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가 들려준 이야기 - 인류학 박사 진주현의
진주현 지음 / 푸른숲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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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커리큘럼에 비교 해부학, 해부학이 있기 때문에 토끼 뼈와 사람 뼈를 만져보긴 했다. 일단 예과 2학년 최대 고비 토끼 뼈 맞추기가 있다. 조원들 집 중에서 희생양이 될 자취방을 뽑고, 그 집에서 불쌍한 토끼를 삶는다. 그리고 살을 발라내고 뼈를 다시 맞춰 붙이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진다. 간혹 토끼 뼈 조그만 게 몇 개 없어져서 치킨을 시켜 먹고 그 뼈를 붙였다는 전설이나, 젓가락이나 손가락보단 혀가 살 바르는 데 제일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긴 했지만 우리는 정도를 밟았다. 다 맞추고 나니 토끼라기보단 왠지 공룡 같아서 다 같이 웃었던 기억이다.


본과 일학년 들어가기 전 겨울방학엔 골학(osteology)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7박 8일 동안 18시간 정도의 잠을 세 번에 나눠 자며 뼈 공부를 하는 과정이었다. 굳이 이런 혹독한 스케줄로 공부할 필요는 없으나 통과의례 같은 전통이었다. 뼈는 206개뿐이지만 뼈의 세세한 indication, 통과 구조물, 부착 구조물까지 합치면 외울 게 만 개도 넘었을 것이다. 끝나곤 Calvaria에 소주 담아 마시는 사발식을 했다. 지금은 거의 까먹었지만(이럴 거면 왜!) 아직 라틴어 근육 이름 같은 것을 어렵지 않게 말할 수는 있다. 예를 들면 Gluteus maximus. 로마 장군 이름 같지만 엉덩이에 붙은 큰 근육, 대둔근이라는 식. 그렇게 겨울방학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본과 진입했으나 실제 시체 해부는 너무 하기 싫어서 만날 딴짓 했다. 간신히 유급 면했다 ㅎㅎ.


이 책은 내가 배웠던 진절머리나는 골학/해부학과는 거리가 멀다. 책에 담긴 뼈와 관련된 풍부한 인류학적 상식, 과학사는 의사가 아니더라도 아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가령 위시본(wishbone)은 새의 V자형 쇄골인데 소망 뼈란 이름은 어디서 기원했는지, 같은 것들. 책을 읽고 생각해보니 만날 시승기 동영상에서 듣던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도 새의 쇄골 모양을 했기 때문이었다 (빙고!). 한국에만 있는 산후조리(sanhujori) 문화가 속설대로 인종 간 골반 구조 차이 때문이었는지도 몹시 궁금했었는데 그것도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에 의하면 골반 구조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골반뼈 구조 차이는 없다 (그러니 남녀 모두에게 당당히 쓸 수 있는 출산/육아휴직을 보장해 달라!).


책 후반부엔 한국의 뼈 연구 실태에 대한 저자의 안타까움이 나온다. 여타 과학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은 망자의 뼈로 하는 연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뼈 표본 확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시신 기증이야 그렇다 쳐도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골도 이전에는 족족 화장해버렸다고 하니 얼마나 기가 막힌가.


거의 다 잊어만 가는 의학/생물학 지식을 복기해볼 수 있어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내게 이 책은 과학의 아름다움으로도 읽힌다. 글의 아름다움은 새벽 두시 감성 에세이에만 있지 않다. 실증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어려움과 그걸 딛고 해낸 발견의 기쁨, 그리고 그것이 인류를 한 걸음 진보시킨 기록은 정말 아름답다. 결국 인류의  발전은 실증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며 이과 우월론자의 서평을 마쳐본다. (농담! ㅎㅎ)

