 사람들은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확률보다는 목격자나 주변인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과연 이럴 때 피해자 편에 서는 일이 쉬울까? 쉽지 않다. 자신의 이익을 따지기 시작하면 내가 괜한 증언을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건 피해자의 용기나 가해자의 반성이 아닌 수많은 제삼자의 선택이라고. 유리함보다 유익함을 선택하고 피해자를 지지할 때 세상은 좀 더 나아진다고 말한다. 더불어 자신의 인생 또한 단단해질 것이라고. 


사람을 그저 남성과 여성으로 거칠게 이분하여 한쪽은 가해자 다른 쪽은 피해자로 규정하는 논리는 싫어한다.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그런. 그러나 여성이 잠재적 피해자(구조적 약자)임은 점점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을 경험할수록 더욱.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나도 부지불식간에 성희롱과 성추행을 아슬아슬하게 저질렀을지 모른다. 나를 계속 돌아보게 되는 불편한 독서였다. 예민해도 괜찮은 여성의 반대쪽엔 둔감해선 안 되는 남성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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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 2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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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건 뭘까. 잘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이렇다. 입이 조금 짧아지고, 시끄러운 음악보단 조용한 음악을 듣고,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진 순간 돌아보니 나이를 꽤 먹고 난 후였다. 사고의 성숙, 타인의 이해 같은 게 성장의 본질일 수도 있지만 나이 서른 넘어도 그것들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성장은 단지 습관의 변화 정도다. 그러니까, 식당에서 혼자 국밥에 소주 먹는 사람은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건 어른 아니라 아재라고? 팩트 폭력 그만...


작가는 이 소설에서 화자가 완전히 성장한 이후를 보여주진 않는다. 이야기는 어른이 된 화자가 유년을 회고하는 게 전부다. 한국도 그랬겠지만 근현대 중국은 일상에서 폭력이 만연한 세계였다. 그런 세계에서 유년이 항상 행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은 6살에서 18살까지 자라면서 관계의 많은 상실을 경험한다. 주인공의 관계는 어느 것 하나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어려서 위태로운 관계다. 그러나 어려서 가능한 관계이기도 하다. 쉽게 잃어버릴지언정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관계 맺는 것은 유년에서만 가능하다. 어른은 새로운 관계를 두려워한다.  


성장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가장 성장했던 18살 때에 주인공은 외톨이 꼬마 루루를 만난다. 형제와 친구가 없는 루루는 누구와도 곧잘 싸우지만 늘 혼자다. 가족에게서 버려졌던 주인공은 동병상련을 느끼고 루루와 친해진다. 루루는 또래와 싸울 때 늘 형이 와서 너희를 혼내줄 거라 말하지만 루루에겐 형이 없다. 주인공은 그걸 눈치챈다. 루루가 여느 때처럼 또래 아이들에게 맞고 있을 때 그것을 보던 주인공은 참지 못하고 아이들을 쫓아낸다. 그리고 루루에게 말한다. "애들한테 말해라, 내가 네 형이라고 말이야.". 그러나 루루가 주인공에게 고마워하거나 둘이 더 친해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때부터 루루는 주인공을 어려워한다. 주인공은 그때야 상상 속의 형이 루루의 마음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알게 된다. 주인공의 주변 어른들이 굴욕을 감내했던 것만큼이나 루루도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을 감내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연민이나 동정이 나쁜 감정은 아니지만 그것이 진정 상대를 존중하는 방법인지는 언제나 고민해야 한다. 때론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배려는 섣부른 이해를 확신하지 않고 타인의 세계를 지켜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작가는 이런 유년의 기억을 시간 순서대로 말하지 않는다. 작가는 순서 없이 섞여 있는 이야기를 통해 기억과 회상이 늘 완전하지 않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걸 말하는 듯하다. 파편화된 기억은 인생의 순간마다 예고 없이 살아나 우리를 찌른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우리를 과거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의 나는 행복이든 불행이든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주인공은 상처뿐인 삶을 회복해나갈까? 고통스러운 삶에서 회복됐을까? 모른다. 다만 주인공은 그것들을 덤덤히 회고할 뿐이다. 그러나 덤덤한 회고는 그 자체로 중요하다. 지난 고통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고통받는 타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이란 지나간 고통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회고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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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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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Phosphorus)이 어떻게 발견됐는지 아는가? 인은 1675년 소변을 증류하면 금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헤니히 브란트가 소변을 고약한 반죽으로 만든 다음에 다시 반투명한 왁스로 변환시키는 실험을 통해 처음 발견되었다. 금에 대한 집착이 뜻밖의 발견을 했다. 


지구의 나이는 아는가? 지구의 나이는 45억 5,000만 년(±7,000만 년)인데 클레어 패터슨이 운석의 납/우라늄 비율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방법으로 1953년 알아냈다. 그는 더 나아가 1923년 이후로 공기 중 납 농도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납 산업계를 비판했다. 그래서 1986년부터 납을 포함한 유연 휘발유의 판매가 중지됐다. 지금 주유소에서 파는 무연 휘발유는 납이 없는 휘발유란 뜻이다. 이처럼 한 사람의 과학적 발견과 행동이 전 세계 환경을 지키기도 한다. 


