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자유다 -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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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이 이런데 문학이 자유롭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느냐,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워워, 시국에 삶을 잡아먹히면 안 된다. 시국이 무거워서 질문은 못 받아도 삶의 자유는 누려야지. 게임에서 얻든지, 음악에서 얻든지, 술에서 얻든지, 문학에서 얻든지. 수전 손택은 말했다. "문학은 더 큰 삶, 다시 말해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게 해주는 여권"이라고. 캬, 권위자가 이렇게 멋지게 말해주면 내 궁상맞은 취미 생활도 고급한 것으로 바뀐다. 그러니까, 하품하며 넓적 다리나 긁으면서 책 읽다 졸다 하던 내가 자유의 날개 달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라고 부대에 갇힌 채로 책을 읽고 쓴다)

올해에만 수전 손택을 세 권 읽었다. 그는 늘 자신이 소설가로 불리길 원했다고 하지만 내게는 일종의 사상가와 같다. 앞선 두 권의 책으로 그에게 경도됐다고 하면 조금 오버일까? 어쨌거나 작가에 대한 믿음만으로 책을 샀으니 경도란 단어가 무거우면 팬심 정도로 가볍게 설명하지 뭐.

뉴욕 지성계의 여왕. 그를 수식하는 말이다. 뉴욕, 지성, 여왕. 각각을 떼어놔도 대단한데 자그마치 세 가지 최고의 콤비네이션이다. 치열한 지적 사유, 단호한 문장, 다수의 논리에 맞서는 당당함, 풍부한 예술 취향. 정말 멋지다. 이런 멋진 사람은 백 살쯤 살아서 글을 많이 썼어야 하는데. 유방암도 이겨낸 그는 안타깝게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70살에 죽는다. 죽기 직전까지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삶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고 하니 글과 삶이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열렬한 팬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책은 살짝 별로였다. 책이 그의 퇴고를 거치지 않은 유고집이라 그런지 하나의 주제로 수렴하지 않는다. 1부는 그가 줄곧 쓰던 비평들이고, 2부는 9.11 이후 보인 미국의 야만성에 대한 비판이다. 3부는 각종 문학상 시상식의 연설문이다. 이전 작들이 줬던 묵직한 메시지는 없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몇몇 메시지는 여전히 날카롭다. 가톨릭교회 성추문 사건에서 교황이 가톨릭교회를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에 비유했을 때, 그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수십 장의 글을 썼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본질 자체에서 저절로 나오지만 예술의 아름다움은 이상화 역사의 일부이며,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내적/외적', '고급한/저급한' 같은 이원적 개념으로 받아들인 까닭은 아름다움의 판단이 도덕적 판단에 종속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아름다움이 인간이 만든 정신의 산물에서 비롯됐다면, 그것이 윤리와 어떻게 분리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교황 이야기는 잠깐 하고 넘어가지만 독자는 알 수 있다. 수전 손택이 차분하게 가톨릭 교황을 '멕였다'는 것을.

<은유로서의 질병>이나 <타인의 고통>에서 봤듯이 그는 정치적 올바름의 화신과도 같다. 그런 그가 9.11 이후 한쪽으로 무섭게 쏠린 복수의 논리에 경계의 목소리를 냈던 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반대 의견을 내면서도 자신의 주장이 작가로서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야말로 새길만하다. "작가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이란 순전히 우연한 것"이며 "연예인 문화의 한 양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장은 주장 자체의 논리에 힘을 얻어야지 주장하는 이의 권위에 힘을 얻어선 안 될 일이다. 노래 잘 부른다고, 남 좀 웃긴다고, 아니면 자신이 무엇에 권위 있다고 권위 없는 분야에 성실한 비논리를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한편으론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정당한 대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는 데 공모한 사람이 많았다고. 진실과 정의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면 진실을 선택하겠다고. 멋지다. 어렵기 때문에 멋지다. 우리는 진실을 위해 국가를, 그것이 너무 크다면 자신이 속한 집단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물리적 실천이 어렵다면 적어도 글의 윤리에서라도. 이건 끝까지 어려울 것이다.

지금 편하게 손가락 놀릴 동안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선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 고통스러운 일을 일일이 알 수 없으니 그것에 일일이 반응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과 연민까지 부정할 순 없다. 인간 정신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외연을 넓히는 건 무엇보다도 문학의 역할일 것이다. 아, 제 말이 아니라 작가의 말이 대충 이렇다고요.

