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일독 플러스 만화 성경 : 신약 성경일독 플러스 만화 성경
정동열 지음, 정해주 / 선한청지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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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매우 가치있는 책이다. 아니 단순히 책이라기 보다는 살아있는 하나님 그분의 말씀 자체이며 그분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해가 시작되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세우는 신앙의 목표 중 하나가 올해는 꼭 성경을 1독 해보겠다는 다짐이지만 창세기, 출애굽기를 지나 제사법이 등장하는 레위기에 들어서면서 대부분 그 결심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렇게 성경을 1독한다는 것은 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내가 믿는 하나님 그분의 말씀, 내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들이 가득한 성경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이번에 만나게 된 본서 <성경 1독 플러스 만화성경>는 신구약 66권을 통독해보고 싶은 신자들에게 일종의 복음 그 자체로서 다가온다. 만화로 성경을 읽는다는 발상 자체가 어쩌면 조금 불경스럽다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본서는 말씀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인 기반 하에 만화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성경 일독의 어려움을 느끼는 조국 교회의 대다수 신자들에게 성경을 좀 더 재미있고, 친근감있게 접할 수 있도록 돕는 충분한 역할을 감당해준다.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은 일반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막아버렸고, 말씀을 강론하는 사제들 또한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미사를 집례함으로서 철저히 성경과 말씀에 대한 접근성을 차단해버렸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시대상을 빗대어 중세 1000년의 암흑시대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듯 성경이 일반 신자들에게 철저하게 금지되고 차단되었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만화라는 조금은 가벼운 듯한 도구의 힘을 빌려 탄생하게 된 만화성경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본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서 출간된 것 중에서 신약편에 속한다.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약의 내용들이 만화에 의해서 재탄생되는 새롭고 흥미로운 만화성경은 그만큼 책장이 술술 넘어갈 정도로 재미와 감동이 있다. 중간 중간 해당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을 설명해주는 페이지가 함께 수록되어 있기에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읽게 되는 성경의 주요 주제와 줄거리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만화성경이 만화로서 다 표현하지 못하고 행여나 놓칠 수 있는 부분을 부족함없이 채워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또한 내용전개가 빠르고 중간 중간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 또한 해설자의 친절한 해제로서 삽입되어 있기에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손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만화로 성경을 읽는다고 결코 흥미와 재미로서만 끝나는 책은 아니다. 책을 받고 어린 시절 만화방에 앉아서 설까치가 등장하는 공포의 외인구단이며 아기공룡 둘리 등의 만화책을 탐닉했었던 예전의 추억을 소환해주는 면도 없지않아 있었지만 재미로서만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감동과 은혜가 책의 전면에 흐르고 있다는 점은 그 옛날 나의 동심을 고양시켜준 만화책들에 비할바가 못된다.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신앙과 믿음의 눈으로 이 책을 볼 때 만화라는 이질적인 도구에 덧입혀진 복음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구약 뿐만 아니라 신약 또한 내러티브적인 요소가 강한 책들이기에 더욱더 만화성경의 파워와 가치는 빛을 발한다. 내러티브적인 요소들은 활자라는 제한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한계성 속에서는 아쉬움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보통 일반적인 성경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생각 속의 이미지들이 단순히 머리속에서만 맴돌다 사라져버렸다면 본서는 그러한 무형의 이미지들을 눈에 보여지는 시각적인 방법으로 재현시키고 있기에 성경의 이야기들은 색깔을 입고 형상을 부여받아 종이라는 인쇄물 위에 자신의 진가를 펼침으로서 수 많은 독자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바로 성인들 뿐만 아니라 이제 막 글을 떼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아이들에게 성경을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매우 중요한 매개체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점이다. 사실 일반적인 성경을 어른들도 읽기 버거워하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오죽하랴...내가 이 만화성경을 펼쳐들자 곧장 초등학교 1학년 첫째 녀석이 나의 옆에 다가와 앉는다. 만화라는 그 하나가 아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만약 내가 깨알같은 성경전서를 들고 앉아서 펼쳤다면 과연 우리 아이가 내 옆에 와 앉아서 관심을 보였을까?

요즘 대중 매체를 통해 넘쳐나는 잡다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아이들이 보고 듣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실감한다. 초등학교 3학년만 되어도 남자아이들은 스마트폰으로 음란물을 보고, 여자아이들은 유튜브를 통해 메이크업하는 법을 배운다는 실로 믿기지 않는 요지경 같은 세상. 그렇기에 우리 아이들이 이러한 미디어의 공해 속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기쁨을 누리는 사람으로 자라갔으면 하는 마음이 부모로서 크다. 그렇다면 깨알같은 글씨의 일반적인 성경보다는 본서와 같은 만화성경을 통해 아이들이 성경 말씀을 좀 더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야 이보다 더 좋은 도구가 어디있겠는가? 성장하면서 아이들의 지적수준과 집중력이 더 넓어지고 깊어질 때 어느 순간 어른들이 읽는 일반 성경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아이들에게 만화성경을 권해보는 것은 어떨까?

