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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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신비로운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달은 더 이상 신비롭지 않게 된다. 인간은 달에도 발을 내디뎠으므로. 소설은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여름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세 남자의 놀라운 인생 이야기를 말한다. 더 이상 달은 신비롭지 않지만, 때론 밤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삶은 여전히 달빛 아래 있다.

 

소설의 제목 '달의 궁전'은 중식당 이름이다 (꿈의 궁전이었다면 러브호텔이었을 텐데 ㅋ). 소설 속 달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걸까? 주인공 포그의 외삼촌은 Moonlight moods라는 밴드에서 연주하다가 서쪽으로 향한다. 외삼촌은 서쪽에 닿지 못하고 심장 마비로 죽는다. 혼자가 된 포그는 자학적으로 살아가다 삶을 포기하려는 듯 중식당 달의 궁전에서 마지막 식사를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진다. 그는 괴짜 노인 에핑을 만나고 그의 말벗으로 고용된다. 에핑의 명령으로 박물관에서 랠프 블레이크록의 그림 <Moon light>를 본다. 그는 달을 '다른 세상을 내다보는 하얀 구멍'으로 느낀다.

 

포그의 외삼촌도, 에핑도, 이야기 말미의 포그와 바버도 모두 서쪽으로 향한다. 그들의 삶은 보름달처럼 풍성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믐달처럼 쪼그라들기도 했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으로, 막연하지만 그들에겐 꼭 도달해야 했던 삶의 목표와 같다. 모두 서쪽에 닿지 못 했지만 포그만은 걸어서 미국의 서쪽 끝 해변에 도달한다. 모든 걸 잃은 그에겐 달랑 몸뚱어리 하나 남았지만 그는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 여기가 내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라고 생각한다. 해변엔 보름달이 떠오른다.

 

달은 그믐에 소멸했다가도 다시 보름이 되면 충만하고, 또다시 소멸한다. 모두 잠든 밤에만 빛나는 달은 그 자체로 피고 지는 인간사를 은유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엔 부질없는 인간사를 무심히 내려다보는 '하느님의 눈 (103)'이 되었다가, 그저 '마지막 장면을 비춰줄 보름달(336)'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은 사람에겐 이제 달의 의미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놀라운 이야기들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힘을 긍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중식당 달의 궁전 포천 쿠키에서 나온 쪽지에 적힌 문장은 이렇다. '태양은 과거이고, 지구는 현재이고 달은 미래다'. 서쪽 끝에서 해는 지지만 달은 떠오른다. 끝내주게 재밌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 정도면 다 된 것 같구나. 책, 체스 세트, 사인, 잡동사니들, 양복. 이제 나는 내 왕국을 처분했고 만족스럽다. 나를 그런 눈으로 볼 필요는 없다. 나는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고, 그렇게 한 것이 기쁘니까. 너는 좋은 녀석이다, 필리어스. 그리고 내가 어디에 있건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을 거야. 당분간 우리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떠나겠지. 하지만 조만간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난 그러리라고 믿는다. 너도 알 테지만 결국에는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모든 일이 다 연결될 거야. 아홉 행성의 궤도, 아홉 행성들, 아홉 번의 이닝, 아홉 번의 삶. 그걸 생각만 해봐라. 조화는 끝이 없다. 하지만 이 실없는 소리는 하룻밤으로 충분해. 이제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잠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다. 자, 손을 내밀어 봐라. 그래, 바로 그거다. 아주 단단히 쥐고, 그렇게. 자, 이제 흔들자. 그래, 됐다. 작별의 악수. 우리를 끝까지 지탱해 줄 악수. 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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