멜라닌 세포는 피부색뿐만 아니라 눈동자 색도 결정한다. 호주의 까무잡잡한 원주민들이 선글라스 끼는 걸 본 적이 있으신지? 그에 비해 파란 눈의 백인들은 해가 많이 나지 않는 날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한국 사람이나 호주의 원주민처럼 눈동자가 갈색인 사람들은 눈동자에 유멜라닌이 많다. 검은 피부가 천연 자외선 차단제인 것처럼 검은 눈동자는 천연 선글라스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날에도 그걸 참지 못할 정도로 눈을 부셔하지는 않는다. 그에 비해 백인의 파란 눈은 유멜라닌이 없어서 검은 눈동자보다 햇빛에 훨씬 민감하다. 유난히 피부가 하얀 내 동생은 햇빛에 나가면 특히 눈부셔 한다.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을 보면 해가 있는 곳에서는 늘 얼굴을 잔득 찌푸리고 있다. 아무래도 피부와 눈동자에 모두 유멜라닌 색소 양이 적은 게 틀림없다. 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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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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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많이 쓰지만 정작 읽지 않은 책의 서평은 잘 읽지 못한다. 내용을 서평으로 먼저 접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줄거리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서평이 따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잘 읽히는 서평이 있는데, 그것은 서평 자체로도 좋은 하나의 이야기라는 특징이 있다. 책의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보다 읽은 사람이 재해석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좋은 서평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즉, 책을 안 읽은 사람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서평이 좋은 서평이라는 생각이다. 서평가 금정연도 말했다. 좋은 서평은 좋은 서평 이전에 좋은 글이라고. 그렇게 쓰려고 노력하나 늘 어렵긴 하다 ㅎㅎ.

물론 신형철은 서평가가 아닌 저명한 문학 평론가다. 일전에 읽은 <몰락의 에티카>는 무시무시한 두께에다 수록된 글도 엄정한 형식의 정통 평론이었다. 솔직히 읽기 어려웠고 남에게 선뜻 읽어보라 권하기도 어려운 책이었다. 반면 <느낌의 공동체>에 수록된 글은 비평이나 평론의 위치에서 조금 내려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이나 서평에 가깝다. 시나 책을 읽지 않아도 잘 읽히는 좋은 글인 건 물론이다. 아니, 정정한다. 아주 좋은 글이라고.

그가 왜 많은 평론가 중 독보적으로 대중에게 사랑받는지 알 수 있었다. 책엔 정홍수 문학 평론가의 <소설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페이지가 있다. 거기서 그는 문학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문학평론을 문학답게 만드는가. 그는 좋은 글을 만드는 힘의 90퍼센트는 통찰과 논리가 감당하지만 그것에만 기댄다면 그 글은 그냥 좋은 칼럼, 보고서, 논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평론이 문학이 되려면 나머지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내면과 문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홍수 문학 평론가를 높이는 말이었지만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가령, 책의 이런 대목을 보자.

"화염병은 시가 될 수 있지만 시는 화염병이 될 수 없다. 이 긴장을 포기하면 시는 사라지고 만다. (166)"

그가 말하는 문학이다. 끝끝내 화염병을 던지지 않고 절제해야 문학이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소설가 양귀자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했다.

"내 소설을 꼼꼼하게 읽어주는 한 독자는 그래서 좀더 분명한 메시지를 담을 만도 하지 않느냐고 바라기도 했지만 나는 그 지적의 타당함을, 지름길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애써 둘러가는 것이 소설의 길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같은 뜻이다. 화염병을 끝내 던지지 않는 끈질긴 긴장감을 포기해버린다면 문학은 김수영이 김지하의 시를 두고 혹평했 듯 '인민군 혁명가'와 비슷한 무엇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평론이나 감상은 그 긴장을 조금은 놓아도 된다. 아니, 시인과 소설가가 끝내 절제한 말을 전달해서 독자의 마음을 더 흔들어 놓는다면 그야말로 평론의 좋은 역할일 것이다. 책에서 이런 문단을 본다.

<이 덤덤한 듯 원숙한 기교 아래로 사무치는 진심이 흐른다. 시인이 끝내 절제한 그 문장을 경박한 내가 대신 써야겠다. "세상의 모든 정은씨, 살아서, 꼭 살아서 행복하십시오." 123p>

고백하는데 난 책 읽고 우는 타입이 아니다. 다만 거의 울뻔한 적은 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었을 때였다. 여전히 울지 않았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근 이십 년 만에, 이 칼럼의 매듭을 보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문학에 대한 감상이 그것을 읽는 자를 흔들 때 감상문은 또 다른 완벽한 문학이 된다.

