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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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온통 폭력적이다. 재개발 예정의 가난한 마을에서 자란 형제는 걸핏하면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당한다. 두 아이는 걸핏하면 씨발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폭력은 씨발됨으로 표현한다. 두 형제의 아버지는 이런 어머니의 폭력은 방관하고 재개발에서 그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보상을 받는데에만 집중한다. 툭하면 형제를 때리던 어머니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맞고, 추운 겨울에 발가벗겨진 채 집 밖으로 쫓겨났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그 폭력을 방관했다. 형제의 어머니를 망가트린 가정 폭력은 그렇게 대물림된다.

앨리시어는 친구를 때리던 친구의 아버지를 몽둥이로 흠씬 두드려 팬다. 그의 손에는 폭력의 촉감이 생생하게 남았고 그는 그것이 뿌듯하다. 키우던 개의 새끼를 어미 앞에서 잡아먹는 잔인한 사람들이 살던 마을에선 부실 공사로 하수 처리장의 하수가 넘친다. 마을엔 온통 악취가 배고 동생은 사라진다. 자 여기서 야만적인 건 누구일까요.

폭력의 대물림은 문학에서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클리셰가 아니라 적나라한 현실이다. 얼마 전에 가스 배관을 타고 탈출한 16kg 체중의 11살 소녀의 이야기를 기사로 읽었다. 소녀를 굶기고 때리던 아버지는 자신도 어렸을 때 비슷한 학대를 당했다고 진술했다던가. 가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게 세상이라지만 이건 좀체 믿을 수 없어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야만적인 세상이다.

형제가 똑같이 저능하다고 대놓고 뒷말을 한 이웃들, 허락도 없이 감을 따먹는다고 욕을 퍼부었던 이웃, 사탕을 훔쳤다고 손목을 비틀고 눈을 부라렸던 이웃, 지나가는 척하며 앨리시어의 집에서 나는 소리를 몰래 듣고 간 이웃들, 앨리시어는 그들의 열매, 물건을 향해 돌을 던지고 난폭한 새끼가 된다. 저능한 새끼에서, 저능한 것도 모자라 난폭한 새끼가 된다. 저능한 것도 모자라 난폭한 새끼는 좋다. 저능하지도 않으면서 난폭하거나, 무능한데다 난폭하지도 못한 새끼보다는 좋다고 앨리시어는 생각한다. 가시처럼 뾰족한 인간이 되어 고모리를 돌아다닌다. 1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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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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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제목은 델리스파이스의 노래 『챠우 챠우』의 반복되는 후렴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 보려 하는데도,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 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계속 반복된다. 이게 가사의 전부다 (ㅎㅎ). 고아를 곧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김영하는 검은 꽃, 퀴즈쇼에 이어 또 고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아주 특별했던 제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다. 교감하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때론 엉뚱한 상상으로 동규의 행동을 예측하고 자신의 분노를 사물에 투사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과 동물의 고통에 반응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 진실한 태도 자체가 공감이 부족한 시대에서 제이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에필로그에서는 Y가 소설가에게 "그냥 들어"라고 말한다. 소설 안의 인물들이 하는 말을 입을 다물고 들으라 말한다. 소설가는 소설을 뒤엎으며 소년들의 분노에 다시 귀 기울였다. 소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요즘은 타인의 고통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걸 넘어 그것을 냉소하는 걸 마주하기까지 한다. 나도 그랬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말뿐인 위로를 건네고, 말뿐인 공감을 하려 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으려 아무리 애쓴다 한들 결코 고통이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목소리를 들으려 애쓴 적조차 없을 때가 많았다. 나는 '척'만 하는 의사일 때가 많았다. 친절한 척. 안타까운 척.  

 

김영하는 아이들의 분노에 대한 어른의 미안함을 이 소설로 전한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마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귀 기울여 목소리를 들어 보라 말한다.  

"난 이해받고 싶은 게 아니야. 열받게 하려는 거지. 세상은 우리를 미워해. 왜냐하면 우리가 존나 부럽거든. 우리가 배달이나 다니고 검정고시 공부나 하면서 찌그러져 있어야 마음이 편안데, 신호도 차선도 무시하고 꼴리는 대로 달리잖아. 밤늦도록 집에도 안 들어가고. 꼰대들이 그렇게 침 흘리는 어린 여자애들 뒤에 태우고 다니고. 그러니 죽이고 싶은 거지. 걔들이 우리를 이해 못 하는 것 같아? 아니야. 이해 잘해. 그래서 미워하는 거야." 1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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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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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 그것들의 이면을 발견하고 나서야 나의 이해가 실은 오해였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이면을 발견했을 때의 당혹감은 어떨까. 아버지가 하는 일이 이런 거였어? 어머니에게 숨겨진 애인이?? (ㅎㅎ)

 

