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하루 24시간 어떻게 살 것인가 - 1910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아널드 베넷 지음, 이미숙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과중한 업무로 인해 지친 몸을 이끌고 늦은 시간 귀가할 때가 생각난다. 매일 지나치는 동네 '0025 편의점' 간판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혼자 이런 말을 되뇌인적이 있다. "아! 하루 24시간도 모자라네. 저 편의점 이름처럼 나한테만이라도 하루가 25시간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할일은 많은데 시간은 없고, 몸은 지치는 울고 싶은 상황 속에서 내밷은 시간에 대한 푸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보면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이 24시간 조차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뜰하게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단상 속에 만나게 된 <하루 24시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시간과 자기 계발 분야의 고전이라 불리는 저작이다. 저자인 '아놀드 베넷' 은 영국의 가난한 시골집에서 태어나 특유의 성실함으로 작가로서의 명성과 동시에 엄청난 부를 걸머쥔 입지전적 인물이다. 너무나 유명한 '데일 카네기'가 극찬하고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니 더 이상의 미사여구는 사족이다.

 

 

책은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부터 6장까지는 우리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의 중요성, 구체적인 실천지침과 더불어 세부적인 방법론을 기술한다. 이어 7장부터 12장까지는 그럼 우리가 어렵게 확보한 이 귀중한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다.

 

 

저자는 아침마다 우리의 지갑에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새롭게 충전된다고 말한다. 시간은 그의 표현대로 누구에게나 동일하고 공평하게 주어지는 삶이 선사한 선물이자 비매품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간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이다.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흘려보낸다고 지적한다. 우선 저자는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고 대신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고 조언한다. 마치 아이들에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부모의 잔소리와 같지만 그렇지 않다. 능률상 아침 1시간은 저녁의 2시간보다 더 효과가 있다. 중요한 진리 중 하나는 우리가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있는가? 의 차이다. 얼핏 큰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살아내고 있는가와 그냥 있는가는 천지차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내게 주어진 시간을 적극적으로 살아내겠다는 의지의 외적 표명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멍한 머리로 아침을 맞이함으로서 그냥 존재 자체로서 '있는 삶' 으로 전락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또한 저자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가 어렵다.", "저녁 퇴근 후의 시간은 직장에서 에너지가 고갈 된 채로 귀가했기에 단지 식사를 하고 고난한 몸을 쉬는 시간으로밖에 활용할 수 없다." 고 투덜대는 사람들에 대해서 일침을 놓는다. 즉 "가치있는 일을 실천하려면 먼저 의지를 단단히 다져야한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한다. 마법 같은 시작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지만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책의 내용과 같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머리에만 머물 뿐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 아놀드는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일갈한 것이다.

