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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 상을 수상한 이언 매큐언의 1989년 작품입니다. 이 양반 책은 묘사가 너무 꼼꼼해서 읽기가 왠지 힘들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 년 사이 이언 매큐언을 세 권이나 읽은 건 왜일까요. 분명히 그의 작품엔 찾아 읽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언 매큐언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초반부터 배경과 인물을 공들여 설명하고, 캐릭터의 행동 논리를 탄탄하게 쌓아올립니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결구력과 감동을 극대화합니다. 이 작품도 그런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책장을 덮었을 때 느끼는 감정도 여전했습니다.
이 작품은 2차 세계 대전 후 동서로 갈린 베를린을 배경으로 합니다. 실제 1956년 있었던 '베를린 터널' 사건을 소재로 했습니다. 영국 체신국 직원이었던 젊은 남성 레너드 마덤이 비밀 터널 첩보 작전에 투입되어 겪는 이야기죠. 제가 서평을 쓸 때 웬만하면 내용을 요약하고 의미를 발굴해내고자 하는데 이 책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고, 그래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미리 말하면 재미없는 책 있지 않습니까. 딱 그것입니다. 대신 두루뭉술하게 말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소설은 젊은 남성의 치기와 어설픈 자기 확신이 사랑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와 진정성 있는 사과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래저래 이언 매큐언은 남자가 공감할 수 있는 젊은 남자의 찌질함을 고급스럽게(ㅎㅎ) 서술하는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조금 지루한데 중반 이후에 주인공과 애인의 삶을 뒤엎을만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야기의 호흡이 갑자기 빨라지고, 독자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사건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잘 생각해보니 소설 초반부에 흘리듯 이야기했던 복선이 교묘하게 작용한 것입니다. 거짓 이야기에도 논리와 당위성을 부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소설가이고, 치밀하고 꼼꼼하게 이야기를 쓰는 이언 매큐언은 그 점을 가장 잘 해내는 작가입니다. 『속죄』처럼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소설은 아니지만, 끈끈한 서스펜스가 가득해 이야기의 재미 자체는 좋습니다.
젊은 남녀가 각자 조국의 폭력적 과거에 등을 돌리고 함께하려 하는데, 삶은 끝까지 둘을 방해합니다. 왜 삶의 진실을 그때는 모르고 지금에서야 알 게 되는 걸까요.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마음을 확인하는 건 분명 클리셰지만, 이런 기품 있는 클리셰라면 환영입니다. 레너드와 마리아에게 당신들의 삶은 무고했다 말해주고 싶군요.
무르게 응어리진 밀폐 공간 속에 있다보니 냄새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갓 깎은 잔디 같은 땀냄새. 날카로우면서도 모난 데 없고 톡 쏘는 동시에 둔탁한 두 요소가 혼재된 그녀의 흥분이 풍기는 촉촉한 냄새ㅡ과일과 치즈의 냄새, 바로 욕망 그 자체의 맛. 1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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