이 소설은 이런 당혹감들을 말한다. 부유한 강남의 한 가정에서 어느 날 막내 아이가 사라진다. 막내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감추고 살았던 과거와 이면을 알게 된다. 생명 윤리는 고려되지 않는 장기 밀매. 질척거리는 첫사랑과의 관계. 어긋난 첫째와 둘째. 결정적으로 촉망받던 바이올린 유망주 막내에겐 아무도 바이올린을 좋아하느냐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이 콩가루 집안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돌이켜보면 이런 진실들은 감춰진 것이 아니다. 그 실체를 마주하기 두려워 애써 외면해버린 것에 다름 아니다. 너는 모른다 나를. 나는 모른다 너를. 이 소설은 통속적이고 뻔한 플롯을 취하고 있지만 읽는 자신과 그 주변, 가족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엄마는 짱깨였고 엄마의 딸인 아이도 짱깨였다. 짱깨가 아닌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였다. 그것이 폭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었다. 맞서 싸우기 위한 완벽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어금니를 꽉 물고 참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섣부르게 주먹을 내질렀다가 제풀에 위태로이 비틀거리는 꼴을 목격당하는 건 더 치명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는 내면의 동요를 감추는 기술을 조금씩 배워갔다. 지상의 모든 아이들이 결국 그러하듯이. 1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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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미숙하게 사랑하고 헤어졌었다. 싸울 때 내 잘못을 잘 인정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 사과도 잘 하지 않았다. 말을 할수록 악에 받친 말만 튀어나왔다. 널 증오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때는 침묵으로 마지막 화해의 가능성을 단호하게 뿌리쳤으므로 미숙한 건 마찬가지였다. 오랜 다툼과 권태에 지쳐 헤어질 땐 슬픔이나 후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를 한 번 숙이면 되는데 미숙한 감정으로 스스로 그걸 거부해 이별하고 말았을 땐, 너무 아팠다. 돌이킬 수 있었으므로 그것은 후회와 같은 말이다. 다 지나간 일이다.

『체실 비치에서』는 한순간의 감정으로 이별한 남녀의 이야기다. 남녀는 혼전순결을 지키고 결혼한다. 남자는 여자와의 첫날밤만을 고대하고, 최고의 첫날밤을 위해 나름대로 준비과정까지 거친다 (직접 확인하시길ㅋ). 그러나 여자는 불감증이다. 생리적으로 키스와 섹스를 두려워한다. 둘 다 미숙했으므로 첫 정사는 실패로 돌아간다. 여자는 해변으로 뛰쳐나간다. 모멸감에 휩싸인 남자는 곧 여자를 쫓아나간다. 해변에서 만나 다시 이야기하지만 말할수록 쌓였던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 분명 돌이킬 수 있는 순간이 있었으나, 한번 엇나간 말들은 주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첫날밤에 헤어진다.

심플한 이야기다. 간단한 서사를 위해 감정과 행위의 묘사에 집중한다. 농밀하다. 아예 한 챕터는 모조리 섹스의 묘사다. 그것도 고풍스럽게 정성 들인 문장들로. 그야말로 장인의 솜씨다 (ㅎㅎ). 『속죄』를 읽었을 땐 이런 스타일이 조금 답답하기도 했지만 역시 이로 인해 결말의 회한은 극대화되는 것 같다. 장단점이 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살며 느낀다. 조금 철들었다 싶으면 이미 다 지나간 뒤다. 미숙했던 시절 나의 ‘체실 비치‘는 어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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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2-02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공감하는 말인데요, 곰곰 생각해보면, 알고 있는 것보다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고요, 지식이 아니라 마음씀씀이가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

쥬드 2016-12-03 15:47   좋아요 1 | URL
넵 동의합니다 ㅎㅎ 말씀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사람들은 다 가면을 쓰고 살아요. 선생님도 그렇잖아요? 말은 거짓을 만들고, 마음은 진실을 만드는 거예요.˝라고 2009년 3월 21일의 일기에 적혀있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정신과 실습 때 만난 환자가 했던 말이다. 어떤 맥락에서 저런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 말을 곱씹을 때면 마음 한편이 뜨끔하긴 마찬가지다. 나도 가면을, 그것도 상황에 맞게 여러 개를 번갈아 쓰며 살기 때문이다.

『가면의 고백』은 동성애 성향을 가진 ‘나‘의 성장담이다. 다섯 살 때 분뇨 수거하는 젊은 남성에게 동경을 느끼고, 열세 살 땐 젊은 순교자 남성의 반 나신 그림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보고 사정한다. 중학교 2학년 땐 거친 남성미를 풍기는 동급생 오미에게 사랑을 느낀다. 화자는 이런 동성애 경향을 철저히 숨기고 산다. 성년이 되었을 때 친구 여동생 소노코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지만, 키스한 후 여성에게선 성적인 느낌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노코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소설 속 ‘나‘는 내면과 가면 사이에서 방황한다. 소노코가 사랑이 담긴 편지를 보내왔을 때 그것을 보고 질투할 정도다. 자신은 느낄 수 없는 이성에 대한 진짜 사랑을 편지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이 뒤집어쓴 가면이 자신의 본질이 되길 갈망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가면의 고백‘이란 말은 형용 모순이다. 고백이란 가면을 벗는 일이다. 작가는 과연 그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 소설은 가면이 결코 내 본질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렇지만 끝까지 가면을 벗을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자의 좌절의 기록이다.

소설 속 ‘나‘의 고백은 어떤 독자를 상정하고 쓴 것이다. 이 글을 남긴 ‘나‘는 글을 완성한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미시마 유키오는 ˝고백의 본질은 불가능이다. 살에까지 파고든 가면, 살집이 달린 가면만이 고백을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고백은 정말 진실한 고백일까. 내 약점, 치부를 모두 드러내는 고백을 하고 후련하다며 살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 경우, 고백은 최소한 남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준으로 윤색된다. 내 치부를 다 보여주는 진실한 고백은 작가의 말대로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렇기에 ‘나‘의 고백은 죽기 전 마지막 생의 기록이 아니었을까. 미시마 유키오는 45세에 할복자살했다. 할복자살 직전의 외침 ‘천황폐하 만세‘도, 그가 꿈꾼 불가능한 세상에 대한 마지막 고백이 아니었을는지. 삶에 안주한다는 건 내 가면-페르소나-과 스스로 적당히 타협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라고 고뇌에 찬 서평을 쓴 쥬드는 노트북을 덮고 현실에선 또 찌질거립니다.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는군요. 내일 돈까스에 양주 콜? 쥬드는 가면입니다. 전 대체로 고뇌와는 거리가 멉니다. 헤헿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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