 

본서는 결코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만화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성경 일독에 도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매우 의미있는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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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 1 세계기독교고전 50
윌리엄 거널 지음, 원광연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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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한번쯤 영적전쟁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불신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로서 전쟁이면 전쟁이지 영적전쟁은 또 뭐야! 라고 생각할 법한 아리송한 단어. 봄의 길목에서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관한 성경 말씀을 토대로 쓰여진 17세기 영국 청교도의 진리를 고수했던 국교회 목사 '윌리엄 거널'의 그리스도인의 영적전쟁에 관한 불후의 고전을 만난다. 1, 2권으로 나뉘어진 책의 분량은 글자크기10포인트의 빼곡한 내용으로 채워진 각권 1000페이지, 도합 2000페이지가 넘는 어마무시한 대작이다. 책의 두께부터 기가 질리지만 저작의 그 진중한 무게감 또한 독자의 지성을 압도하기 충분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던 내가 가진 영적전쟁의 개념들이 얼마나 실개천 수준의 얕은 지식이었는지를 깨닫는 순간은 단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서문에서부터 저자 거널은 성도와 사탄과의 전쟁에 대해 성도들에게 왜 우리가 이 싸움을 싸워야 하는 지와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개진해나감으로서 본서가 가진 그 깊이감을 기대하게 만든다.

영적전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주의해야 할 사항이 신자들의 투쟁의 대상인 사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사탄에 대해서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는 영적전쟁에 대한 회피는 용사로서 부르심 받은 신자들의 정체성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반면 사탄을 너무나 하찮게 여기고, 무시함으로서 그의 공격에 대해 경시하는 태도 또한 사탄에게 있어서는 매우 반가운 신자들의 잘못된 모습 중 하나다. 눈에 보여지지 않는 영적 세계에 대한 인식과 사탄과 죄의 유혹에 대한 심각성을 동시에 균형감있게 이해하고 붙잡는 것만이 신자들에게 있어서 영적전쟁을 가장 올바르게 이해하는 모습일 것이다.

