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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나를 열받게 하는 세상이지만 울분을 마음껏 쏟아내기란 어렵다. 세상은 거대하고 개인은 초라하다. 폭압을 행하는 대상에게 울분을 쏟아냈다간 도리어 자신이 위험해질 수 있다. 세상은 개인에게 참으며 살라 가르친다. 굴종이지만 그것이 너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울분이 자기를 파괴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폭발시킨 인간의 이야기가 있다.
이 책은 보수적인 1950년대에서 한 대학생이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와 압제에 울분을 쏟아내는 이야기다. 유대계 미국인 마커스 메스너는 건실한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코셔 정육점을 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삶의 성실함을 가르친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불행하지도 않은 삶이었다. 불행이 시작된다. 언젠가부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과 의심이 심해진다. 아들은 아버지를 피해 집에서 먼 대학교에 편입한다. 참을 수 없는 아버지의 집착을 피해 도달한 대학교에서도 참을 수 없는 것들이 넘쳐난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룸메이트, 새로운 방에서 만난 감정이 없는 룸메이트, 자살을 시도했던 여자 친구, 보수적이고 집요한 학생과장. 결정적으로 유대인이지만 무신론자인, 냉철한 논리만 추구하는 마커스에게 채플 수업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커스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울분을 터트린다. 전쟁에 징집되기 싫어 퇴학만은 피하려 했던 그는 학생과장과의 마지막 대담에서 더이상 참지 않는다. "좆까, 씨발"을 외친다. 마커스는 한반도의 한국 전쟁에 징집되어 죽는다.
1950년대는 '인간의 행동은 규제할 수 있고, 규제될 것(231)'이라 생각한 사회였다. 마커스를 괴롭힌 인간들도 결국 그런 사회의 부산물이었다. 부조리의 근원은 인간을 옥죄는 사회였다. 마커스가 죽고 20년이 지나서야 그를 괴롭혔던 규제들이 풀리기 시작한다. 단지 그보다 20년을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마커스는 죽었다.
'우연한 선택이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239)'하는 세상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때론 너무나 쉽게 짓밟힌다. 인간의 본능이 짓밟히는 이야기이기에 마커스의 울분은 단순히 인쇄된 글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부조리에 저항하는 개인은 끝내 파멸하고 순응한 사람은 삶을 지킨 건 무얼 말하는 걸까. 울분을 폭발시킨 마커스는 젊은 나이에 죽고, 이혼하지 않음으로 부조리에 순응한 그의 어머니는 백 살 가까이 살았다. 웅크려야 살 수 있다. 삶의 법칙은 비정하다.
"히스테리에 걸린 비명과 맞설 수 있겠어? 일이 그렇게 되더라도? 필사적인 호소에 맞설 수 있겠어? 고통을 겪는 사람이 너한테 자기가 원하는 거, 하지만 너는 줄 수 없는 걸 간청하고 또 간청할 때 외면할 수 있겠어? 그래, 아버지한테는 이럴 수 있지. `이건 아버지가 상관하실 일이 아니에요. 저를 내버려두세요!` 하지만 너한테 이런 일에 필요한 힘이 있을까? 너한테는 양심도 있기 때문이야. 물론 너한테 양심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만, 양심은 네 적이 될 수도 있어. 너한테는 양심도 있고 동정심도 있고 착한 마음도 있지. 그러니 말해봐라 이 아가씨 문제에서 너에게 요구될 수도 있는 일을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니? 다른 사람의 약한 곳은 강한 곳과 똑같이 너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한 사람들이라고 해를 주지 못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들의 약점이 바로 그 사람들의 힘이 될 수도 있어. 그렇게 불안정한 사람은 너한테 위험해, 마키. 덫이야." 1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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