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10년, 그 시간을 쓰고 말하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 마음산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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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을 잘 봐야 한다. <청춘의 문장들>이 아니라 <청춘의 문장들+>다. 플러스 기호가 붙는다. 사실 이 '플러스'는 2004년에 나온 오리지널 <청춘의 문장들>로 알고 산 것이다. 몇 페이지 읽고 나서야 알았다. 당연히 '오리지널'을 다시 주문해야 했다.


2004년 <청춘의 문장들>이 이제 궤도에 안착한 소설가가 젊은 시절을 회고하는 에세이라면, 2014년 <청춘의 문장들+>는 정상급 인기 소설가의 입장에서 자신의 소설 철학을 말하는 에세이와 인터뷰집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소설을 쓰는지, 소설 쓰는 데 힘든 점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등등.


김연수를 좋아하지만 감흥은 부족했다. 문장은 여전히 좋지만 왠지 김연수 마케팅의 정점인 느낌이랄까. 출판사가 이제는 대작가가 되어버린 김연수를 적극 이용한다는 음모론이 머릿속에 맴돈다. 김연수를 많이 읽어서 책이 오히려 뻔한 이야기로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이해 불가능한 타인, 모르는 걸 모른다고 솔직하게 써야 한다, 뭐 그런, 그가 만날 하는 이야기들.


소설을 왜 읽느냐에 대한 이야기는 좋았다. 만날 소설책이나 붙잡고 있으면서 너는 이런 거 왜 읽어?라는 질문에 대답은 항상 궁색했던 게 사실이다. 으응... 인생의 대리 경험?? 그거 지어낸 이야기잖아, 읽으면 경험이 돼?? 으응... 그게 아니라면 재밌어서?? 만화책이나 봐. 그게 더 재밌어. 으응... 우물쭈물.


김연수는 삶이 대체적으로 짐작과는 다르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소설은 짐작과 달랐던 일들의 의미를 납득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이해 안 되는 세계, 이해 안 되는 텍스트를 통해 바라볼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소설은 납득 안 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체념. 김연수 말대로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말해주는 게 소설이라면 소설은 내게 있어 일종의 자위용 텍스트였던 것 같다. 이것 참 안 풀리는 인생이구먼 껄껄, 하면서 마음이 동했던 걸까?. 이제 이해는 조금 할 것 같다. 그러나 누가 너 이런 거 왜 읽느냐고 또 물어보면 여전히 우물쭈물 거릴 것 같다. 취향이니 존중해달라고 말하는 수밖에.


글쓰기에 대해선 어쨌거나 계속 쓰라는 당연한 말을 하는데 이건 그의 다른 에세이 <소설가의 일>에도 이미 잘 나와있다. 다만 뜨끔한 구절이 있다. "글을 쓰지 않고 막연하게 써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있지 않다는 말과 마찬가지예요". 글쓰기 아니더라도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만 하는 게 얼마나 많던가. 겁나게 뜨끔하다.


계속 뭐라도 쓰면 글솜씨가 나아진다는 말은 사실이다. 나도 그런 경험을 했다. 계속 쓰다 보니까 는다. 다만 알맹이 없는 삶을 괜스레 시니컬한 척, 있어 보이게 쓰는 방향으로 엇나가는 게 문제지만... 고민 많은 척, 따뜻한 척, 시니컬한 척, 써대지만 키보드에서 손 놓으면 현실에선 저질 인간으로 돌아온다. 차라리 글을 안 쓰면 솔직한 인간으로 남을 텐데, 뭣도 아닌 글을 계속 써대니 삼중 인격쯤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정말로 언행일치 안 된다. 다 알고 있다는 듯 김연수는 말한다. "그러니까 글을 쓰기만 해도 우리는 글쓰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거지요. 생각과 행동,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일치시키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어디선가 그가 했던 "미문의 삶을 살아야 미문을 쓸 수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니까 잘 쓰려면 미문의 삶을 살아야 할 터인데, 이건 왠지 불가능하게 들린다. 마구 배설하듯 쓰고, 배설하듯 사는 건 가능하다 하하.