저자인 거널은 우선 이 영적전쟁을 수행하도록 부르심 받은 신자들에게 우리가 이 싸움을 혼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령관 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싸워 나가는 것임을 주지하며 격려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발휘하는 것은 사탄과의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자신있게 출정하지만 이내 원수의 불화살과 창칼에 의해 유혈이 낭자한 채 쓰러져 돌아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본서를 통해 우선적으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갑주로서 입어야함을 강조하며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에 관한 설명을 시작한다. 동시에 그 갑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신적 본질의 것이어야함을 강조한다. 즉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인간의 지혜와 머릿속에서 나온 얇팍한 계산에 의해 지어진 옷을 입고 나가서는 결코 원수의 화전을 소멸시킬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의 전신갑주를 취하기보다는 우리의 생각, 힘과 지혜, 경험을 의지하여 우리앞에 닥친 사탄과의 영적싸움을 수행하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또한 거널은 신자들에게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의 의미를 해설하면서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서 대변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그냥 가지고만 있어서는 안되고 실제로 그것을 입어야만 그 효력이 있음을 주지시킨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냥 거기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계속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활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이야기한다. 우리를 향해 칼을 빼들고 돌격해오는 적들이 가득한 전장에서 우리에게 검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리한 검을 칼집에 넣고 멋진 장식품으로 허리에 차고만 다닌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군인이 어디있겠는가? 은혜, 전신갑주는 이와 같은 것이다. 계속적으로 전쟁에서 활용되어야 하고 적군을 향해 사용되어질 때만이 그 은혜는 유용한 것이며 전신갑주는 그 본래의 목적대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예전에 알고 있었던 이 사탄과의 전쟁,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씨름' 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그 어원적 의미에 대해 듣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번 기회에 거널의 본서를 통해서 다시 한번 이 씨름의 의미를 확인하고, 되새기게 된 기회가 너무나 감사했다. 영적싸움의 본질을 거널은 이 '씨름' 이라는 단어 하나로 명확하게 드러낸다. 얼마 전 읽은 책 <리비우스 로마사 2>는 100여년간 계속된 로마와 주변 도시국가들의 전쟁 장면을 리얼하게 묘사한다. 격렬한 싸움이 벌어져서 양군이 피와 살점이 튀는 처절한 전투를 벌이지만 이윽고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승리와 패배가 나뉘는 불변의 공식이 존재한다. 전투가 끝난 후 패잔병들은 승자들에게 무자비하게 도륙되고, 승자들은 패자들의 무기와 갑옷, 각종 장신구들을 전리품으로 취하는 사후의 약탈 작업을 해나간다. 이렇듯 일반적인 전쟁과 전투는 시작과 끝이 명확하다는 공통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땅에서 신자의 영적씨름은 천국에 갈 때가지 결코 쉼이 없는 치열한 싸움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즉 이 씨름을 이해할 때 한국인들의 정서 속에는 설이나 추석 명절 TV에서 많이 보여주는 민속씨름의 개념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 씨름은 고대 근동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씨름인 지금의 올림픽에서 볼 수 있는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펼치는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을 의미한다. 올림픽 레슬링 경기를 관전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레슬링은 양 선수가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 쉼없이 움직이며 공격과 수비를 반복한다.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기에 선수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계속적으로 몸을 부대끼고 서로를 밀어내며 쓰러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렇게 잠간의 방심이 곧 패배로 이어지는 레슬링과 같이 신자와 사탄과의 영적전쟁은 이와 같은 씨름을 의미하며 이것은 죄와 사탄과의 쉼이 없는 연속성을 가진다는 의미를 거널은 본서를 통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신자들이 이러한 강력한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사용하도록 부여받은 하나님의 전신갑주 하나하나를 들어 설명하며 각 무기들의 특징과 개념들을 에베소서 6장 말씀을 기반으로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2권에 등장하는 무기 중 하나님의 말씀의 검에 대한 내용은 참으로 생각할 부분이 많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6가지의 무기와 무장들 가운데 유일한 공격무기인 성령의 검, 말씀은 가장 중요한 무기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좌우에 날이 선 검'으로 묘사한다. 나는 본서를 통해 원수를 베어 쓰러뜨리는 말씀의 검이 가진 그 놀라운 파워에 대해 읽으며 오래 전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 <글래디에이터>가 떠올랐다.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검투사들의 경기 장면들이 끔찍하게 묘사되었는데 영화 중 검투사들이 들고 나오는 검의 모양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로마군단 각개 보병들의 주력 무기 중 하나인 짧고 날카로운 검은 좌우에 날이 모두 서있는 양날검이었는데 이 양날감이 가진 파워와 전투 상황에서의 유용성에 대해 이 또한 한국적 정서 속에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조선시대 고유의 편날검을 떠올리기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로마군단 경보병들은 적과 조우하여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근접거리에서 각자 가지고 있는 투창을 적을 향해 힘껏 집어던진 후 빠른 걸음으로 적의 방진을 향해 양날검을 빼어들고 돌격한다. 적의 진영 깊숙이 파고 든 경보병들은 가차없이 적군을 찌르고 베어내기 시작하는데 이때 이 근접 백병전에서 로마군 경보병들이 가진 이 양날검의 파워가 그 진가를 발휘한다. 편날검은 적을 한번 휘두르며 베어내면 칼을 쥔 손의 모양을 바꿔야지만 2차 베어내기가 가능하지만 양날검은 한번 내려침으로서 적군에게 1차로 상해를 가하고 손의 모양을 바꿀 필요도 없이 곧이어 내려친 검을 반대의 날로 올려치기를 함으로서 또 다른 적군을 살상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하면서도 실효성있는 무기였다. 혹자는 로마군단이 그 오랜 시간 유럽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를 바로 이 로마군단 경보병의 양날검을 꼽기도 한다.

아무튼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써 내려간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검은 아마도 자신을 지키는 감옥의 로마병사들의 무기를 보고 묘사했을 가능성이 큼을 짐작할 때 이 말씀의 양날검은 원수를 공격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그 무한한 파워와 효율성을 지닌 무기 중 하나라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거널은 이 말씀의 검이 가진 효용을 설명하며 박해자, 이단, 부패와 정욕, 안팎의 환난들이 이 말씀의 검에 의해서 무너짐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이 검의 사용법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를 날마다 갈고 닦으며 녹슬지 않도록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거널은 기도를 이야기한다. 오래 전 군생활을 할 때 개인 병기를 꺼내서 총기를 분해하고 기름칠을 하며 깨끗히 청소하는 병기수입 시간을 갖곤 했다. 전시를 대비하여 군인들은 이렇게 자신의 개인 병기를 전투가 발발했을 때 최상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기름칠하고 닦고 조이고 하는 등의 대비태세를 갖추는 일을 한다. 거널은 신자들 또한 이와 같음을 말한다. 아무리 탁월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공급받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군사된 신자들이 평안할 때에 그 무기들을 갈고 닦지 않는다면 그 무기들은 얼마 못가서 녹슬고 좀이 먹어 실제 사탄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기도는 바로 이와 같음을 말한다. 쉬지말고 기도함으로서 우리가 받은 전신갑주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야하는 책임과 의무가 신자들에게 주어졌다.