두서없는 책이라고 서평도 두서 없이 써버렸다. 올해가 아직 한달 더 남았지만 내 올해의 사상가로 수전 손택을 선정한다. 왜냐하면 더 심오한 책을 읽기는 귀찮으니까 하핫. 아니 그보다도 12월엔 문학보다 술로 자유를 찾아야 마땅하니까. 농담이다. 내 취미에 이렇게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사람을 어찌 숭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학은 세계를 넓힌다. 문학은 자유다. 아아 멋져라. 이상 블랙아웃 전문가 쥬드의 리뷰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나 화합에 이르게 된다면 그 모델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오래된 대립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결과일 것입니다. ‘문명‘과 ‘야만‘의 대립은 그것이 아무리 어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그냥 그렇게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숙고하고 권위 있는 척하며 말하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대립은 진짜고 뿌리 깊은 것이며 우리가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중심에 있습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과 방향 감각의 영원한 두 축입니다. 낡은 것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낡은 것에는 우리의 과거, 지혜, 기억, 슬픔, 현실 감각 모두가 들어 있으니까요. 새로운 것에 대한 믿음 없이도 살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에는 우리의 활기, 낙관할 수 있는 능력, 맹목적인 생물학적 갈망, 화해할 수 있게 하는 치유력인 망각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2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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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를 먹는 시간
방현석 지음 / 창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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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알았는데 후일담 문학이란 게 있었다. 뭐에 대한 후일담인가 하느냐면, 지나간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에 대한 후일담이다. 이 소설집에는 네 개의 소설이 수록돼 있는데 대개 플롯은 이렇다. 80-90년대 운동에 몸담았던 주인공은 세상에 등 떠밀려 이전 같지 않다. 그리고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한 무기력한 사람이다. 서사를 가로지르는 정서는 물론 패배감이다. 이런 주인공과 병치되는 인물은 아직도 신념을 지키는 사람이다. 신념을 지키는 사람을 통해 자신을 반추하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여기서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역할은 바뀌어도 좋다. (ㅎㅎ)


좋은 문장도 몇 개 눈에 들어오고, '운동'에 대한 작가의 신념도 존중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서 소설이 유치해진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말하는 방식이 특히 그러한데, 이거 되게 촌스러운 연출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선명한 선악 구분과 의도가 빤히 보이는 노골적 대사들이 못내 아쉽다. 지금의 노조나 운동은 많이 변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변했다. 이 소설들이 쓰인 9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는 그래도 공감할 여지가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현재로서는 시의성을 잃은 소설의 한계가 뚜렷하게 느껴진다.

"전쟁중에 우린 사람들을 만나면 서로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것도 영원히. 처음 만난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가장 먼저 드냐 하면 말이야, 내가 저 사람을 앞으로 두 번은 더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세 번? 그 안에 우린 대부분 죽게 마련이니까. 살아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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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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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소설집을 이민자 소설이라 부르는 것에 반대했다. 이게 이민자 소설이면 나머지는 토착민 소설 아니느냐고. 정치적 올바름의 측면에선 응당 그렇다. 그러나 거의 모든 소설이 미국으로 이민 간 인도인의 생활을 소재로 하는 데 이걸 뭐라 불러야 하나. 난 그냥 쉽게 이민자 소설이라 부르련다. 그러나 이 소설집이 좋은 건 이민자들의 애환 같은 것을 다뤘기 때문은 아니다. 작품 면면에 묻어나는 보편적 관계와 사랑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이 소설집을 돋보이게 만든다.

쉬운 독법. 이 소설집을 이민자 소설로 읽는 방법. 그럼 인도 사람 상상하기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인도엔 안 가봤지만 영상과 사진에서 본 인도 사람을 떠올린다. 인도 여인은 왠지 발목까지 내려오는 사리를 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가르마를 타고, 이마엔 점을 찍었을 것 같다. 반면 인도 남자는 왠지 수학에 재능 있는 공학도이며 양복을 입었을 것 같다. 물론 둘 다 소고기는 먹지 않고 집에선 손으로 식사하기도 할 것이다. 할리우드나 발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이런 모습이 소설에서도 재현된다.