직장에서의 8시간 외에 퇴근 후 저녁부터 다음날 출근하기 전까지의 16시간의 작은 하루를 되찾는 것의 중요성 또한 새롭다. 어쩌면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의외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은 퇴근 후의 시간 사용! 그리고 구체적으로 퇴근 후 매일 최저 1시간 30분을 확보하여 잠재력 계발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은 습관의 문제라는 사실! 습관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변화에는 장애와 불편이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책에서 말하듯 어느 정도의 희생(포기)과 엄청난 의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간을 아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잠재력 계발, 자기 계발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광의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간을 아껴서 두뇌를 훈련하라는 저자의 조언이 신선했다. 무엇인가 우리가 관심 가지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 사색하고 성찰하고 집중력을 발휘하라는 것! 특별히 출근길에 허망한 생각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두뇌의 근력을 키울 수 있는 고전이나 운문과 같은 분야의 내용들을 되씹고 새기면서 집중력을 키울 때 허투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매사에 정신을 지배하며 주어진 시간을 임팩트있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127페이지 밖에 안되는 작은 책 한권이 가지는 여운이 대단하다. 일단 책을 덮으며 느끼는 것은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이다. 저자인 아놀드 베넷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간 사용과 자기 계발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액기스만 추출한 지식의 원액을 독자들에게 아낌없이 베푼다. 어쩌면 일부 독자들은 본서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을 서점가에 출간된 다양한 자기 계발 도서들로 인해 이미 섭렵하고 있을수도 있다. 그만큼 책의 내용이 아주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사실 이 작은 책이 데일 카네기가 극찬할 정도의 자기 계발 분야의 고전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이 이야기하는 대다수의 메시지가 현대의 다양한 자기 계발 도서들의 원류이기에 그렇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주어진 업무, 각종 요구들과 기대하는 시선들의 부담을 느끼며 항상 시간의 부족함을 못다한 일들에 대한 핑계로 돌리기 바쁜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난 아놀드 베넷의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제시하는 특별한 시간 사용의 철학들이 내게 너무나 큰 유익함으로 다가온다. 일단 저녁 시간은 육아로 인해서 당분간 나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빼놓을 수 없지만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과 같은 실현 가능한 삶을 계획해본다. 마법과 같이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우리네 인생의 지갑에 24시간이라는 삶이 주는 선물이 두둑하게 들어있음을 보며 만족하는데에 그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평하게 주어진 삶의 선물을 어떻게 하면 빛나는 인생으로 열매맺히게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고민하며 실행에 옮긴다면 서평의 서두에서 언급한 '0025 편의점' 의 간판을 보며 허망함을 곱씹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군주론 - 결정적 리더십의 교과서, 책 읽어드립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 본성의 심연을 냉철하면서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일종의 정치철학서로 꼽히는 책은 단연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이번에 기회가 되어 서울대 필독 인문고전서로도 뽑힌 본서를 펼치고 그 안의 내용들을 살필 수 있었다. 내용이 방대하거나 고전이기에 소화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무겁지 않을까 염려한다면 그것은 모두 기우에 불과할 정도로 책 자체는 매우 라이트하다. 어떻게 보면 인간사에 있어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어디에서나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 문제의 화두를 정치판에 집약시킨 책이 아닐까 생각된다. "군주는 이러해야하고, 국가는 저러해야한다!" 라는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다소 평이한 내용들이 책의 전면을 채운다. 마치 삼국지 유비의 책사인 제갈공명이 곁에서 군주의 도리와 역할, 책임을 간언하듯 저자인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군주인 '위대한 로렌조 메디치'에게 행하는 깨알조언이 흥미롭다.

그러나 고전이 달리 고전이 될 수 있었겠는가? 누구나가 평범하게 이해하고 생각해 낼 수 있는 지적 결과물 그 이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다수 범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인간 내면과 본성의 특성에 주목하여 그것을 현실 정치의 무대위로 소환해냈음에 있다. 국가와 군주, 신민의 관계가 어차피 모두 인간사의 문제이기에 얼키고 설켜 복잡하게 여겨질법한 정치 메카니즘을 가장 기본적인 인간 본성의 문제로 단순화시켜서 제시했기에 지금까지도 세대를 넘어 모든 독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책은 총 2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의 종류와 형태, 주권과 군대에 대한 이야기, 군주가 갖추어야 할 인품과 선택해야 할 도덕적 가치들, 군주의 명성, 군신간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해방하기 위한 호소까지 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 군주가 섭렵하고 있어야 할 중요하면서도 핵심이 되는 내용들을 잘 요약하고 정리해서 한권의 책으로 설명한다. 본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악에 대한 독특한 직관 또한 새롭다. 마키아벨리는 악행을 사용하여 군주가 된 자들에 대한 챕터에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잔인한 수단의 사용을 두둔한다. 그러나 이러한 잔인하고 폭력적인 수단은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고 단회적으로 그쳐야 함을 주지시킨다. 즉 권력을 쟁탈해야하는 순간에는 잔혹하면서도 냉철하게 반대파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버리는 과감함과 결단이 필요하며 그러한 악행들이 단회적으로만 그친다면 그 악행도 유용하다는 악의 선용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또한 저자는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과 두려움을 받는 것의 선택 속에서 두려움 받는 것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경우에 따라서 언제든 신의를 저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전제 속에서 두려움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형벌이라는 공포에 의하여 지탱되므로 권력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즉 마키아벨리는 백성들이 군주를 향한 어느 정도의 경외와 두려움을 가질 때 군신의 관계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음을 인간 내면의 속성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덧붙이는 것은 백성들에게 두려운 대상이 되는 것은 좋지만 미움을 받는 대상은 되지 말라는 매우 중요한 키포인트이다. 두려움과 미움은 개별적이며 양립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본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지혜다.