김연수 전작주의를 실천하려는 사람은 읽어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작가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책은 별로일 것 같고 (차라리 청춘의 문장들이나 소설가의 일이 나음), 김연수 많이 읽은 사람들에게도 동어반복처럼 느껴질 것 같은 희한한 책이다. 만 이천 원이면 조금 짜증 냈을 텐데 팔천오백 원이니 그냥 넘어가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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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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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도 사랑할 수 있고, 성욕을 느낄 수 있고, 섹스할 수 있다. 다만 알고 있어도 그것을 실제로 느끼기란 어려워서 우린 영화에서나 흘낏 보고 짐작할 뿐이다. <은교>나 <죽어도 좋아!>같은 영화가 그렇다. 그러나 단지 그것을 본다고 진정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노년을 상상할 수 있어?" 책에서 70세 케페시는 묻는다. 필립 로스는 <에브리맨>에서 '노년은 대학살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노년 전문 작가의 소설이니 제목의 의미도 대략 짐작이 된다. 죽어가는 짐승. 인간은 인지를 못 하고 있을 뿐 어느 순간에나 죽어가고 있다. 작가가 동어 반복한다고 느낄 수 있지만 잘 생각하면 같은 주제를 영리하게 변주하는 것에 가깝다. 


소설엔 관능을 넘어서 충격적인 장면이 있다. 주인공은 38살 연하 애인 콘수엘라의 과거 연애사를 듣고 격렬한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 콘수엘라의 전 남자 친구들이 했던 행위를 자신도 하고 만다 (무엇인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덜덜). 작가는 이토록 적나라한 기술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오로지 보기에 아름다운 것으로만 이루어지진 않았음을 말한다. 사랑은 때론 퇴폐적이고 또 그럼으로써 관능을 얻기도 한다. 


뇌졸중으로 죽어가는 친구 조지는 죽기 직전 아내의 가슴 앞섬을 풀어 헤치려 한다. 콘수엘라는 유방암에 걸리고 나서야 삶의 유한성을 절절히 깨닫는다. '섹스는 죽음에 대한 복수(88)'인데 섹스조차 불가능한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법칙은 오직 하나뿐이다. 죽음. 그리고 그 순간까지 없어지지 않는 욕망. 참으로 짐승 같고 명징한 이야기다.


사랑에 관한 전통적 도덕률을 거부하던 케페시는 마지막 순간에 콘수엘라에게 되돌아가려 한다. 그는 짐승 같은 사랑에 빠진 걸까, 사랑에 빠진 짐승인 걸까? 케페시의 절반도 살아보지 않은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내겐 아직 먼 이야기라고 저편으로 밀어내는 게 고작이다.

그게 비위생적이라서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역겹기 때문에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사랑에 빠지는 거라서 반대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원하는 유일한 강박, 그게 `사랑`이에요.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완전해진다고 생각하지요? 영혼의 플라톤적 결합? 내 생각은 달라요. 나는 사람은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완전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랑이 사람을 부숴버린다고. 완전했다가 금이 가 깨지는 거지요. 그 아이는 선배의 완전성 안으로 들어온 이물질이에요. 선배는 일 년 반 동안 그걸 통합하려 애쓴 거고. 하지만 그걸 몰아내기 전에는 절대 완전해지지 못해요. 그걸 없애거나 아니면 자기 왜곡을 통해 통합하거나 둘 중 하납니다. 그게 선배가 한 짓이고 선배를 미치게 만든 거예요. 1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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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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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열받게 하는 세상이지만 울분을 마음껏 쏟아내기란 어렵다. 세상은 거대하고 개인은 초라하다. 폭압을 행하는 대상에게 울분을 쏟아냈다간 도리어 자신이 위험해질 수 있다. 세상은 개인에게 참으며 살라 가르친다. 굴종이지만 그것이 너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울분이 자기를 파괴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폭발시킨 인간의 이야기가 있다.


