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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중이병이라는 단어가 청소년 혐오라고 한다. 놀랐다.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곰곰이 정치적 올바름을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 따지다 보면 재미있는 말 중에선 도저히 쓸 말이 없다. 중이병이라는 단어, 얼마나 재밌어! 그러나 누구나 겪는 치기 어린 시절의 설익은 생각과 행동을 두고 자신은 그러지 않았던 양 쯧쯧 중이병, 쯧쯧 급식충들, 이라고 혀를 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하든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 욕할 이유도 없다. 중이병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유치했던 과거를 떠올릴 때만 사용하면 될 것 같다. (『어이, 그 앞은 흑역사다ㅡ 』)
신형철은 '은희경은 하나의 장르'라고 말했다. 은희경이 그렇게 독보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동의는 한다. 은희경하면 유쾌 발랄함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문학이 되지 않는다. 신형철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가르치지 않으며 가르친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주제의식을 흘리는 방식은 때론 위험성을 가지기도 한다. 등장인물이 어떤 면에서 초월적 인물이거나, 현실의 고통을 겪지 않을 때 그의 목소리는 자칫 독자를 계도하거나 훈계하는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태백산맥의 김범우가 그렇다. 다들 걸쭉한 벌교 사투리 쓰는데 그 혼자 세련된 서울말을 쓴다. 그는 영어도 잘하고 싸움도 잘한다. 아버지는 대지주. 김범우의 말은 대개 맞는 말이지만 영 가르치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 에잇 기분 나빠! 금수저가 염세적으로 세상 모두를 비판한들 그것이 무슨 설득력을 가질까. 배부른 자는 고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겸손한 스탠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반면 인생에 쩔쩔매는 누군가가 취해서 늦은 후회나 같잖지만 이것만은 지키겠다는 무언가를 말한다면 어떨까. 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그 발화는 진실성 있게 다가온다 (리빙포인트 : 단, 취할 때마다 신념을 설파하는 사람은 피하는 게 좋다). 『소년을 위로해줘』의 주인공은 고등학생 강연우지만 가끔 나오는 매력적인 목소리는 주로 엄마의 몫이다. 연우 엄마는 이혼한 싱글맘이다. 그 자신도 여전히 사랑 때문에 아프고, 삶의 방식은 여전히 가끔 미숙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다. 그러므로 연우가 자신의 아들일지언정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벌은 거의 내리지 않고 가르침도 최소한이다. 가르침은 '가정식 백반에는 없는, 가정의 진정한 리얼리티(19)'와도 같다.
연우 친구 태수와 채영이의 부모는 권위적이다. 소년들의 고민에 어른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녀가 틀 밖을 벗어나는 걸 싫어할 뿐이다. 이 설정의 대비는 전형적이라 아쉽지만 채영 아버지의 목소리는 변명의 여지를 조금 남긴다. 채영 아버지는 중년이 되어서야 남의 옷을 입고 살아왔던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못했으므로 자녀의 삶을 돌아볼 여유도 없다. 반면 연우 엄마는 언젠가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가족이 행복한 게 아니라, 각기 제 인생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족이 사이가 좋아지는 법이(213)"라고 말했다. 소년은 위로가 필요하지만 부모는 소년을 위로할 틈이 없다. 자신의 행복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복의 부재를 자녀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 악순환으로 쉽게 이어진다.
나는 소년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요즘 러닝이나 라이딩할 때 옛날 유행가를 종종 듣는데 그중엔 H.O.T.도 있다. "난 내 세상을 내가 스스로 만들 거야. 똑같은 삶을 강요하지 마", "남과 다른 날 찾고 싶었어" 제목은 더 노골적이다. We are the future, 열맞춰. 이 반항기 가득한 가사와 제목들을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어떻게 소년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이미 아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가사도 있다. "왜 니 기준보다 서너 가지 모자라면 하등인간인가", "그 기준 법은 누가 만들었을까" 아재도 여전히 벗어나기 힘든 킬러 퀘스천이다. "한 번쯤 나도 생각했었지. 내가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를 들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열심히 열 맞추며 사는 어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열 맞추면서 여전히 열받긴 하겠지. 세상은 변하지 않으니까.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른이란 건 단지 비겁해져버린 소년이 아닐까? 난 소년들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 살기도 바쁘니까. 단, 꼰대는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 자신 열 맞추며 열받는 인간인데 어찌 어리다고 너는 열 맞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르치려 하지 마라. 은희경의 가르치지 않은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