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다 가면을 쓰고 살아요. 선생님도 그렇잖아요? 말은 거짓을 만들고, 마음은 진실을 만드는 거예요.˝라고 2009년 3월 21일의 일기에 적혀있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정신과 실습 때 만난 환자가 했던 말이다. 어떤 맥락에서 저런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 말을 곱씹을 때면 마음 한편이 뜨끔하긴 마찬가지다. 나도 가면을, 그것도 상황에 맞게 여러 개를 번갈아 쓰며 살기 때문이다.
『가면의 고백』은 동성애 성향을 가진 ‘나‘의 성장담이다. 다섯 살 때 분뇨 수거하는 젊은 남성에게 동경을 느끼고, 열세 살 땐 젊은 순교자 남성의 반 나신 그림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보고 사정한다. 중학교 2학년 땐 거친 남성미를 풍기는 동급생 오미에게 사랑을 느낀다. 화자는 이런 동성애 경향을 철저히 숨기고 산다. 성년이 되었을 때 친구 여동생 소노코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지만, 키스한 후 여성에게선 성적인 느낌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노코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소설 속 ‘나‘는 내면과 가면 사이에서 방황한다. 소노코가 사랑이 담긴 편지를 보내왔을 때 그것을 보고 질투할 정도다. 자신은 느낄 수 없는 이성에 대한 진짜 사랑을 편지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이 뒤집어쓴 가면이 자신의 본질이 되길 갈망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가면의 고백‘이란 말은 형용 모순이다. 고백이란 가면을 벗는 일이다. 작가는 과연 그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 소설은 가면이 결코 내 본질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렇지만 끝까지 가면을 벗을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자의 좌절의 기록이다.
소설 속 ‘나‘의 고백은 어떤 독자를 상정하고 쓴 것이다. 이 글을 남긴 ‘나‘는 글을 완성한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미시마 유키오는 ˝고백의 본질은 불가능이다. 살에까지 파고든 가면, 살집이 달린 가면만이 고백을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고백은 정말 진실한 고백일까. 내 약점, 치부를 모두 드러내는 고백을 하고 후련하다며 살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 경우, 고백은 최소한 남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준으로 윤색된다. 내 치부를 다 보여주는 진실한 고백은 작가의 말대로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렇기에 ‘나‘의 고백은 죽기 전 마지막 생의 기록이 아니었을까. 미시마 유키오는 45세에 할복자살했다. 할복자살 직전의 외침 ‘천황폐하 만세‘도, 그가 꿈꾼 불가능한 세상에 대한 마지막 고백이 아니었을는지. 삶에 안주한다는 건 내 가면-페르소나-과 스스로 적당히 타협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라고 고뇌에 찬 서평을 쓴 쥬드는 노트북을 덮고 현실에선 또 찌질거립니다.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는군요. 내일 돈까스에 양주 콜? 쥬드는 가면입니다. 전 대체로 고뇌와는 거리가 멉니다. 헤헿ㅎ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