소설집의 대부분은 이런 전형적 전통을 품고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미국은 풍요 그 자체인데 인도는 가난하다. 그들의 인성과 재능에 상관없이 외모와 생활 습관으로 판단된다. 이것들을 이겨내는 이야기는 당연히 뭉클하다.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의 여자아이는 파키스탄 이주민 아저씨를 바라보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 밖에도 전통을 온순하게 지키며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는 모습이나, 타지 생활의 서러움을 겪고 한 세대를 일궈낸 후의 담담한 소회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것들이 각별하게 좋게 다가온다면 과장되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절제된 감정의 이야기는 독자가 등장인물의 삶을 조금 더 깊게 고찰할 수 있게 한다. 순간의 격한 감정이 포개질 때 발생하는 공감은 마음을 치지만 어쩐지 신뢰할 수는 없다. 조금 떨어져 조심스럽게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신뢰할 수 있는 공감이 생기지 않을까. 근거야 순전히 나의 감일뿐이지만 난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왠지 좋다.

두 번째 독법. 이민자 소설이란 생각을 버리고 읽는 방법. 이야기 속 거의 모든 커플이 묘한 권태와 무력감에 시달린다. <일시적인 문제>의 부부는 정전이라는 일시적인 문제에 직면해서 단절된 부부 관계라는 일시적이지 않은 문제를 깨닫는다. 그것을 정전의 해소와 더불어 쉬운 해결로 밀고 갔으면 일종의 판타지가 됐을 텐데 작가는 냉정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야기 말미에서 부부는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결정적인 비밀을 이제야 공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제 다시 시작하겠다는 뜻인가? 아니다. 결정적인 이별을 예감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고백이 있다. 누구나 그 마지막 잊히지 않는 순간들을 품고 살 것이다.

<질병 통역사>의 다스 부인의 고백도 같은 맥락이다. 다스 부인의 치명적인 고백은 ˝흔해 빠지고 사소한 비밀˝같이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비밀들이 예기치 않게 터져 나올 때, 삶은 흔들린다. 다스 부인의 고백을 듣는 통역사는 말한다 ˝다스 부인, 당신이 느끼는 건 정말 고통입니까, 아니면 죄책감입니까?˝ 이건 결정적인 질문이다. 우리의 고백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얄팍한 방책일 때가 많다. <섹시>에선 두가지 혼외 정사 이야기가 흐른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하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 사랑의 시작과 끝에 결정적 계기는 없다. 대개 우리들 사랑이 그런 것처럼. 게다가 ˝이건 그녀에게도 그의 아내에게도 공정하지 않˝다는 말은 어떤가. 남자의 쉬운 사랑법 뒤에 남은 여자의 생각이다. 어차피 이것도 사랑이라면 윤리보단 감정의 공정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사랑의 논리다.

그러므로 이 글들을 읽은 나는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줌파 라히리 이혼‘을 검색해볼 수밖에. 이런 감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뭔가 사랑에 호되게 데인 사람일 것 같지 않나? (ㅎㅎ). 그러나 그가 이혼했다는 말은 찾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썼던 니콜 크라우스 부부는 이혼했다. 관계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조심스럽게 사랑할 수 있고 관계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은 사랑하다 끝내 지치고 마는 걸까? 그보다도 사랑도 일종의 소진되는 감정이라 인정한다면,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 아니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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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미러링 - 혐오의 시대와 메갈리아 신드롬 바로보기
박가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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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을 파헤쳤던 젊은 진보 논객 박가분의 최근작이다. 이번엔 메갈리아/워마드를 분석했다. 혐오의 미러링이란 그들 스스로 설명하는 그들의 행동 논리이자 양태다. 의문은 남는다. 미러링 형식을 취했어도 어쨌거나 혐오 맞지 않는가? 미러링이면 혐오는 정당화될까?

인터넷부터 실생활까지 여성 혐오는 공기와도 같다. 만연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박 대통령의 길라임 차명에 모두가 웃음을 참지 못 했다. 이것도 여성 혐오다.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는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라임은 로맨스의 주인공이고 당연히 성애화된(sexualized) 여성이다. 대통령과 길라임을 포갤 때 많은 사람들이 마주치는 어떤 불균형이 이 드립의 핵심적 유머 코드라면 거기엔 틀림없이 전형적인 미소지니가 개입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글의 첫 댓글에서 한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늙은 여자가 여자이려 할 때 모두의 조롱이 된다"고.