숨이 넘어갈 정도의 막대한 분량의 책을 읽으며 나 또한 그 동안 알고 있었던 영적전쟁의 피상적인 사실들과 잘못 알고 있었던 지식들이 조금은 제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기분이다. 워낙 내용이 방대하기에 일독으로는 내용 전체를 이해하고 소화하기는 어렵다. 재독을 하면 더할나위 없이 좋지만 서가에 들여놓고 그리스도인의 영적전쟁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 수시로 꺼내어 관련 본문을 찾아 읽는다면 지식적으로나 경건의 진작을 위해서 매우 큰 도움이 될 말한 위대한 저작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적전쟁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오해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오해들이 교회와 선교단체 안에서도 공공연한 모습으로 드러나며 영적전쟁이라는 명분하에 타종교의 앞마당에 가서 정상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벌이는 무례하고 몰상식한 행위들이 있지 않았는가? 끓어오르는 영적 감정과 정서 속에서 영적전쟁을 앞뒤 안가리고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일종의 샤머니즘적 행위로 오해하는 경박함과 무식함을 끊어버릴 때가 되었다. 차가운 이성과 날카롭고 정확한 기독교 지성, 뜨겁고 따뜻한 목자의 마음을 가진 경건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권위인 성경에 근거하여 풀어가는 균형잡힌 영적전쟁과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본서는 모든 신자들이 읽고 그들의 서가에 꽂아두어야할 최고의 기독교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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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2 - 끝나지 않는 전쟁 리비우스 로마사 2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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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문헌적 가치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역사책을 기록한 저자가 얼마나 그 역사적 사건들과 가까운 시대에 살았느냐 하는 현장성의 유무이다. 마치 고조선의 역사를 2019년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누군가가 기술한다고 생각할 때 내용이 아무리 잘 기록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 사건들에 대해서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 시간적 간극이 큰 역사서는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역사소설로 전락할 우려가 있기에 한권의 역사책을 선별할 때 우리는 저자가 태어난 시대를 염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로마의 역사를 다룬 책들이 출판되었지만 오늘 소개하는 본서는 단연코 그 역사적 현장성에 있어서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로마 역사의 교과서적 저작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인 '티투스 리비우스' 그 자신이 이미 그 로마 역사의 한가운데서 태어나 살다간 사람이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명확한 증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사랑한 책, 하버드대 고전 추천 도서 등 셀 수 없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본서를 만난 것은 작년 이맘 때이다. 현대지성을 통해 총 4권으로 기획되어 출간되는 그 첫번째 책을 받아들고 순식간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전편의 마지막 덮개를 덮으며 그 후속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책이 세상에 몇권이나 되겠냐만서도 나의 손에 들려진 본서가 바로 그렇게 후속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몇 안되는 책 중의 한권이라는 사실에 행복해하며 2권의 출간을 관심있게 기다렸다. 1년여의 시간이 흐르며 차츰 기억에서 잊혀져 갈 무렵 2권의 출간 소식은 나의 마음안에 마치 가뭄에 단비를 맞이하는 농부의 심정 그 자체로 다가왔다.

1권에서 저자는 로마라는 도시국가가 세워지게 된 배경부터 왕정이 세워지고, 이후 공화정으로 정치체제가 바뀌게 된 이야기들, 1권의 마지막에서는 갈리아인들에 의해 그 찬란했던 로마가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비극과 함께 카밀루스라는 영웅에 의해 로마가 수복되는 이야기를 끝으로 1권을 마무리한다. 이어 2권은 끝나지 않는 전쟁이라는 부제에 어울리게 BC389년부터 BC293년까지 대략 100여년의 시간동안 진행되어 왔던 공화정 로마와 로마를 둘러싼 주변 도시국가들과의 치열하고 처참한 크고 작은 전쟁과 전투의 기록들로 가득하다.