이 책은 보수적인 1950년대에서 한 대학생이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와 압제에 울분을 쏟아내는 이야기다. 유대계 미국인 마커스 메스너는 건실한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코셔 정육점을 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삶의 성실함을 가르친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불행하지도 않은 삶이었다. 불행이 시작된다. 언젠가부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과 의심이 심해진다. 아들은 아버지를 피해 집에서 먼 대학교에 편입한다. 참을 수 없는 아버지의 집착을 피해 도달한 대학교에서도 참을 수 없는 것들이 넘쳐난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룸메이트, 새로운 방에서 만난 감정이 없는 룸메이트, 자살을 시도했던 여자 친구, 보수적이고 집요한 학생과장. 결정적으로 유대인이지만 무신론자인, 냉철한 논리만 추구하는 마커스에게 채플 수업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커스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울분을 터트린다. 전쟁에 징집되기 싫어 퇴학만은 피하려 했던 그는 학생과장과의 마지막 대담에서 더이상 참지 않는다. "좆까, 씨발"을 외친다. 마커스는 한반도의 한국 전쟁에 징집되어 죽는다. 


1950년대는 '인간의 행동은 규제할 수 있고, 규제될 것(231)'이라 생각한 사회였다. 마커스를 괴롭힌 인간들도 결국 그런 사회의 부산물이었다. 부조리의 근원은 인간을 옥죄는 사회였다. 마커스가 죽고 20년이 지나서야 그를 괴롭혔던 규제들이 풀리기 시작한다. 단지 그보다 20년을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마커스는 죽었다.


'우연한 선택이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239)'하는 세상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때론 너무나 쉽게 짓밟힌다. 인간의 본능이 짓밟히는 이야기이기에 마커스의 울분은 단순히 인쇄된 글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부조리에 저항하는 개인은 끝내 파멸하고 순응한 사람은 삶을 지킨 건 무얼 말하는 걸까. 울분을 폭발시킨 마커스는 젊은 나이에 죽고, 이혼하지 않음으로 부조리에 순응한 그의 어머니는 백 살 가까이 살았다. 웅크려야 살 수 있다. 삶의 법칙은 비정하다.

 "히스테리에 걸린 비명과 맞설 수 있겠어? 일이 그렇게 되더라도? 필사적인 호소에 맞설 수 있겠어? 고통을 겪는 사람이 너한테 자기가 원하는 거, 하지만 너는 줄 수 없는 걸 간청하고 또 간청할 때 외면할 수 있겠어? 그래, 아버지한테는 이럴 수 있지. `이건 아버지가 상관하실 일이 아니에요. 저를 내버려두세요!` 하지만 너한테 이런 일에 필요한 힘이 있을까? 너한테는 양심도 있기 때문이야. 물론 너한테 양심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만, 양심은 네 적이 될 수도 있어. 너한테는 양심도 있고 동정심도 있고 착한 마음도 있지. 그러니 말해봐라 이 아가씨 문제에서 너에게 요구될 수도 있는 일을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니? 다른 사람의 약한 곳은 강한 곳과 똑같이 너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한 사람들이라고 해를 주지 못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들의 약점이 바로 그 사람들의 힘이 될 수도 있어. 그렇게 불안정한 사람은 너한테 위험해, 마키. 덫이야." 1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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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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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이병이라는 단어가 청소년 혐오라고 한다. 놀랐다.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곰곰이 정치적 올바름을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 따지다 보면 재미있는 말 중에선 도저히 쓸 말이 없다. 중이병이라는 단어, 얼마나 재밌어! 그러나 누구나 겪는 치기 어린 시절의 설익은 생각과 행동을 두고 자신은 그러지 않았던 양 쯧쯧 중이병, 쯧쯧 급식충들, 이라고 혀를 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하든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 욕할 이유도 없다. 중이병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유치했던 과거를 떠올릴 때만 사용하면 될 것 같다. (『어이, 그 앞은 흑역사다ㅡ 』)


