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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음 | 이희재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1960년대부터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철학 사조가 있다. 네이버 지식 백과의 설명을 빌려 말하면 이렇다. "모더니즘은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다.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이런 합리주의 모더니즘 이후의 철학 사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 되겠다. 대표 주자로는 자크 라캉, 질 들뢰즈, 폴 비릴리오 같은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문장을 들여다보면 꽤 모호하여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라캉은 이렇게 썼다. "동일한 성질을 가진 기표들의 쌍은, 동일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 자체로는 완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기표는 원으로부터 유래하되 원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는 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기표들의 전체 집합 중에서 (-1)의 속성으로 기호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표현될 수 없기는 하지만 이것의 작용까지도 표현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고유명사가 입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이것의 진술은 곧 이것의 의미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의 의미 작용을 대수식에 따라서 계산하면 이렇게 됩니다. 즉, S(기표)/s(기의)=s(진술)에서 S=(-1)이니까 s=제곱근-1이 된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다른 예도 있다. 들뢰즈다. "미분 관계는 셋째 요소, 즉 순수 잠재성의 요소를 제시한다. 승수는 상호 결정의 형식이며 이것에 따라 변수의 양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함수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미적분학은 적어도 한 양이 다른 양보다 높은 승수를 가지는 양들만을 고려한다. 물론 미적분학의 제1막은 방정식의 '탈잠재화'에 역점을 둔다. 그러나 크기와 양의 소멸이 양화 가능성이라는 요소의 출현을 위한 조건이었고 질의 분리(disqualification)가 질화 가능성이라는 요소의 출현을 위한 조건이었던 선행하는 두 숫자에서, 우리는 유사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라그랑주의 설명을 따르자면, 여기서 탈잠재화는 i(미결정양)의 승수들과 이 승수들의 계수들(새로운 x함수들)로 구성된 계열 안에서 한 변수 함수의 전개를 허용함으로써 순수한 잠재성의 조건을 마련한다. 그 변수의 전개 함수를 다른 변수들의 전개 함수와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성의 순수한 요소는 최초의 계수와 최초의 도함수에서 나타나며 나머지 도함수들과 자연히 그 계열의 모든 항들은 동일한 연산의 반복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문제는 i로부터 독립된 이 최초의 계수를 결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저자들은 말한다. 라캉의 대수식에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 등장하는 '기표', '기의', '진술'은 누가 뭐래도 수는 아니며 중간선(자의적 선택 기호)은 두 숫자의 나눗셈을 뜻하지 않는다. 따라서 라캉의 '계산'은 순전히 몽상이다. 들뢰즈의 글에서 의미 파악이 가능한 문장은 몇 개 안 되고 그마저도 진부하거나 틀렸다. 150여 년 전에 이미 심도 있게 이해된 수학적 내용을 신비화시켜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들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수학과 물리학을 이용하여 설명하려 한다. 인용한 문장들을 읽었으면 알겠지만 이런 서술 방식엔 문제가 있다. 그들은 언어상의 우연한 일치를 논증으로 확대시키곤 하는데 이는 백 번을 양보해도 비유에 불과하다. 수학과 물리학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 억지로 끼워 넣는 셈이다. 은유는 생경한 개념을 익숙한 개념에 연결해 그 뜻을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해 쓰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런 서술은 은유를 넘어 애매모호한 유추로 귀결되는데 유추란 무언가를 암시할 수는 있어도 증명할 수는 없는 방법이다. 자신의 사회학적 역사적 명제를 정당화하려면 수리논리학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적 행위를 다루는 논증을 제시(210)'하면 될 것이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이 갖는 경험적 측면을 무시하고 언어와 이론적 정립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담론이 경험적 검사를 거치지 않고도 피상적 정합성을 갖춘다면 바로 과학적 담론이 되는 걸까? 아니다. 더욱이 아직까지 현대 과학에서도 불완전하게 이해된 현상이 많은데 복잡한 인간의 문제를 다루면서 자연과학을 모방하는 건 아무런 근거가 없다. 지금 당장 엄밀한 방식으로 다루기 어려운 인간 경험의 다양한 측면들을 과학 아닌 방법으로 이해하기 위해 직관이나 문학에 의존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중의 마음을 흔든 건 인간의 삶을 이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식론적/문화적 상대주의나 관점의 다양성은 다원주의 사회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세임엔 분명하다. 이점을 저자들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명제에 옳지 않은 논증이 동반된다면 그 명제가 참이라 할지라도 진실성과 당위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다양한 영역 사이의 유추는 좋지만 그것이 논리적 명료함을 잃고 모호한 담론으로 흘러갈 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혼란을 느낀다. 이는 단순한 추론의 오류가 아니다. 모든 학문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합리성과 지적 정직성의 규범을 어기는 행위다. 문법적으로 정확하지만 아무런 뜻이 없는 문장들을 걷어내면 뭐가 남을 것인가. 근거가 뚜렷한 주장은 보통 쉽게 설명된다. 근거가 모호할 때 주장은 어려워지고 먼 길을 돌아간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정말로 인간의 삶에 맞닿아 있다면 굳이 과학적 수식을 남발하며 현학적인 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