더불어 군주의 신의에 대한 화두 또한 주목할만하다. 군주론을 읽기 전 누군가에게 이 책이 차갑고 냉혹한 담론이 기술된 저작이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책에 대한 이와같은 사견이 아마 군주의 신의를 다루는 부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키아벨리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군주들 대부분은 신의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음을 밝힌다. 즉 신의를 지키는 일이 해롭거나 굳이 지킬 이유가 없을 때에는 단호하게 약속을 파기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인간 본성의 문제가 등장하기에 그렇다. 인간은 본래 선하지도 않고 군주에게 맹세한 언약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기에 군주 또한 위험을 무릎쓰고 신의와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되도록 선을 행하려고 해야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악의 편을 드는 법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과 정황의 변화를 주의깊고 면밀하게 관찰하여 처신을 그때그때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삶의 태도와 자세를 갖추라는 의미다.

메디치 가문을 통해서 고문과 내쫓김을 당하는 치욕을 경험했으면서도 자신의 조국 이탈리아 피렌체에 대한 연민과 융합된 자신의 정치 이상의 실현을 위해 써내려간 <군주론>을 메디치 가문의 군주에게 헌정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참으로 역설적이면서도 비범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후 그의 인생 말년에 그가 현실 정치의 무대에 복귀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저작이 가진 영향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책의 마지막 뚜껑을 덮으며 떠오르는 상념은 본서가 비단 15~16세기 중세 유럽이라는 한정된 시공간에 갇혀있는 지협적 통찰이 아니라 세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인간 사회가 가진 진리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 정치판의 생리는 차치하고 당장 우리네 평범한 민초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 자체가 바로 군주론의 현대판 버전 아니겠는가? 기업(국가)의 오너(군주)가 있고 측근 임원(귀족)들과 일반 직원(백성)들이 존재한다. 오너는 임원들과 직원들과의 관계, 경쟁 기업(적국)들과의 관계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행하며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자신의 일상에 적용하고 접목시킨다. 시대 간극의 오류가 있기에 100%의 씽크는 불가능하지만 분명 이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결코 새롭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안목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저작이 아닐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 주말 저녁 TV로 방영했던 "불멸의 이순신" 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 이후 '명량' 이라는 영화가 제작되어 많은 관객을 불러모았다. 한국인에게있어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누구나가 다 아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였기에 큰 관심이 없었고, 더군다나 어린시절 위인전으로 충분히 접했던 이야기라서 그런지 드라마가 내게는 별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우연찮게 TV 앞에 앉았다가 보게 된 드라마의 재미에 완전히 함몰되었다. 그러면서 드라마의 원작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이 드라마가 두 편의 원작을 토대로 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사람들이 많이 추천하는 두 편의 원작 중에서 <칼의 노래>를 구입해서 읽었다.

