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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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고 왠지 이터널 선샤인이 생각나서 다시 봤다. 사실 십여 년 전 감상할 땐 거의 잤기 때문에 처음 봤다고 해야겠다. 이제라도 제대로 봤으니 남들과 이터널 선샤인에 대해 말 섞을 계제가 된 것 같다. 감독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기억은 소중하지만 그것이 사라져도 사랑하던 우리는 다시 사랑하게 되어 있다고. 될놈될, 안될안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좀 잔인한 영화인 것 같다 ㅎㅎ.


김연수도 소설의 테마로 사랑에 대한 기억을 선택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소설가 진우는 친구 광수의 아내가 될 선영을 십삼 년 전 사랑했었다. 광수가 결혼한다며 선영을 소개할 때 진우는 화를 낸다. 그리고 결혼 전의 선영에게 찝쩍댄다. 그러나 십삼 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다 이제야 "선영아 사랑해"를 외치는 것인가. 이런 진우의 사랑은 믿을 수 있는가.

 

선영은 유혹 당하다가도 진우가 말하는 사랑의 거짓을 눈치채고 현명하게 내친다. 진우는 <얄미운 사람>이라는 노래를 희진 선배를 위해서도 부르고 선영을 위해서도 불렀다. 촌스럽지만 진우식 사랑의 세레나데인 것인데 세상에서 유일한 선영의 것이 아니니 선영이 정색하는 건 당연할 수밖에. 선영은 "사랑이란 한 번 사랑했다는 기억만으로 영원할 수 있(116)"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우는 선영을 사랑한다 말만 하지 정작 제대로 된 사랑의 기억이 없다. 고작 선영에게 다른 여자를 위한 눈물만 보였을 뿐. 찌질한 진우 안녕. 그거 사랑 아니야.


이 진우란 인간은 소설에서 가장 찌질한 인간인데 전략적 자기 비하가 담긴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로 보인다. 진우는 사랑에 대한 그럴듯한 이론을 선보인다. 진우는 술자리에 후일담 소설들은 형상 기억 브래지어나 마찬가지라고 일갈한다. 자기 젖은 AA로 쪼그라든지 오래인데 아직도 D컵 브래지어를 잡고 있다고. 새로 AA 컵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에 제 자신의 사랑 방식이 속하는 줄은 모르는 아둔함은 어찌할 것인가. 그러므로 진우가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47)'은 당연하다. "또라이 새끼(29)"다.


그러니까, 발화되는 감정은 믿을만하지 못하고 오로지 감정을 증거하는 기억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사랑했던 기억이 없었으니 사랑도 없었던 것(107)"이란 말은 너무 단순하지만 곱씹을만하다. 세상 모든 땅이 법정도 아닌데 사랑에도 증거주의라니. 왠지 무시무시한 논리 같지만, 현명하게 사용하면 찌질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전 남(여)친의 기억을 지우자. 특히 전화번호를 지우자. 당신이 술을 좋아한다면 필사적으로 지우자. 이 단순한 행위는 "오밤중에 사랑이라니, xx야. 이제 와서. 너 내가 우습게 보이냐"라는 허탈/짜증/노기가 골고루 믹스된 말을 듣지 않게 해줄 것이다.


이상 흑역사 전문가 쥬드의 리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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