상폐녀,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이런 인터넷 워딩을 넘어서 실생활에서도 도저한 멸시, 차별, 유리천장. 난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깨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아니다. 메갈리아 싫어하는 편에 훨씬 가깝다. 그러나 메갈리아의 탄생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고 늘 생각한다. 일베가 오만한 진보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듯이 메갈리아도 만연한 여성 혐오의 필연적 대항으로 탄생했다고 본다. 저자는 이것도 사후 합리화/정당화라고 2014년 남연갤 역사부터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맞는다고 해도 메갈리아가 여성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얻고 일부 계층의 남성들에게까지 지지를 얻은 데엔 여성 혐오의 지분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부당하게 억압받는 계층의 권리 주장은 그 자체로 진보 담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손이상 문화운동가는 "진보 담론이 여성주의의 대의를 공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의당 남성 당원 탈당 사태를 비롯한 여러 사태를 볼 때 대다수 진보 남성은 더 이상 메갈리아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엔 여성들조차 많은 수가 메갈리아를 지지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현 시점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혐오인가 혐오의 미러링인가. 미러링의 기치를 내세운 혐오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초창기 우스꽝스러운 아저씨 말투 흉내를 넘어서 현재의 미러링은 이런 수준까지 왔다. 유치원 남자 아동을 보고 "좆린이 핑잦 따먹고 싶다"고 말하는가 하면 구의역 지하철 희생자를 두곤 "탈김치 됐는데 축하해줄 일"이라고 말한다. 양보해서 미러링이라 해도 언어폭력의 수위는 이미 혐오 그 자체에 도달했다. 그리고 메갈리아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는 그들이 여성 혐오 주체들과 단지 남성이라는 것 말고 무엇을 공유하는가. 성姓만 공유할 뿐 여성 혐오 주체는 아닌 무고한 타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미러링은 정반사가 아닌 난반사다.

메갈리아에게 면죄부가 있다면 이들의 위악적 언사(그렇게 믿고 싶다)는 실제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다는 점일 것이다. 위악적 표현이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심각한 죄는 아닐 것이다. 저자는 범죄학 교수 브라이언 레빈을 인용하며 '생명 경시 발언은 오프라인 상의 폭력과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104)'고 말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애초에 물리적 완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남녀 사이의 폭력에서 희생자는 주로 여자였다. 메갈리아/워마드가 탄생한지 1년이 넘었는데 오프라인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행하는 폭력이나 살인이 유의미하게 늘었다는 보고나 기사가 있나? 오프라인의 폭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는 어디까지나 논리의 층위일 뿐, 아직 오프라인에서 그것이 느껴지진 않는다. 면죄부를 넘어선 메갈리아의 순기능도 있다. 인터넷의 거친 남성들은 이제 메갈리아와 같은 수준으로 여성을 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선 메갈리아/워마드가 여전히 어떤 대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런 쌍방 이성 혐오의 원인엔 인터넷 공론장이 붕괴했기 때문이란 분석을 내놓는다. 인터넷 상의 커뮤니티들은 자유롭게 교류되지 않는 섬-우주 형태를 띤다. 남초 커뮤니티, 여초 커뮤니티란 말에서 드러나듯 각자의 공론장만 가질 뿐 공유할 수 있는 공론장은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런 인터넷 지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인터넷 상에서 상대방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만큼 아무에게나 나의 상상 속에 있는 적대적 이미지를 상대 집단에 무차별적으로 투사하곤 한다. 바로 거기서 '미러링'의 논리가 나오는 것이다.(139)"

저자는 현상의 원인 중 하나를 또래문화의 결핍으로 설명한다. 미국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프롬prom 파티라는 고등학교 졸업 문화가 흔하게 나오는데 여기서 젊은 10대 남녀는 서로의 짝을 찾아 춤추곤 한다. 이런 자연스러운 이성간의 교류가 미국에서는 일반적인 성인식인데 한국에선 남녀가 공유할 수 있는 또래문화가 없다. 그래서 남자 아이들이 섹드립이나 게임 이야기 외에도 또래집단과 놀고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교류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문화적 교류의 공간이라는 모호한 단어는 무엇인가. 어쩐지 뜬구름같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저자도 그것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특정하지 않고(못하고) 넘어간다.

저자의 결론은 뚜렷하다. 메갈리아/워마드는 현시점에서 대의를 잃었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뭐 이걸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느냐고 따지면 가만히 있어야겠지만 이 관점은 내가 속한 집단에게도 적용된다. 나는 의사집단의 눈쌀 찌푸려지는 투쟁 방식을 싫어하고 때론 경멸하기까지 한다. 전해 들은바에 따르면, 당연 지정제 의료 보험 제도 하에서 겪는 의사 집단의 불이익을 설명하는 만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민에게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고 꾸중하듯 계도하려는 대사가 주를 이뤘다는 것이다. 의사들의 투쟁이란 대개 이렇게 한숨이 나오는 멍청한 방식이다. 의사들의 영원한 적 (ㅎㅎ) 한의사 집단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공식 문서나 발표에선 한방/무당 운운해선 안 될일이다. 우리가 정통이라면 점잖게 팩트로 반박하며 국민을 설득시키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의견이 갈리는 상황에서 과도한 분노는 지지층의 결집만 이뤄낼 뿐 중도는 등 돌리게 만든다. 효율이 떨어지는 투쟁 방법이다.