이 시기는 대부분 동일한 패턴으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감을 볼 수 있다. 전쟁이 없는 시기의 로마는 내부적으로 귀족과 평민들이 고리대금과 토지 문제 같은 경제적 이슈로 인해 갈등하다가 외부의 적들에 의한 침략이 이루어지면 원로원은 군대를 일으켜서 적들과 싸우기 위해 지금의 군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독재관을 임명하고, 임명된 독재관은 자신과 함께 군대를 이끌 부사령관급의 사마관을 지명한다. 그리고 이들은 징집된 로마군단을 이끌고 외부의 적을 맞아 전투를 벌이고, 승리한 후 약탈을 통해 전리품을 획득하여 원로원의 허락 하에 개선 군대로서 로마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복귀한다. 이러한 역사 패턴의 반복이 본서의 전면에 흐른다. 내부의 갈등은 외부의 위기를 통해 극복한다는 중국 병법서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고대 로마의 역사 속에서 여실히 증명된다는 점은 독자들이 눈여겨볼 만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은 책의 제 9권 <카우디움 협곡에서의 대참사> 이다. BC321년 로마군은 삼니움군과의 전투를 위해서 카우디움이라는 지형적으로 매우 불리한 협곡을 통과하는 무리수를 선택한다. 삼니움군의 매복이 기다리는 협곡에서 독안에 든 쥐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린 로마군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고,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면 제 아무리 용맹스러운 로마 군단이라 할지라도 삼니움군에 의해서 전멸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삼니움군의 사령관 폰티우스는 백전노장인 자신의 아버지 헤레니우스에게 신이 내린 듯한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 지에 대해서 조언을 구했을 때 이 노병은 로마군을 절대 공격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놓아주든가 아니면 한명도 남기지 말고, 전부 도륙하라는 극과극의 처방을 내놓는다. 이러한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정반대의 조언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낸 폰티우스는 로마군을 무사히 보내주는 대신 로마군 모두가 무장해제를 한 후 반라의 몸으로 걸쳐놓은 막대기 아래로 허리를 굽혀 지나가야 하는 명예를 먹고 사는 군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치욕의 행위를 강요한다. 이런 말할 수 없는 수모와 수치스러운 치욕을 견디며 목숨을 구걸한 로마군은 숨만 붙어 있을 뿐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듯한 마치 좀비의 모습을 한 채 로마로 복귀한다.

이후 카우디움 협곡에서의 굴욕의 책임이 당시 군대를 이끈 사령관이었던 포스투미우스 자신에게 있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신병을 삼니움에게 넘겨줌으로서 로마는 삼니움과의 평화보장에는 책임이 없음을 주지시키고, 삼니움과 전면전을 벌이도록 억지 명분을 만드는 포스투미우스의 계략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포스투미우스와 로마의 얼토당토한 계략에 대해 삼니움의 사령관 폰티우스는 일언지하 거절한다. 너희가 그렇게 평화보장을 없던 것으로 하려면 너희 군대가 모두 항복전처럼 카우디움 협곡으로 돌아와서 독안에 든 쥐가 되는 상황을 똑같이 재연해놓아야지만 평화보장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가막힌 답변을 내놓으며 치욕스러움에 한창 독이오른 로마의 예봉을 꺽는다. 하지만 로마는 삼니움의 수락여부와는 상관없이 억지스러움으로 평화 보장의 이행을 완료했다고 생각하고, 이제 자신들의 명예에 먹칠을 한 삼니움군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잔인한 복수전을 시작한다. 내용에 따르면 불명예와 치욕을 씻기 위한 불타는 듯한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로마군은 피에 굶주린 미친듯한 모습으로 삼니움 진영을 향해 돌격했고,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 남녀노소 심지어는 가축들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는데 만약 지휘관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모든 생명체가 하나도 남김없이 도살되었을 법한 피비린내 진동하는 복수전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 본문을 읽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사가 떠올라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된다. 로마군을 털끝하나 건드리지말고 평안히 보내주는 은혜를 베품으로서 로마를 영원한 우방으로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로마의 주력 군단을 완전히 궤멸시킴으로서 로마군을 향후 수십년간 회생 불능으로 만들어버림으로서 일시적이나마 평화를 누릴 것인가? 선택해야 했던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조언을 우숩게 여기고, 로마군에게 치욕스런 항복과 함께 병력을 그대로 보존토록 만든 이도 저도 아닌 최악의 결정을 내림으로서 그물에 걸린 사자의 코털을 뽑는 어리석음을 보여주었다. 예전에 읽었던 <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라는 책이 떠오른다. 인류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은 판단에 의해서 만들어져왔다는 인간의 우둔함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 넘쳐났던 책이었는데 리비우스 로마사를 통해 그 책의 내용을 검증받게 된다.

인간사가 '모 아니면 도'라는 공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가끔은 '모 아니면 도' 의 수학 공식과 같은 선택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결정을 해야하는 선택의 순간에서 이도 저도 아닌 마치 폰티우스와 같은 회색빛깔 선택을 통해서 일을 그르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오죽하면 결정장애인들을 위해서 '짬짜면' 이라는 요상한 메뉴까지 등장했을까?