신형철은 '은희경은 하나의 장르'라고 말했다. 은희경이 그렇게 독보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동의는 한다. 은희경하면 유쾌 발랄함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문학이 되지 않는다. 신형철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가르치지 않으며 가르친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주제의식을 흘리는 방식은 때론 위험성을 가지기도 한다. 등장인물이 어떤 면에서 초월적 인물이거나, 현실의 고통을 겪지 않을 때 그의 목소리는 자칫 독자를 계도하거나 훈계하는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태백산맥의 김범우가 그렇다. 다들 걸쭉한 벌교 사투리 쓰는데 그 혼자 세련된 서울말을 쓴다. 그는 영어도 잘하고 싸움도 잘한다. 아버지는 대지주. 김범우의 말은 대개 맞는 말이지만 영 가르치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 에잇 기분 나빠! 금수저가 염세적으로 세상 모두를 비판한들 그것이 무슨 설득력을 가질까. 배부른 자는 고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겸손한 스탠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반면 인생에 쩔쩔매는 누군가가 취해서 늦은 후회나 같잖지만 이것만은 지키겠다는 무언가를 말한다면 어떨까. 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그 발화는 진실성 있게 다가온다 (리빙포인트 : 단, 취할 때마다 신념을 설파하는 사람은 피하는 게 좋다). 『소년을 위로해줘』의 주인공은 고등학생 강연우지만 가끔 나오는 매력적인 목소리는 주로 엄마의 몫이다. 연우 엄마는 이혼한 싱글맘이다. 그 자신도 여전히 사랑 때문에 아프고, 삶의 방식은 여전히 가끔 미숙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다. 그러므로 연우가 자신의 아들일지언정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벌은 거의 내리지 않고 가르침도 최소한이다. 가르침은 '가정식 백반에는 없는, 가정의 진정한 리얼리티(19)'와도 같다. 


연우 친구 태수와 채영이의 부모는 권위적이다. 소년들의 고민에 어른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녀가 틀 밖을 벗어나는 걸 싫어할 뿐이다. 이 설정의 대비는 전형적이라 아쉽지만 채영 아버지의 목소리는 변명의 여지를 조금 남긴다. 채영 아버지는 중년이 되어서야 남의 옷을 입고 살아왔던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못했으므로 자녀의 삶을 돌아볼 여유도 없다. 반면 연우 엄마는 언젠가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가족이 행복한 게 아니라, 각기 제 인생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족이 사이가 좋아지는 법이(213)"라고 말했다. 소년은 위로가 필요하지만 부모는 소년을 위로할 틈이 없다. 자신의 행복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복의 부재를 자녀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 악순환으로 쉽게 이어진다. 


나는 소년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요즘 러닝이나 라이딩할 때 옛날 유행가를 종종 듣는데 그중엔 H.O.T.도 있다. "난 내 세상을 내가 스스로 만들 거야. 똑같은 삶을 강요하지 마", "남과 다른 날 찾고 싶었어" 제목은 더 노골적이다. We are the future, 열맞춰. 이 반항기 가득한 가사와 제목들을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어떻게 소년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이미 아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가사도 있다. "왜 니 기준보다 서너 가지 모자라면 하등인간인가", "그 기준 법은 누가 만들었을까" 아재도 여전히 벗어나기 힘든 킬러 퀘스천이다. "한 번쯤 나도 생각했었지. 내가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를 들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열심히 열 맞추며 사는 어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열 맞추면서 여전히 열받긴 하겠지. 세상은 변하지 않으니까.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른이란 건 단지 비겁해져버린 소년이 아닐까? 난 소년들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 살기도 바쁘니까. 단, 꼰대는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 자신 열 맞추며 열받는 인간인데 어찌 어리다고 너는 열 맞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르치려 하지 마라. 은희경의 가르치지 않은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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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 스키너 : 마음의 재구성 지식인마을 31
조숙환 지음 / 김영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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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는 스키너의 심리상자로 아주 간략히 알고 있었고, 촘스키 역시 저명한 언어 학자 정도로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책 제목에 둘의 이름이 붙어 있어서 공저인 줄 알았다. 역시 그럴 리가 없었다 (ㅎㅎ). 조숙환이라는 언어 학자가 저명한 학자인 스키너와 촘스키를 중심으로 인간의 언어 습득에 관한 여러 이론을 설명한 책이었다.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인간의 마음을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언어'가 대두되고, 인간의 언어 행위와 습득에 관한 연구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1930~1940년대를 지배한 이론은 행동주의의 조건 형성 이론이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학습된 것으로 파악한 행동주의 학파의 대표 주자가 버러스 스키너였다. 


스키너는 '스키너 상자'라는 걸 고안했는데, 상자 안의 쥐가 지렛대를 누르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음식물이 제공되는 장치였다. 굶주린 쥐가 우연히 지렛대를 누르고 음식물과 같은 강화인reinforcer을 얻으면 쥐는 지렛대 누르는 행동을 반복해 음식을 얻는다. 이것이 되풀이되면 지렛대 누르기의 빈도는 증가하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이 조작적 조건화다. 


