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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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많이 쓰지만 정작 읽지 않은 책의 서평은 잘 읽지 못한다. 내용을 서평으로 먼저 접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줄거리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서평이 따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잘 읽히는 서평이 있는데, 그것은 서평 자체로도 좋은 하나의 이야기라는 특징이 있다. 책의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보다 읽은 사람이 재해석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좋은 서평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즉, 책을 안 읽은 사람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서평이 좋은 서평이라는 생각이다. 서평가 금정연도 말했다. 좋은 서평은 좋은 서평 이전에 좋은 글이라고. 그렇게 쓰려고 노력하나 늘 어렵긴 하다 ㅎㅎ.

물론 신형철은 서평가가 아닌 저명한 문학 평론가다. 일전에 읽은 <몰락의 에티카>는 무시무시한 두께에다 수록된 글도 엄정한 형식의 정통 평론이었다. 솔직히 읽기 어려웠고 남에게 선뜻 읽어보라 권하기도 어려운 책이었다. 반면 <느낌의 공동체>에 수록된 글은 비평이나 평론의 위치에서 조금 내려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이나 서평에 가깝다. 시나 책을 읽지 않아도 잘 읽히는 좋은 글인 건 물론이다. 아니, 정정한다. 아주 좋은 글이라고.

그가 왜 많은 평론가 중 독보적으로 대중에게 사랑받는지 알 수 있었다. 책엔 정홍수 문학 평론가의 <소설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페이지가 있다. 거기서 그는 문학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문학평론을 문학답게 만드는가. 그는 좋은 글을 만드는 힘의 90퍼센트는 통찰과 논리가 감당하지만 그것에만 기댄다면 그 글은 그냥 좋은 칼럼, 보고서, 논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평론이 문학이 되려면 나머지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내면과 문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홍수 문학 평론가를 높이는 말이었지만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가령, 책의 이런 대목을 보자.

"화염병은 시가 될 수 있지만 시는 화염병이 될 수 없다. 이 긴장을 포기하면 시는 사라지고 만다. (166)"

그가 말하는 문학이다. 끝끝내 화염병을 던지지 않고 절제해야 문학이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소설가 양귀자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했다.

"내 소설을 꼼꼼하게 읽어주는 한 독자는 그래서 좀더 분명한 메시지를 담을 만도 하지 않느냐고 바라기도 했지만 나는 그 지적의 타당함을, 지름길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애써 둘러가는 것이 소설의 길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같은 뜻이다. 화염병을 끝내 던지지 않는 끈질긴 긴장감을 포기해버린다면 문학은 김수영이 김지하의 시를 두고 혹평했 듯 '인민군 혁명가'와 비슷한 무엇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평론이나 감상은 그 긴장을 조금은 놓아도 된다. 아니, 시인과 소설가가 끝내 절제한 말을 전달해서 독자의 마음을 더 흔들어 놓는다면 그야말로 평론의 좋은 역할일 것이다. 책에서 이런 문단을 본다.

<이 덤덤한 듯 원숙한 기교 아래로 사무치는 진심이 흐른다. 시인이 끝내 절제한 그 문장을 경박한 내가 대신 써야겠다. "세상의 모든 정은씨, 살아서, 꼭 살아서 행복하십시오." 123p>

고백하는데 난 책 읽고 우는 타입이 아니다. 다만 거의 울뻔한 적은 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었을 때였다. 여전히 울지 않았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근 이십 년 만에, 이 칼럼의 매듭을 보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문학에 대한 감상이 그것을 읽는 자를 흔들 때 감상문은 또 다른 완벽한 문학이 된다.

비단 문학뿐 아니라 영화나 미술, 혹은 음악을 감상한 뒤 그것에 대한 감상을 글로 옮겨서 남과 공유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좋은 작품은 읽은 사람에게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다. 혼자 느끼기엔 몹시 아쉽다. 이 감정의 총체를, 어렵지만, 독자들과 글로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느낌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문학이 향하는 우리 공동체를 바라보는 진중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선량한 문장들을 읽은 후 생겨난 감정이 읽은 사람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고 단언할 순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독서의 감동을 삶에서 구현되지 않는, 위선적이고 얄팍한 감상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선하게 살자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느낌의 공동체 구성원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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