드라마는 감칠맛나는 묘미를 이어가기 위해서 중요한 순간에 끊어버리는 단점을 가진다. 그래서 나의 인내심 없는 성격 덕분에 나는 급기야 원작을 구입해서 읽었다. 책을 붙잡고 읽는 순간 나는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빠져들었고 거침없이 읽어갔다. 책의 내용은 드라마의 내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느낌을 가진다. 책은 성웅 이순신 장군의 눈으로 모든 사건과 상황들을 보고 쏟아내는 1인칭 자전적 소설의 구조를 택한다. 그러면서 이순신 장군의 세밀한 심리 묘사와 내적 고뇌의 흔적들을 가감없이 묘사한다. 그렇기에 책을 펼쳐 든 독자는 마치 장군의 곁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은 생생한 문학적 현장감을 체감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소설책을 크게 선호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인간의 비릿한 콧김이 서리지 않은 허구적인 것이 싫어서라는 지독한 편견 때문에 그런지 애써 소설이라는 장르를 나의 서가에서 밀쳐낸 지 오래다. 그런데 TV 드라마를 통해 본서를 만난 순간 내가 그토록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던 편견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픽션의 요소가 적지 않게 가미되었지만 역사라는 팩트에 기반한 소설이기에 사실성은 물론이거니와 독자를 끌어들이는 그 재미와 마성의 몰입감이 마치 물귀신의 그것과 같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점은 작가인 김훈에 의해 하얀 종이 위에 펼쳐지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현란한 글사위와 수려한 글놀림의 향연이었다. 그의 글은 마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기암절벽의 장관을 보는 것과 같아 독자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만드는 저릿함 함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한 카타르시스 또한 느껴진다. 본서를 향해 한국 문학계에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라고 말하는데 책을 펼쳐든 순간 글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진정한 수작 중의 수작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책 자체가 가지는 아우라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더불어 한국인으로 태어나 살면서 우리 글이 이렇게 화려하면서도 담백하며 깊은 느낌의 문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은 작가가 책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해주는 덤이다.

 

나로 하여금 작가의 이력을 검색하게 만든 책!

작가 김훈...<칼의 노래> 속에서 보여지는 그의 글은 원색적이고 감각적이다. 400여년 전 전쟁의 참혹함을 묘사한 문장들은 작가의 손끝에서 묻어 나오는 마치 기예와 같은 글놀림으로 인해서 피비린내와 물비린내가 진동한다. 그렇기에 그의 글은 끈적대며 살아 있는 듯 징그러울 정도로 몸서리쳐진다. 장군의 눈 앞에 펼쳐진 바다에 떠 있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아귀떼와 같은 적들(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혼들이다. 아니 도리어 죽음을 즐기는 자들이라고 표현된다)과 자신의 등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임금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인한 진퇴양난의 인간적 고뇌들, 그리고 소리없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러나 마음대로 죽을 수 없는 자신의 잃어버린 의지, 바람 앞에 꺼져가는 등불처럼 위기에 빠진 조국의 운명을 홀로 지고가야만 하는 몸이 바스라지는 듯한 책임감과 억눌러오는 부담감, 그리고 자신의 사지가 찟겨져 나가는 듯한 현재적 고통을 경험케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기억들...이 책은 너무나 인간적인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정직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더욱더 큰 매력을 느낀다. 인간 냄새 나는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표현한 작가는 그가 냉철한 군인이기에 앞서 그의 몸 안에도 따뜻한 피와 물이 흐르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수고를 마다 않는다. 또한 책을 읽다보면 난세에​ 탁월하게 준비된 리더에 의해 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발견하는 희열을 느낀다. 더군다나 그 표본이 400여년 전 우리의 조상인 이순신 장군이라는 사실은 새삼 장군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이순신이라는 민족 영웅을 본서보다 더 현실적이면서도 흥미롭게 묘사한 책이 또 있을까싶다. 장군의 마음 속 심연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마냥 작가의 심리묘사가 너무나 사실적이고 세밀하다. 400여년 전 장군의 환생을 보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마치 글을 쓰는 동안 이순신 장군의 영혼이 작가에게 빙의된 듯한 섬찟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지금껏 다수의 책을 읽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글을 가지고 논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런데 김훈 작가는 본서를 펼쳐든 순간 "아! 글 자체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글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논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유일한 작가다.