또한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감내하기로 결정한 굴욕적 평화보장을 깨고 삼니움을 전멸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신병을 삼니움에게 넘기라는 참 얄팍한 상술같은 계획을 계책이라고 들고 나온 집정관 포스투미우스의 모습이 참으로 이채롭다. 굴욕의 책임을 지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겠다는 희생정신에는 고개가 숙여지지만 한편으로는 참 찌질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약속을 하고 약속을 밥 먹듯이 깨지만 또 그 약속과 신의를 깨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비굴하게 표명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추한 모습들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삼니움군의 사령관 폰티우스의 어리석음, 로마군 집정관 포스투미우스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불성실함이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게 깊은 깨달음과 통찰로 다가온다. 그러면서 또한 책의 중후반부에 등장한 감찰관 아피우스의 이야기 또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8개월의 감찰관 임기가 끝난 후 동료 감찰관 플라우티우스는 법규대로 감찰관직을 사임한다. 그러나 다른 한명의 감찰관이었던 아피우스는 법정 시한으로 정해진 감찰관직을 내려놓지 않고 버티는 이례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감찰관의 임기가 예전에는 5년이었는데 최근에 18개월이라는 짧은 임기로 개정된 법에 대해 순응할 수 없었던 그만의 궤변을 가지고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결과는 그 혼자 억지스럽게 단독 감찰관 업무를 계속 수행했다는 것으로 끝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대한 그 말할 수 없는 미련은 달콤한 마쉬멜로처럼 끊을 수 없는 유혹인가보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고개를 숙일 수 있게 만드는 그 권력의 달콤함을 한번 맛본 사람들은 마치 마약과 같아서 쉽게 그 자리를 내려놓지 못한다고 하던데...국가나 기업이나 교회나 사회 시스템 전면에 퍼져있는 가진 자의 그 역겨운 권력에의 욕망, 고대 로마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그 추한 단면을 생생하게 엿본다.

역사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울과 같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민낯을 본다. 우리보다 앞서 살다간 그들의 아름다움과 추함, 성공과 실패를 바라보며 우리는 그 이상의 성공을 꿈꾸고, 때로는 선조들의 잘못을 재탕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반면교사 삼는다. <리비우스 로마사 2>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로마라는 당대 최강의 국가가 그들을 둘러 싼 여타의 도시국가들과 끊임없이 부대끼며 살아 간 꾸밈없고 가식적이지 않은 역사적 산 교훈을 전달한다. 100여년의 시간동안 끊임없이 죽고 죽이는 전쟁의 역사 속에서 로마라는 공동체는 그들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정치 체제와 군사적 기반들을 마련해간다. 그러한 사회적 발전의 과정 속에서 로마는 더욱 더 튼튼한 국가로서의 기틀을 세워 갈 수 있었고, 이후 도래하게 될 제정 로마의 길을 닦는 사전 작업으로서의 과업을 이루어나간다.

한권의 책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루말할 수 없이 크다. 특별히 실제로 있었던 사실에 대한 객관적 서술을 기반으로하는 역사서야 두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독자는 로마라는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위대한 민족의 생생한 삶의 보고 속에서 인간 사회의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들을 엿본다. 그리고 그러한 실제적인 교훈과 가르침을 각자의 삶 속에 진득하게 우려내기 위한 또 한번의 지난한 작업들을 해나가야 하는 필연적인 숙제를 부여받는다. 왜냐하면 로마사라는 거대한 역사 수업 강의실에 들어 온 이상 독자는 리비우스라는 당대 최고의 역사가를 교수님으로 모시게 된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가 던지는 로마사라는 크고 깊은 지성의 바다 속에서 빠져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허우적거려야 할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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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처럼 -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 A to Z
나카무라 구니오 지음, 이해란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사랑받는 애완 동물을 꼽으라면 단연 개와 고양이일 것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 가운데서 개와 고양이는 인간들과 가장 가깝게 지내며 사랑을 받아왔던 동물들임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개와 고양이는 동물이라기 보다는 인간에게 있어서 마치 가족과 같은 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는 대상일 수 있다. 이번에 현대지성을 통해서 만나게 된 책 <고양이처럼>은 이렇게 인간에게 있어서 오랜 친구와 같은 존재인 '고양이'를 모티브로하여 쓰여진 작은 에세이집이다.