비단 문학뿐 아니라 영화나 미술, 혹은 음악을 감상한 뒤 그것에 대한 감상을 글로 옮겨서 남과 공유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좋은 작품은 읽은 사람에게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다. 혼자 느끼기엔 몹시 아쉽다. 이 감정의 총체를, 어렵지만, 독자들과 글로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느낌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문학이 향하는 우리 공동체를 바라보는 진중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선량한 문장들을 읽은 후 생겨난 감정이 읽은 사람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고 단언할 순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독서의 감동을 삶에서 구현되지 않는, 위선적이고 얄팍한 감상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선하게 살자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느낌의 공동체 구성원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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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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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류시화 시인은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에게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말했다. 이 시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 정도로 읽어도 되겠지만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 만약 곁에 있는 그대와 그리운 그대가 다른 사람이라면 어떨까. 삶엔 그런 위험한 순간이 때때로 찾아온다.

책엔 많은 불륜 커플이 나온다. 왜 그들은 한 관계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걸까. <오대산 하늘 구경>의 여자는 "자신만 알고 있는 내면의 어떤 결핍"이 누구에게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후에 남자는 "결핍을 공유"하기 때문에 너와 함께 있으면 위안이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결혼으로 결핍을 충족하려 하지 않을까. 그보다도, 왜 자신의 결핍을 버리지 못할까. 정신적 결핍은 채워질 수 없고, 이미 그 자체가 자아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한 자아는 행복해지길 두려워한다. <보리>의 여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생각한다. '아침이 오면 당신과 헤어져야겠지만, 내 어찌 너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떠나지만 미워하지 못할 사람들. 가끔 통속적인 삶에서 헤매는 우리 모습이기도 하다.

2.
읽으며 사랑의 윤리 같은 건 따지지 말고 잠시 내려놓자. 윤대녕 소설 읽을 땐 이건 소설이니까,라고 퉁치면 된다. 인물들의 대사도 오글오글 간질간질 문어체인데 그것도 그냥 이건 소설이니까,라고 퉁치면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이를테면 이런 대사들.

"훗날 바위를 치며 서로 후회하게 될 거요."

"그럼 나와 성을 쌓은 일은 어떻게 하고?"

"부장님 저 정말, 좋아하세요?"
"거듭 말하면 숲에 숨어 있는 새들이 모두 날아갈 텐데."

"내세에서 다시 만나 전생처럼 눈비가 내리는 날이면 보다 고요하면서도 격렬한 사랑을 나누도록 하자. 커다란 하얀 냉장고에 붉은 사과가 가득 들어차 있는 집에서 말이야."

"호텔 안에 다람쥐 두 마리가 들어왔으니 그만 일어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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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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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이다. 이 소설이 문학상 공모전에 입상하며 하루키의 소설가 인생이 시작됐다. 전통에서 벗어난 소설 양식을 두고 '이걸 소설로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농후했다고' 한다. 그때 심사위원들은 하루키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가 될 줄 몰랐겠지 흐흐.

짧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 에피소드 외에 간간이 다른 이야기들이 지나간다. 하루키의 글쓰기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 주인공의 친구 '쥐', 지역 라디오 DJ, 가상의 작가 하트필드의 이야기도 하나하나 뭉클하다. 지역 라디오 디제이가 불치병 투병 중인 청취자의 사연을 읽고 그 환자가 내려다봤다는 항구에 가서 울음을 터트렸다는 이야기가 특히 좋았다. 디제이는 청취자를 동정해서 눈물을 흘린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 말한다 "나는, 여러분을, 좋아한다." 위로에서 동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간단하고 분명하다.