운석이 충돌해서 공룡이 멸종했다고 하는데, 지름 10킬로미터에 불과한 덩어리가 어떻게 1만 3,000킬로미터나 되는 지구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수 있을까? 1994년 목성에 21개의 조각으로 나뉜 혜성이 충돌했다. 충돌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G 핵이라고 알려진 파편은 작은 산 정도 크기였지만, 목성 표면에 지구 정도 크기의 상처를 남겼다.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핵무기를 합친 것의 75배나 되는 600만 메가톤 정도의 힘이었다. 작은 운석이 괴멸적인 충돌 에너지를 내는 이유는 이렇다. 우주적인 속도로 날아오는 소행성이나 혜성이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면,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 앞쪽에 있는 공기가 비켜날 틈이 없기 때문에 자전거 펌프 속에서처럼 압축이 된다. 공기가 압축되면 뜨거워진다. 대기에 진입한 소행성 앞쪽 공기의 온도는 태양 표면 온도의 열 배에 가까운 6만 K까지 올라간다. 운석이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불속에 던져진 셀로판 판처럼 찌그러져버린다. 대기권에 진입한 운석은 1초 이내에 지표면에 충돌한다. 충돌 현장 240킬로미터 이내에서는, 진입 당시의 열로부터 살아남은 모든 생물들이 그런 폭발에 의해 죽게 된다. 1,600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사람들은 바람에 넘어지고, 날아오는 파편에 사정 없이 얻어맞게 될 것이다. 초기의 충격파가 지나가면 엄청난 규모의 지진들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전 세계의 화산들이 터질 것이다. 엄청난 해일이 발생하고, 한 시간 이내에 시커먼 구름이 전 세계를 덮을 것이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돌과 파편들이 날아다니면서 전 세계가 불길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하루 만에 적어도 15억 명 이상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아마겟돈"처럼 우주선에 한 무리의 카우보이(ㅋㅋ)들을 태워 보내서 운석 폭파 임무를 맡기면 되지 않느냐고? 놀랍게도 현재 우리는 인간을 달까지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로켓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던 마지막 로켓 새턴 5호는 폐기되었다. 어쨌든 운석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면, 인류는 끝장이다. 


타이핑하기 귀찮지만 책에 나온 흥미로운 사실 몇 가지만 더 말해볼까? 유리는 점성을 가지고 있어 느리게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는 물질이다. 달은 지구를 안정화 시키고 있는데 매년 3.8센티미터씩 멀어져서 20억 년 후에는 지구를 안정화시켜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매일 수백만 리터의 민물이 바다에서 증발하니 바다의 염도는 높아져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심해 분출구를 통해 깨끗한 민물이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젠 정말 타이핑이 귀찮으니 여기까지. 이상 책을 읽으면 알게 되는 내용들이었다. 


철학과 나온 정훈 장교를 가끔 문송한 녀석이라고 놀렸는데, 사실 나도 과학 지식이나 상식이 별로 없긴 마찬가지였다. 아마 지금은 과학동아 읽던 고딩 시절보다 훨씬 못할 것이다. 생물학이랑 의학만 쪼오금 아는 정도. 이 책은 위트있는 기자가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를 토대로 쓴 과학 교양서다. 무려 30챕터에 걸쳐서 물리학, 화학, 지구과학, 생물학(수능 과학 4과목! ㅋ)에 걸쳐 이뤄진 발견과 그것에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를 이야기한다. 


재밌는 건 어떤 놀라운 발견이 처음 세상에 공개되면 처음엔 보통 무시 당하거나 격한 반발에 부딪쳤다는 사실이다. 과학자가 한을 품고 죽으면 훗날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되기도 하고, 엄한 사람이 공을 가로채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과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부정을 하고, 그 후에는 그 중요성을 부정하며, 마지막으로는 엉뚱한 사람에게 그 업적을 인정해준다 (441)". 지금 이 순간 무시받은 주장과 가설이 훗날 진실로 입증될지 모르는 일이다.