고양이의 생태와 습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일본인 저자 '나카무라 구니오'는 영상 디렉터이자 북카페의 주인이라는 톡특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고양이라는 인간과 친숙한 대상을 통해 사람들 또한 한낱 미물이라고 여기는 동물들을 통해서도 인생의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리스트업이다. 알파벳 A부터 Z까지의 이니셜 순서대로 고양이가 가진 특징들을 매우 섬세한 시각으로 캐치하여 인간이 사회 생활 속에서 억압받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좀 더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흥미롭게 대입시킨다. 보통 인생을 살면서 해야할 일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고, 인간사 자체가 무엇인가를 해서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만이 생산적인 활동으로 여겨지기에 사람들은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서 해야할 일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오늘도 악다구니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본서는 이러한 삶을 바라보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을 뒤집는 명제를 제시하니 그것이 바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한 강조다.

책의 내용 가운데 몇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해본다.

C Claw-발톱 : 때로는 발톱 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배를 오랜동안 살살 문질러주면 별안간 발톱을 세우고 펀치를 날린다고 한다. 고양이를 키워 본 적이 없기에 책을 통해 처음 접하는 내용이 흥미롭다. 기분은 좋지만 이제 적당히 하라! 는 의미란다. 고양이의 습성은 적당한 거리감을 요구한다. 저자는 무엇이든 앞뒤 가리지 않고 떠맡지 않는 것을 '고양이식 생각법' 이라고 말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기대감과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나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는가? 거절하지 못했던 나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책장 넘기기를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놈의 체면, 예의범절,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주어야지만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빈약한 자존감, 거절하지 않아야지만 착한 사람이라는 착한 아이 컴플렉스. 이러한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발톱 세우기를 주저하도록 만든 원흉이다. 이제 좀 나쁜 사람이 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니 나쁜게 아니라 내 자신을 먼저 돌보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런지?

H Honor-명예 : 명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명예보다는 자유를 선택하여 사람들에게 주목받기를 거절함으로서 일본의 문화훈장을 거절한 고양이 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즈'는 생전 그 자신이 사랑했던 고양이와 같은 인생을 산 인물이다. 사람들의 주목보다는 눈치보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것을 소소한 행복으로 여겼던 그의 삶은 마치 따뜻한 봄볕을 쐬며 마당 장독대 한켠에서 꿀맛같은 낮잠을 통해 세상 편한 듯 삶을 즐기는 고양이의 모습 그대로다. 사람들의 관심과 박수갈채에 열병난 세대, 명예와 명성에 갈급해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받고 싶어하여 미친듯이 몸부림치는 내면이 공허한 사람들의 병적행태들은 그 흔한 SNS만 들어가봐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오죽하면 사람들에게 관심받기를 병적으로 갈망하는 세대에 대한 비하로 '관종'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을까? 씁쓸하다. 왜냐하면 나 또한 어느 정도 그러한 관종의 병적 요소를 가진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기에 그런가보다.

Y Yesterday-어제 : 어제 일에도 내일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사흘이면 은혜를 잊는다" 고 한다. 그만큼 고양이는 망각의 동물이다. 개는 주인에 대한 기억을 가짐으로서 충직함을 대표하지만 고양이는 주인도 몰라본다는 이야기가 그냥 생긴 말이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논지는 그게 아니다. 저자가 본 chapter를 통해 말하고자하는 주제는 바로 잊어버림을 통한 자유함이다. 인간만큼 어제와 오늘 내일에 집착하는 존재가 또 있을까? 관계와 사랑에 집착하고, 재물과 명예와 커리어, 권력에 집착하고, 쾌락에 집착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집착은 자신 스스로를 억압하고 속박하는 하나의 굴레다. 집착하게 될 때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다. 삶이 힘들다라고 입버릇처럼 내밷지만 그러한 말을 습관적으로 내밷기에 앞서 나의 삶에서 잊어버리지 못하고 붙잡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것은 없는지 정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양이라는 그 흔한 존재를 통한 작은 에세이집 한권이 의외로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만드는 상념의 시간으로 인도한다. 결국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는 단 하나의 핵심적인 주제는 바로 고양이와 같이 욕심을 내려놓고 자유함을 누리라는 것! 문제는 하나라도 더 가져야만하고, 내 이름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서 관심과 명성을 얻어야하는 등의 욕심의 주제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들은 나 자신을 나 자신답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유일한 장애로서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늘도 그 달콤함 속에 자신의 몸이 비대해져가는 줄도 모르고 침식되어만 간다.