책을 펼쳐들면 간결하고 정제된 어휘와 극도로 절제된 문장 하나 하나가 내뿜는 문학적 포스가 예사롭지 않음을 대번 느낄 수 있다. 선 굵은 문장의 마디마디가 마치 오랜 세월 노질로 여기저기 굳은 살이 박히고, 뼈마디가 기형적으로 굵어진 뱃사공의 그것과 같이 투박스럽다가도 언제 그랬냐는듯이 첫날 밤 새색시의 수줍음과 같이 여리고 여린 처녀성의 순결함을 머금는다. 나는 글을 너무 잘 쓰는 사람을 만나면 솔직히 질투어린 짜증이 난다. 감히 비교할 대상이 안되는 김훈 작가의 글을 읽고 느낀 나의 첫 감정이 그랬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겸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존경을 표하는 나의 모습을 본다. 더 이상의 미사여구가 필요없는 그야말로 한국 문학계에 쏟아진 벼락같은 축복! <칼의 노래>

"칼이 울었다!" 더 이상의 수식어는 사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곡 - 책 읽어드립니다, 신과 함께 떠나는 지옥 연옥 천국의 대서사시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구스타브 도레 그림, 서상원 옮김 / 스타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해 전 개봉하여 1000만 관객을 찍은 영화 <신과 함께>는 윤회사상을 비롯한 불교적 세계관을 흥미롭게 묘사한 작품으로서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 리뷰하는 책 <신곡> 또한 내세에 대한 가톨릭적 세계관을 보여주기에 제격인 저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는 본 작품을 1307년 시작해서 1321년에 완성했다.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구성된 본서는 저자 단테가 35살 성(聖)금요일을 앞둔 전날 밤 체험한 일종의 영적 기행담이다. 어느 음침한 숲속에서 눈을 뜬 단테는 빛이 비추는 언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중 자신을 가로막고 서 있는 세 마리의 야수들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육욕을 상징하는 표범, 권력과 야망을 상징하는 사자, 탐욕을 상징하는 늑대로서 이들 앞에 선 단테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도와달라고 허공을 향해 외친다. 그의 기도가 응답된 듯 잠시 후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단테가 스승으로서 그토록 존경했던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였다. 이후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데리고 영원한 곳으로 안내하는 안내자와 조력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이로서 단테가 환상 속에서 여행하게 되는 첫번째 관문인 지옥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단테는 먼저 지옥의 참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가 목격하게 된 지옥은 9개의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 등급의 지옥은 생전 세상에서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 죽은 영혼들이 그 죄의 대가로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는 장소다. 이곳에서 단테는 수 많은 사람들이-그중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사람들을 포함하여-끊임없는 고통의 형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목도하며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생전 다른 이들을 향한 기만, 배신, 정욕을 포함한 각종 악행을 저지르며 살다간 사람들은 이 지옥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생생하게 맛보게 되는데 그것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의 무한연속이다.

끔찍한 비명과 처절한 울부짖음이 가득한 지옥을 벗어나 단테가 이른 곳은 다름아닌 연옥이다. 7개의 죄악인 교만, 질투, 분노, 나태, 인색, 탐욕, 애욕의 죄를 정화하기 위한 장소로서 개신교에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가톨릭에서는 매우 중요한 교리로 인정되는 연옥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장이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은 지옥에 갈 정도의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천국으로 곧장 직행할 만한 공덕을 쌓지 못한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기 전 죄를 씻으며 중간에 머무는 장소다. 이곳에 온 영혼들은 자신들이 지은 다소 경미(?)한 죄악들에 대해 회개하면서 나름 연옥이 제시하는 보속의 행위들을 이어간다. 그 기간은 100년이 될 수도 있고 500년이 될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는 이 보속의 기간을 온전히 통과하고 나면 그래도 천국으로 향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소망이 있기에 단테가 거쳐 온 지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온화함과 작은 환희가 존재하는 그야말로 죄를 씻는 정죄(淨罪)의 공간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들의 중보적 기도가 있게 될 때 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보속의 기간은 단축되기에 책에서는 연옥을 통과하는 단테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영혼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에서 독자는 1517년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교황 레오10세의 성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에 얽힌 비화를 기억해 낼 수도 있다.