일본은 올해도 과학부문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본에서 22번째다. 한국과는 애초에 국력이 비교가 되지 않는 나라이니 우리가 아쉬워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ㅎㅎ). 어쨌든 그 중 한 명의 이력이 흥미로웠는데, 오스미 요시노리 교수였다. 그는 무려 50년 동안 오토 파지(autophagy) 현상에 대해서 연구했고 그 결실을 인정받았다. 그를 보고 외골수라고 한 기사도 봤다. 그는 업적을 남겼기에 위대한 외골수로 인정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채 잊히는 외골수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런 말이 있었다. 논문 한편을 쓰면 인류 지식 체계에 기왓장 한 장을 얹는 것이라고 (정확한 워딩은 기억 안 난다 ㅎㅎ). 그런 면에서 과학의 발전과 인류의 번영은 많은 외골수들의 집념에 빚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초신성을 찾아낸 에번스는 3년 동안 하나도 못 찾았던 때도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것도 가치가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리처드 포티와 난해한 과학 분야가 어떻게 대를 이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리처드 포티는 생소한 분야의 전문가가 은퇴하거나 사망하면 그 작업은 중단되어 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한다. "한 종의 식물을 42년 동안 끈질기게 연구한 사람이 소중한 것이군요. 소득이 없더라도 말입니다." 한국의 마이너 분야 외골수와 장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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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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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삶의 바깥으로 눈 돌릴 여유가 있는 사람의 유희라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삶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 문학 같은 건 아무래도 사치였다. 가장 바쁘게 살았던 20대 후반엔 독서나 글쓰기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로지 짧은 쾌락만 좇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일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었을 때였다. 문학을 즐긴다는 건 내게 삶의 여유로운 포즈에 다름 아니었다.


읽는데 8일 걸렸다. 문학이 해부되어 정신 분석과 그리스 철학의 틀에 맞물릴 때마다 그걸 읽는 나는 기진맥진했다. 읽으며 거듭 자문했다. 삶을 말하는 문학이 정작 삶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문학이 삶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건 가진 자들의 위선 아닐까. 그런 문학을 말하는 문학은 어떤 의미일까. 또 그것을 읽는다는 건 어떤 행위일까. 비평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무언가가 아닐까. 


책의 제목은 『몰락의 에티카』다. 신형철은 문학이 포착하는 몰락의 순간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기 때문이고, 몰락한 자의 선택은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생은 흔들리고 질문이 남는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그래서 문학은 몰락의 에티카가 된다.


이때 에티카(윤리학)는 도덕과 다르다. '도덕은 사회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에 가깝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142)'이다. 좀 더 와 닿는 예를 들면 이렇다. 언젠가 김희애가 CF에 나와서 힘든 삶을 위로하는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다. 사실 어떤 장면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정도의 자세였다. 그걸 본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을까? 아니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도리어 약간 불편해했다. 그 CF는 도덕적이지만 윤리적이지 않다.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김희애가 부박한 삶을 위로하려 한들 그건 절대 위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서 타인의 고통을 위로한다는 말을 하기는 너무나 쉽다. 광고의 상업적 목적을 차치하더라도 그 영상은 불행한 타인을 위로한다는 제작자의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럼 문학의 윤리란 무엇일까. 신형철은 '타자에 대해 발언하지 않고 타자로서 발언할 때 미학과 윤리학은 이렇게 포개진(385)'다고 말한다. 그가 분석한 윤동주의 「병원」을 보자. 그는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라는 구절에서 '아니'의 미묘한 머뭇거림이 이 시를 한층 겸허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만약 윤동주가 '타자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임을 아름답게 고백(512)'했다면 이 시는 자칫 '사이비 유마힐'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주체가 객체를 서정적으로 동일화하지 않으면서도 기어이 하나가 되기에 윤리적으로 서정적으로 올바르다. 그는 말한다. "서정은 언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인식론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겸허할 때다. 타자를 안다고 말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하지 않는 시가 그렇지 않은 시보다 아름다움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512)" 김희애와 윤동주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것만으로는 문학의 윤리를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문학을 배제되는 무의식의 총체성(19)'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그곳에 치명적인 진실이 있고, 그 기형을 대면하고 돌파하는 일은 윤리적이라고 말한다. 결국 '윤리가 문제되는 자리는 선善이 아니라 진실이라는(19)' 것이다. 너무나 뻔한 서정시 같은 것을 읽으면 김이 빠지는 이유가 선과 진실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선한가? 인간은 언제나 무의식과 싸우고 있고 치명적인 진실을 감추고 살 뿐이다. 그는 '서정적 사랑은 늘 어떤 방어적 선택이며 회피의 몸짓이기 쉽다. 그것은 '나'의 근원적인 욕망과 충동을 순화시키는 세련된 방식이자 타인의 치명적인 욕망과 충동을 외면하는 편안한 방식일 수 있(194)'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문학의 윤리는 서정의 한계와 욕망을 정확하게 직시할 때 발생한다. 타인을 모두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한계 없는 사랑을 노래할 때 서정은 구태의연하게 변한다. 그러나 서정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때 서정은 치유의 목소리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잠재된 욕망을 회피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바람직한 욕망인지 잘못된 욕망인지 끊임없이 되물을 때 글은 단순한 위악을 넘어서 인간 심연의 탐구로 기능할 수 있다.


글의 윤리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중요한지는 8일의 고생 끝에 겨우, 조금 알게 되었다. 고생했지만 좋은 독서였다. 문학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비평은 극히 사치스러운 문학 또는 행위라는 생각을 끝내 떨칠 수 없었다. 내가 이 독서로 문학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더라도 삶은 여전히 깊게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간을 치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확신한다. 비평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글의 윤리를 알게 해준 신형철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에게는 이 서평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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