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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문학은 삶의 바깥으로 눈 돌릴 여유가 있는 사람의 유희라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삶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 문학 같은 건 아무래도 사치였다. 가장 바쁘게 살았던 20대 후반엔 독서나 글쓰기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로지 짧은 쾌락만 좇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일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었을 때였다. 문학을 즐긴다는 건 내게 삶의 여유로운 포즈에 다름 아니었다.
읽는데 8일 걸렸다. 문학이 해부되어 정신 분석과 그리스 철학의 틀에 맞물릴 때마다 그걸 읽는 나는 기진맥진했다. 읽으며 거듭 자문했다. 삶을 말하는 문학이 정작 삶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문학이 삶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건 가진 자들의 위선 아닐까. 그런 문학을 말하는 문학은 어떤 의미일까. 또 그것을 읽는다는 건 어떤 행위일까. 비평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무언가가 아닐까.
책의 제목은 『몰락의 에티카』다. 신형철은 문학이 포착하는 몰락의 순간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기 때문이고, 몰락한 자의 선택은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생은 흔들리고 질문이 남는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그래서 문학은 몰락의 에티카가 된다.
이때 에티카(윤리학)는 도덕과 다르다. '도덕은 사회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에 가깝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142)'이다. 좀 더 와 닿는 예를 들면 이렇다. 언젠가 김희애가 CF에 나와서 힘든 삶을 위로하는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다. 사실 어떤 장면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정도의 자세였다. 그걸 본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을까? 아니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도리어 약간 불편해했다. 그 CF는 도덕적이지만 윤리적이지 않다.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김희애가 부박한 삶을 위로하려 한들 그건 절대 위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서 타인의 고통을 위로한다는 말을 하기는 너무나 쉽다. 광고의 상업적 목적을 차치하더라도 그 영상은 불행한 타인을 위로한다는 제작자의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럼 문학의 윤리란 무엇일까. 신형철은 '타자에 대해 발언하지 않고 타자로서 발언할 때 미학과 윤리학은 이렇게 포개진(385)'다고 말한다. 그가 분석한 윤동주의 「병원」을 보자. 그는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라는 구절에서 '아니'의 미묘한 머뭇거림이 이 시를 한층 겸허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만약 윤동주가 '타자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임을 아름답게 고백(512)'했다면 이 시는 자칫 '사이비 유마힐'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주체가 객체를 서정적으로 동일화하지 않으면서도 기어이 하나가 되기에 윤리적으로 서정적으로 올바르다. 그는 말한다. "서정은 언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인식론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겸허할 때다. 타자를 안다고 말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하지 않는 시가 그렇지 않은 시보다 아름다움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512)" 김희애와 윤동주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것만으로는 문학의 윤리를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문학을 배제되는 무의식의 총체성(19)'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그곳에 치명적인 진실이 있고, 그 기형을 대면하고 돌파하는 일은 윤리적이라고 말한다. 결국 '윤리가 문제되는 자리는 선善이 아니라 진실이라는(19)' 것이다. 너무나 뻔한 서정시 같은 것을 읽으면 김이 빠지는 이유가 선과 진실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선한가? 인간은 언제나 무의식과 싸우고 있고 치명적인 진실을 감추고 살 뿐이다. 그는 '서정적 사랑은 늘 어떤 방어적 선택이며 회피의 몸짓이기 쉽다. 그것은 '나'의 근원적인 욕망과 충동을 순화시키는 세련된 방식이자 타인의 치명적인 욕망과 충동을 외면하는 편안한 방식일 수 있(194)'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문학의 윤리는 서정의 한계와 욕망을 정확하게 직시할 때 발생한다. 타인을 모두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한계 없는 사랑을 노래할 때 서정은 구태의연하게 변한다. 그러나 서정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때 서정은 치유의 목소리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잠재된 욕망을 회피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바람직한 욕망인지 잘못된 욕망인지 끊임없이 되물을 때 글은 단순한 위악을 넘어서 인간 심연의 탐구로 기능할 수 있다.
글의 윤리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중요한지는 8일의 고생 끝에 겨우, 조금 알게 되었다. 고생했지만 좋은 독서였다. 문학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비평은 극히 사치스러운 문학 또는 행위라는 생각을 끝내 떨칠 수 없었다. 내가 이 독서로 문학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더라도 삶은 여전히 깊게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간을 치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확신한다. 비평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글의 윤리를 알게 해준 신형철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에게는 이 서평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