연옥을 지나 이제 스승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그가 사모하는 여인 '베아트리체' 에게 맡기고 사라진다. 천국의 문 앞에 이른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따라서 10개의 층으로 구성된 천국을 여행한다. 연옥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과 죄악을 정화한 영혼에게 있어서 남은 것은 선과 도덕적 덕목의 실천이다. 천국은 완전한 선의 집합체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로서 그곳에 다다른 인간 영혼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온전한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다. <신곡>은 단테가 환상 속에서 경험한 영적 기행담이지만 비단 사후 세계에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면 단테가 살다간 중세 시대의 현실을 겨냥한 종교적 메시지의 진의가 더 진득하게 묻어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천국편에서도 등장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는 내용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단테가 경험한 지옥과 연옥, 천국이 의미하는 바는 모두 인간의 의지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한다. 현실 세계 속에서 지옥은 인간 스스로가 의지적으로 결정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타인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빼앗고 갈취함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하는 인간의 타락한 행위는 인간의 자발적 의지로서 그야말로 지옥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그보다 못한 죄악들을 행하지만 그것을 벗어나서 천국을 갈망하기 위해 연옥에서와 같이 보속의 행위를 끊임없이 행하는 행위의 자발적 주체 또한 의지를 가진 인간 자신이다. 또한 궁극적 선의 실천을 위한 정의와 도덕, 사랑의 행위를 갈망하는 천국이 요구하는 덕목 또한 인간의 의지를 필요로 하기에 어쩌면 단테가 경험한 사후 세계의 모습은 단테의 시대상을 적실성있게 반영한 것이 아닐까?

워낙 유명한 대서사시로서의 고전인 단테의 <신곡>이 'tvN 책 읽어드립니다'를 통해서 소개 된 후 꼭 읽어봐야지 생각만하다가 이번 기회에 완독할 수 있었다. 단테가 살았던 당시의 현실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 결코 크게 다름이 없다. 단테가 여행을 시작하기 전 만났던 세 마리의 야수가 상징하는 육욕과 권력야망, 탐욕의 모습이 인간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그리 놀랍지만은 않다. 인간 누구에게나 상존하는 죄악된 본성에서의 탈출과 덕을 지향하고자 원하는 인간의 근원적 갈망의 민낯을 지옥과 연옥, 천국이라는 내세의 구조를 통해서 표현한 단테의 문학적 천재성이 돋보이는 이 책은 고전으로서의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저작이다. 또한 개신교 종교개혁이 있기 전 탄생한 저작답게 인간 의지의 자유라는 가톨릭적 색채가 묻어나기에 가톨릭의 신학적 교리들과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적지 않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녹음이 짙어가는 5월, 혹 그동안 어렵게만 느껴져 멀리했던 고전이 내뿜는 향기 속에 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신교와 가톨릭,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그레그 앨리슨 & 크리스 카스탈도 지음, 전광규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신교 신자로서 흥미로운 책 한권을 만났다. 제목 그대로 개신교와 가톨릭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책이다. 예전에 주변 지인들로부터 가톨릭하고 우리 개신교는 어떤면에서 차이점이 있는건가요?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몇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대충 주워들은 풍월로 수박 겉 핥기식의 대답만을 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을 읽으며 같은 기독교라고 하지만 개신교와 가톨릭이 어떤 면에서 같고 또 어떤 면에서 다른지에 관한 명쾌한 답변들을 배워갈 수 있었던 유익한 독서의 시간이었다. 두명의 저자 중 한명인 '크리스 카스탈도' 목사는 개신교 목사가 되기 전 가톨릭 교회에서 전임사역자로 일한 바 있기에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정확성에 대한 신뢰를 높여준다.

