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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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소설집을 이민자 소설이라 부르는 것에 반대했다. 이게 이민자 소설이면 나머지는 토착민 소설 아니느냐고. 정치적 올바름의 측면에선 응당 그렇다. 그러나 거의 모든 소설이 미국으로 이민 간 인도인의 생활을 소재로 하는 데 이걸 뭐라 불러야 하나. 난 그냥 쉽게 이민자 소설이라 부르련다. 그러나 이 소설집이 좋은 건 이민자들의 애환 같은 것을 다뤘기 때문은 아니다. 작품 면면에 묻어나는 보편적 관계와 사랑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이 소설집을 돋보이게 만든다.

쉬운 독법. 이 소설집을 이민자 소설로 읽는 방법. 그럼 인도 사람 상상하기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인도엔 안 가봤지만 영상과 사진에서 본 인도 사람을 떠올린다. 인도 여인은 왠지 발목까지 내려오는 사리를 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가르마를 타고, 이마엔 점을 찍었을 것 같다. 반면 인도 남자는 왠지 수학에 재능 있는 공학도이며 양복을 입었을 것 같다. 물론 둘 다 소고기는 먹지 않고 집에선 손으로 식사하기도 할 것이다. 할리우드나 발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이런 모습이 소설에서도 재현된다.

소설집의 대부분은 이런 전형적 전통을 품고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미국은 풍요 그 자체인데 인도는 가난하다. 그들의 인성과 재능에 상관없이 외모와 생활 습관으로 판단된다. 이것들을 이겨내는 이야기는 당연히 뭉클하다.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의 여자아이는 파키스탄 이주민 아저씨를 바라보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 밖에도 전통을 온순하게 지키며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는 모습이나, 타지 생활의 서러움을 겪고 한 세대를 일궈낸 후의 담담한 소회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것들이 각별하게 좋게 다가온다면 과장되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절제된 감정의 이야기는 독자가 등장인물의 삶을 조금 더 깊게 고찰할 수 있게 한다. 순간의 격한 감정이 포개질 때 발생하는 공감은 마음을 치지만 어쩐지 신뢰할 수는 없다. 조금 떨어져 조심스럽게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신뢰할 수 있는 공감이 생기지 않을까. 근거야 순전히 나의 감일뿐이지만 난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왠지 좋다.

두 번째 독법. 이민자 소설이란 생각을 버리고 읽는 방법. 이야기 속 거의 모든 커플이 묘한 권태와 무력감에 시달린다. <일시적인 문제>의 부부는 정전이라는 일시적인 문제에 직면해서 단절된 부부 관계라는 일시적이지 않은 문제를 깨닫는다. 그것을 정전의 해소와 더불어 쉬운 해결로 밀고 갔으면 일종의 판타지가 됐을 텐데 작가는 냉정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야기 말미에서 부부는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결정적인 비밀을 이제야 공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제 다시 시작하겠다는 뜻인가? 아니다. 결정적인 이별을 예감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고백이 있다. 누구나 그 마지막 잊히지 않는 순간들을 품고 살 것이다.

<질병 통역사>의 다스 부인의 고백도 같은 맥락이다. 다스 부인의 치명적인 고백은 ˝흔해 빠지고 사소한 비밀˝같이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비밀들이 예기치 않게 터져 나올 때, 삶은 흔들린다. 다스 부인의 고백을 듣는 통역사는 말한다 ˝다스 부인, 당신이 느끼는 건 정말 고통입니까, 아니면 죄책감입니까?˝ 이건 결정적인 질문이다. 우리의 고백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얄팍한 방책일 때가 많다. <섹시>에선 두가지 혼외 정사 이야기가 흐른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하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 사랑의 시작과 끝에 결정적 계기는 없다. 대개 우리들 사랑이 그런 것처럼. 게다가 ˝이건 그녀에게도 그의 아내에게도 공정하지 않˝다는 말은 어떤가. 남자의 쉬운 사랑법 뒤에 남은 여자의 생각이다. 어차피 이것도 사랑이라면 윤리보단 감정의 공정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사랑의 논리다.

그러므로 이 글들을 읽은 나는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줌파 라히리 이혼‘을 검색해볼 수밖에. 이런 감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뭔가 사랑에 호되게 데인 사람일 것 같지 않나? (ㅎㅎ). 그러나 그가 이혼했다는 말은 찾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썼던 니콜 크라우스 부부는 이혼했다. 관계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조심스럽게 사랑할 수 있고 관계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은 사랑하다 끝내 지치고 마는 걸까? 그보다도 사랑도 일종의 소진되는 감정이라 인정한다면,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 아니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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