아아... 페미니즘의 대의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 어쩌다 보니 그만, 너무나 재밌게 읽어버렸다 ㅎㅎ. 한남충이라 어쩔 수 없나보다. 안철수 식으로 말하면 이건 농담이지만 진담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남성이고 메갈리아에 동의할 일은 없을 테니 술술 읽었을 테지. 단, 지엽적인 부분에서 어색한 논리가 보이기도 했다. 메르스에 감염될 것이라는 공포심이 혐오 발언으로의 집단적인 퇴행을 낳았다는 분석(212p)에선 근거가 빈약하지 않은가하는 의문이 들고, 강력 범죄 피해자는 남성이 더 많다는 저자의 주장(222p)에선 남성 대 여성 폭력 사건의 가해자 피해자 비율을 살펴보는 게 더 옳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리는 매끄럽고 인용하는 근거는 정확해 보인다. 특히 혐오의 미러링은 결국 당사자가 배제되는 공감 능력의 독점화/도구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분석은 현 세태의 문제를 적확하게 요약하며 비판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지형도 분석에 탁월한 저자는 일베와 메갈리아 이후에 어떤 현상 진단을 내놓을까. 기대되는 젊은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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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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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 상을 수상한 이언 매큐언의 1989년 작품입니다. 이 양반 책은 묘사가 너무 꼼꼼해서 읽기가 왠지 힘들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 년 사이 이언 매큐언을 세 권이나 읽은 건 왜일까요. 분명히 그의 작품엔 찾아 읽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언 매큐언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초반부터 배경과 인물을 공들여 설명하고, 캐릭터의 행동 논리를 탄탄하게 쌓아올립니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결구력과 감동을 극대화합니다. 이 작품도 그런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책장을 덮었을 때 느끼는 감정도 여전했습니다.

이 작품은 2차 세계 대전 후 동서로 갈린 베를린을 배경으로 합니다. 실제 1956년 있었던 '베를린 터널' 사건을 소재로 했습니다. 영국 체신국 직원이었던 젊은 남성 레너드 마덤이 비밀 터널 첩보 작전에 투입되어 겪는 이야기죠. 제가 서평을 쓸 때 웬만하면 내용을 요약하고 의미를 발굴해내고자 하는데 이 책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고, 그래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미리 말하면 재미없는 책 있지 않습니까. 딱 그것입니다. 대신 두루뭉술하게 말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소설은 젊은 남성의 치기와 어설픈 자기 확신이 사랑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와 진정성 있는 사과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래저래 이언 매큐언은 남자가 공감할 수 있는 젊은 남자의 찌질함을 고급스럽게(ㅎㅎ) 서술하는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조금 지루한데 중반 이후에 주인공과 애인의 삶을 뒤엎을만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야기의 호흡이 갑자기 빨라지고, 독자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사건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잘 생각해보니 소설 초반부에 흘리듯 이야기했던 복선이 교묘하게 작용한 것입니다. 거짓 이야기에도 논리와 당위성을 부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소설가이고, 치밀하고 꼼꼼하게 이야기를 쓰는 이언 매큐언은 그 점을 가장 잘 해내는 작가입니다. 『속죄』처럼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소설은 아니지만, 끈끈한 서스펜스가 가득해 이야기의 재미 자체는 좋습니다.

젊은 남녀가 각자 조국의 폭력적 과거에 등을 돌리고 함께하려 하는데, 삶은 끝까지 둘을 방해합니다. 왜 삶의 진실을 그때는 모르고 지금에서야 알 게 되는 걸까요.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마음을 확인하는 건 분명 클리셰지만, 이런 기품 있는 클리셰라면 환영입니다. 레너드와 마리아에게 당신들의 삶은 무고했다 말해주고 싶군요.

무르게 응어리진 밀폐 공간 속에 있다보니 냄새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갓 깎은 잔디 같은 땀냄새. 날카로우면서도 모난 데 없고 톡 쏘는 동시에 둔탁한 두 요소가 혼재된 그녀의 흥분이 풍기는 촉촉한 냄새ㅡ과일과 치즈의 냄새, 바로 욕망 그 자체의 맛. 1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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