책은 약 180여페이지 정도로 분량이 그리 많지 않기에 독자들에게 있어서 일단 부담이 없다. 총 7장으로 구성되어 1장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근본 신념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2장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10가지 부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3장부터 6장까지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주요 차이점 9가지를 비교하며 설명하고, 마지막 7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를 제시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책이 가지는 장점은 일단 개신교와 가톨릭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상호 비교하며 서술하고 있기에 독자로 하여금 각자가 주장하는 성경적이고 교리적인 내용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공통점을 말할 때 10가지 부분에서의 공통적인 주제들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리적 내용들로서 예를들어 신론, 기독론, 성경론, 구원론, 성령론, 인간론과 죄론, 교회론과 종말론 등이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적인 신자된 독자들이 내용을 상세하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저자들이 최대한 신학적이거나 현학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피했기에 기본적으로 교회를 성실하게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한 독자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인식을 말하는 기독론에 있어서 개신교와 가톨릭은 모두 삼위일체에 있어서 둘째 위격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및 위치를 동일하게 인정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각종 이단들이 성행한 가운데서도 개신교와 가톨릭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동일하게 옹호하고,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신인으로서 두 본성을 소유하시며 하나의 인격을 지니신 분으로서의 전통적 기독론의 바탕 위에서 같은 믿음을 고백한다.

반면 개신교와 가톨릭의 주요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챕터에서는 가장 중요한 교리적 차이에 대한 주제들을 상호 비교하며 기술한다. 성경과 전통, 해석에 있어서의 차이점, 하나님의 형상과 죄, 마리아, 교회와 성례, 구원에 대한 상호 다른 견해를 비교함으로서 그동안 서로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었던 얕은 지식들과 때로는 서로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데 있어서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또 적지않은 부분에서 심각한 교리적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는 구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칭의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다르다는 점이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칭의란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의 영혼 안에 주입되어짐으로서 그 은혜와 협력하는 성도의 행위가 공로로서 쌓여질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신교에서 말하는 칭의란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고 단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의 완전함을 통해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져지고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여기신다고 말한다.

큰 교의적 주제 안에 세부적인 교리들, 예를들어 7성례, 성찬, 연옥, 정경과 외경의 문제, 교회의 권위 등과 같은 주제들 또한 평이하게 비교 설명되어 있기에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들의 이해를 돕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다. 이 책은 개신교 출판사를 통해 개신교 신학교의 교수와 목사가 저자로 참여하여 쓰여졌다. 그렇기에 이 책이 개신교의 입장을 두둔하는 편향적 관점에서 쓰여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들이 매우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오히려 "이 사람들 개신교 목회자들 맞아!" 라고 여기며 저자들의 약력을 다시 들춰보게 될 정도로 개신교 입장에서 볼 때 불합리(?)하게 표현된 단어들도 있다. 물론 저자들이 개신교 목회자들이기에 간혹 주관적인 표현들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 또한 가톨릭의 입장을 비난하거나 깍아내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전혀 없음을 문맥을 통해 쉽게 직감할 수 있다.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며 사견이나 주관을 배제한 채 양 진영이 주장하는 교리적 팩트만을 다루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문체는 매우 부드럽고 젠틀하다. 그렇다고 일부 개신교인들이 걱정하는 애큐메니컬적인 느낌도 없다. 그냥 사실만을 다루었을 뿐이다. 저자들은 마지막 장을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망이 있음을 이야기하며 책을 맺는다. 어쩌면 앞으로도 접촉점을 찾지 못해 계속되는 평행선을 그을 수도 있다. 어떠한 일에서든지 서로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한채 상대방에 대해 쓸데없는 적의를 불태우고 대립각을 세우는 것만큼 어리석고 우둔한 일도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은 서로의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말한다. 책을 통해 무조건적 비난과 비하가 아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종교적 성숙함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