어쨌든 청춘엔 필연적인 상실이 있고 누구라도 그것을 섣불리 위로할 수 없는 법이다. 소설 속 가상의 작가 하트필드의 소설에서 화성의 말하는 바람은 주인공에게 말한다. "말하고 있는 건 자네지. 나는 자네의 마음에 힌트를 주고 있을 뿐이야." 바람이 마음속에서 휘이, 소리 내며 지나갔을까? 이 장면은 영화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킨다. 유지태는 아픈 이별을 겪고 난 후 바람 소리를 녹음한다. 그리고 웃음 짓는다. 유지태는 바람의 노래 속에서 무엇을 들었을까. 소설 주인공은 이야기 말미에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바람의 노래를 통해 들은 것이 자신의 목소리든, 무엇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도 있음을 알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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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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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신비로운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달은 더 이상 신비롭지 않게 된다. 인간은 달에도 발을 내디뎠으므로. 소설은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여름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세 남자의 놀라운 인생 이야기를 말한다. 더 이상 달은 신비롭지 않지만, 때론 밤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삶은 여전히 달빛 아래 있다.

 

소설의 제목 '달의 궁전'은 중식당 이름이다 (꿈의 궁전이었다면 러브호텔이었을 텐데 ㅋ). 소설 속 달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걸까? 주인공 포그의 외삼촌은 Moonlight moods라는 밴드에서 연주하다가 서쪽으로 향한다. 외삼촌은 서쪽에 닿지 못하고 심장 마비로 죽는다. 혼자가 된 포그는 자학적으로 살아가다 삶을 포기하려는 듯 중식당 달의 궁전에서 마지막 식사를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진다. 그는 괴짜 노인 에핑을 만나고 그의 말벗으로 고용된다. 에핑의 명령으로 박물관에서 랠프 블레이크록의 그림 <Moon light>를 본다. 그는 달을 '다른 세상을 내다보는 하얀 구멍'으로 느낀다.

 

포그의 외삼촌도, 에핑도, 이야기 말미의 포그와 바버도 모두 서쪽으로 향한다. 그들의 삶은 보름달처럼 풍성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믐달처럼 쪼그라들기도 했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으로, 막연하지만 그들에겐 꼭 도달해야 했던 삶의 목표와 같다. 모두 서쪽에 닿지 못 했지만 포그만은 걸어서 미국의 서쪽 끝 해변에 도달한다. 모든 걸 잃은 그에겐 달랑 몸뚱어리 하나 남았지만 그는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 여기가 내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라고 생각한다. 해변엔 보름달이 떠오른다.

 

달은 그믐에 소멸했다가도 다시 보름이 되면 충만하고, 또다시 소멸한다. 모두 잠든 밤에만 빛나는 달은 그 자체로 피고 지는 인간사를 은유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엔 부질없는 인간사를 무심히 내려다보는 '하느님의 눈 (103)'이 되었다가, 그저 '마지막 장면을 비춰줄 보름달(336)'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은 사람에겐 이제 달의 의미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놀라운 이야기들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힘을 긍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중식당 달의 궁전 포천 쿠키에서 나온 쪽지에 적힌 문장은 이렇다. '태양은 과거이고, 지구는 현재이고 달은 미래다'. 서쪽 끝에서 해는 지지만 달은 떠오른다. 끝내주게 재밌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 정도면 다 된 것 같구나. 책, 체스 세트, 사인, 잡동사니들, 양복. 이제 나는 내 왕국을 처분했고 만족스럽다. 나를 그런 눈으로 볼 필요는 없다. 나는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고, 그렇게 한 것이 기쁘니까. 너는 좋은 녀석이다, 필리어스. 그리고 내가 어디에 있건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을 거야. 당분간 우리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떠나겠지. 하지만 조만간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난 그러리라고 믿는다. 너도 알 테지만 결국에는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모든 일이 다 연결될 거야. 아홉 행성의 궤도, 아홉 행성들, 아홉 번의 이닝, 아홉 번의 삶. 그걸 생각만 해봐라. 조화는 끝이 없다. 하지만 이 실없는 소리는 하룻밤으로 충분해. 이제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잠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다. 자, 손을 내밀어 봐라. 그래, 바로 그거다. 아주 단단히 쥐고, 그렇게. 자, 이제 흔들자. 그래, 됐다. 작별의 악수. 우리를 끝까지 지탱해 줄 악수. 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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