행동주의를 주창한 스키너는 인간의 언어 습득도 같은 원리로 설명했다. 스키너의 언어행동론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 행위도 타인(청자)이 매개가 되어 강화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강화인의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관심attention, 인정 approval, 애정affection, 복종submission이다. 따라서 스키너에게 언어 행위란 이러한 강화인들에 의해 조성되는 화자와 청자의 행동이다. 쉽게 말하면 아동은 환경에서 우발적으로 접하게 되는 부모나 이웃과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언어 형태를 거듭 모방함으로써 언어 지식이 형성되며, 이렇게 모방을 통해 획득된 언어 지식은 청자로부터 들은 칭찬 같은 강화 조건에 의해 발달된다는 것이다. 


반면 촘스키는 이런 스키너의 언어행동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스키너가 말한 조작적 조건 형성이나 언어행동론으로는 언어에 대한 원어민들의 지식이나 직관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촘스키는 인간의 언어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외부적 조건을 고려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도그마에 불과"할 뿐이라고 일축했다. 촘스키는 인간의 창의적 언어 능력과 인간 언어의 무한한 생산성productivity, 복잡성complexity을 역설했다. 가령 인간은 과거에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사용해본 적도 없는 "색깔 없는 녹색 사상이 분노에 떨며 잔다"와 같은 표현을 들어도 그 구조적, 의미적 적합성을 가늠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경험으로 언어가 획득된다는 스키너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촘스키는 환경이 지식의 형성에 그리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태어나면서 아동의 마음에는 새로운 언어 구조를 창출하는 기본적 과정이 선험적으로 담겨 있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인간의 경험과 무관한 인간 언어의 보편성으로 '회귀성'을 들었다. 


'영이는 [순이가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와 같이 세 개의 절로 구성된 문장을 보면, 명사구(예 : '영이', '영화'), 동사구(예 : '좋아한다', '안다'), 문장('내가 영화를 좋아한다') 등이 반복적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는데, 회귀성이란 이와 같이 동일한 구나 절이 회귀적/순환적으로 산출됨으로써 창의적으로 무한히 생성되는 언어의 특징을 의미한다.


명사구, 동사구, 문장 등의 통사 범주의 '회귀성'은 인간 언어에서만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통사 구조 체계로, 이런 순환적 구조는 선험적으로 습득되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스키너는 다소 극단적으로 마음은 텅 빈 상태로서 오직 경험 자극과 강인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학자들은 환경과 본성의 이분법적 사고보단 두 요인의 상호 작용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의 언어 능력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니면 선험적인 것일까. 책만 읽었을 땐 아무래도 선험론에 무게가 실린다.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책의 마지막엔 언어 능력을 '타인의 심성 과정에 대해 의식하는 능력'으로 규정한 '마음 이론'을 주창한 학자들이 소개된다. 사이먼 배런코언과 토마셀로가 그들인데 마음 이론 능력은 '지각 능력', '바라기/요청하기', '정서 읽기' 등 다양한 인지 능력이 발달되면서 확립된다고 말한다. 진화심리학자 하우저는 의사소통을 기본적으로 '심성 상태의 교환'이라고 말한다. 수학 시간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2, 4는?'이라고 말한다면, 이 말이 미완성 문장이라 하더라도 학생들은 주저 없이 '8요'라고 대답한다. 교사와 학생 모두 담화 상황이 학교이고 수학 시간이라는 점을 '지각'하고, 곱셈 관련 정보를 '바라고 요청하는' 화자(교사)의 의도에 청자(학생들)가 민감하게 반응해 대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오빤 내가 왜 화났는지 정말 모르겠어?'라는 질문에 이 세상 모든 남자친구들이 쩔쩔 매는 이유는 간단하다. 심성 상태의 교환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ㅎㅎ). 


인간의 인지, 정서 능력은 일반적인 생리학, 해부학으로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유력한 이론이 있을 뿐 정답은 없다. 200페이지가 살짝 안 되는 얇은 책에 언어학의 이론들이 쉽게 소개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봐도 좋겠다. 단, 재밌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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