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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맛
하성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0월
평점 :
한 시절의 기억은 감각과 함께한다. 냄새, 맛, 음악은 기억의 한 장면에 찍힌 인장과도 같다. 원리를 따지면 장기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hippocampus)가 감정과 감각을 통합하여 저장하기 때문이지만, 왠지 이과충의 설명인 것 같아 재미는 없다. 그냥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놓는 게 낭만적이다. 불현듯 어떤 샴푸 냄새를 맡고 그제야 속 깊었던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 같은 거. 물론 나는 그런 거 없다. 전공의 시절 오프 나가면 혼자 먹었던 부추 가득 넣은 수육 국밥 특자나, 금요일 밤이면 의국에 다 같이 모여 시켜 먹었던 달콤 짭짤 찜닭 같은 기억뿐이다 ㅎㅎ.
한 시절을 견디게 해주는 감각이 있을까? 고작 음식의 맛이나 향으로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절을 위로하는 감각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표제작 <여름의 맛>의 화자는 지쳐있던 시절 교토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복숭아를 나눠먹는다. 연락처도 나누지 않고 헤어진 남자의 얼굴은 희미해져 기억도 안 나지만 달콤했던 복숭아 맛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화자는 잡지 여름 특집을 위해 김 선생을 인터뷰한다. 암에 걸린 김 선생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젊어서 죽었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김 선생은 어머니를 묻고 내려오던 길에 먹었던 콩국이 몹시 간절하다. 이런 삶에서 우리의 기억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우리는 '복숭아 한 알처럼 사소한 것'에 휘둘리는가. 화자는 남자가 말했던 복숭아를 찾아 떠난다.
<카레 온 더 보더>의 화자는 십수 년을 함께 한 애인과 카레 집에 들어갔다가 카레 향을 맡는 순간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다. 에어로빅 강사로 지내던 시절 영은이란 친구의 기억이다. 하루는 밤새 술 마시고 영은의 집에 묵었는데 자신의 상상과 다르게 영은은 아주 가난했다. 영은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노인들을 부양하고 지냈다. 영은이 노인들 요강 비우던 손으로 카레를 만들고 밥을 뜨는 걸 보고 비위는 상하지만 왠지 끝까지 카레를 먹고 토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식당에서의 회상이 끝난 후 화자는 속물적이고 비겁한 애인과 헤어진다.
이 논리적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기억들은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친다. 소설을 <현재 - 과거의 기억 - 현재>라는 플롯으로 간단히 도식화하면, 기억을 거친 뒤의 현재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고작 기억 하나를 관통했을 뿐이지만 지금 현재는 이전과는 다른 현재다. 이처럼 과거의 기억은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로 기능하기도 한다. 모두가 속물인 세상에서 속물로 살지 않았던 영은이에 대한 기억이 애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것처럼. 영은이의 카레를 토할 수 없었던 화자는, 이제 시원한 쌍욕을 토해내고 애인과 헤어질 수 있다.
미치도록 싫었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무덤덤히 돌아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감정의 덧칠 때문일 수도 있지만, 원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데엔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알파의 시간>의 화자가 '나만의 알파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아버지의 간판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기억이란 결국 우리가 지나온 시간인데, 지금 이 순간을 미래에서 바라보면 그것 역시 통과하고 있는 알파의 시간일 것이다. 우린 어떤 시간을 통과해왔는가? 복숭아든 카레든 수육국밥이든 어떤 과거를 통과해왔든지 상관없이 분명한 건, 그 시절을 견뎠던 건 우리 자신이라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앞으로도 우리는 지난 시간을 온전히 미워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풍경을 응시했다. 이제 간판의 계집아이가 나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이 세잔을 보듯 나의 간판이 나를 보고 있었다. 한 시인은 자신의 산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잔이 그 풍경을 받아들일 눈을 가지는 데에는 그때까지의 유럽 미술사의 모든 시간 플러스 알파가 필요했다고. 그 알파란 세잔이 시대보다도 앞질러 달렸던 바로 그만큼의 시간이 아니겠느냐고.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간판을 볼 수 있기까지 나에게도 나만의 알파의 시간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돌고 돌아 그 간판 앞에 서기까지 그 알파의 시간이 좀 길었을 뿐이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을 응시했다. 1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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