보너스로 책의 뒷편에 실린 고양이를 주제로 한 네코멘터리 소설 <네코토피아:고양이 낙원 만드는 법>은 저자가 북카페를 시작함에 있어서 경험한 기묘한 이야기를 짧막한 소설로 엮은 것이다. 독자는 고양이를 통해 영감을 얻고 고양이를 주제로 북카페를 시작한 저자의 이야기를 보며 그가 얼마나 고양이를 사랑하고 그것을 통해 마침내는 자신의 삶의 모양까지 디자인했을 정도로 고양이에 푹 빠진 사람인지를 간접적으로 알게끔 만든다. 인간은 생각하는 고양이로소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생각 속에서 오늘부터 주변의 고양이들을 만나면 조금은 주의깊게 관찰하게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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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일기 세계기독교고전 3
존 웨슬리 지음, 김영운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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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한 그룹의 개신교 목회자들이 생전에 존 웨슬리 목사가 설교하던 영국의 모 교회를 방문했다. 목회자들 중 한분이 일행을 안내하는 현지 가이드에게 물었다. "존 웨슬리 목사님 생전 그의 성공적인 목회와 복음 사역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현지 가이드가 답했다. "목사님! 그 비결을 알고 싶으십니까? 그럼 알려드리겠습니다. 자! 강단으로 올라오십시요! 그리고 존 웨슬리 목사님처럼 강대에 무릎을 꿇으십시요!" 라고 말했고, 질문을 던진 한국인 목사님은 현지 가이드가 시키는 대로 따라했다. 존 웨슬리가 평소에 무릎을 꿇었던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은 한국인 목사님에게 현지 가이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잘 하셨습니다. 자! 이제는 우십시요!"

이 짧막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개신교 교단 중 감리교의 창시자인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복음전도자이며 목회자인 '존 웨슬리' 의 그 구령의 열정 중 한 토막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기도의 모습까지는 따라할 수 있지만 잃어버린 수 많은 영혼들에 대한 그 단장의 고통과 함께 흘리는 눈물의 기도는 결코 쉽게 모방할 수 없었다는 일화는 그가 얼마나 복음과 영혼에 대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함을 가진 복음 전도자였는지를 일깨워준다.

본서는 이렇게 1703년 18세기 초에 태어나 1791년 세기말까지 살면서 거의 18세기 전체를 복음 전파 하나만을 일생일대 삶의 목표로 여기며 살아내었던 위대한 영적 거인의 발자취가 기록된 저작이다. 존 웨슬리 본인의 일기를 후에 편집자인 '퍼시 파커'가 축약하여 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 웨슬리의 일생을 가장 집약적으로 알려주고 있기에 현대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감리교를 처음 시작한 존 웨슬리의 일대기를 이보다 더 상세하게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은 드물 것이다.

1735년 조지아 선교사로서의 행보부터 시작되는 그의 일기는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 해인 1790년까지의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옥스퍼드 대학 시절 존 웨슬리는 '신성 클럽(Holy Club)' 을 조직하여 찬송가 작사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자신의 동생 찰스 웨슬리와 자신 못지 않은 위대한 영적 거인 조지 휫필드 등과 같은 경건한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며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등의 신앙운동을 통해서 젊은 시절부터 이미 복음 사역자의 초석을 놓기 시작했다. 이후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미국 조지아로 가는 배에 오르는데 그 배에는 한무리의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원만할 것만 같았던 그들의 뱃길은 이윽고 배를 한번에 산산조각 내버릴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폭풍을 만나게 되고 배에 탄 많은 승객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 두려워 떨기 시작한다. 하지만 웨슬리는 이러한 순간에 믿기지 않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이제 곧 배를 삼킬 듯 달려드는 폭풍우 속에서 한치의 요동함도 없이 조용히 시편을 낭독하는 한무리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믿기지 않는 장면에 대해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736년 1월 25일 주일 (중략) 예배가 시작되면서 시편이 낭송되고 있는데 파도가 덮쳐서 큰 돛대가 산산 조각이 나고 배를 뒤덮어 갑판과 갑판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큰 바다 깊은물이 우리를 다 삼켜 버릴 것 같았다. 영국 사람 사이에서는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독일 사람들은 조용히 계속하여 시편을 낭송하였다. 나는 후에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두렵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아니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당신네의 부인들과 어린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부드럽게 대답하였다. "아니오, 우리네 부인들과 어린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기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개신교 선교 역사 속에서 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독일 경건주의의 대표적 아이콘인 모라비안 교도들이라고 소개되고 있고, 이때 이들의 이러한 죽음을 초월한 깊은 경건함은 이후 존 웨슬리가 평생토록 복음 사역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큰 영감과 더불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전한다.

본서는 일기 형식으로 기록되었기에 내용이 매우 스피드하게 전개된다. 대부분 존 웨슬리가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가 시간과 장소를 따라가며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독자는 교통수단이나 통신수단도 변변치 않았던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의 그 위대한 복음 사역의 한 현장을 함께 동행하며 직관하는 듯한 현장성을 실감나게 맛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연평균 8000마일을 말을 타고 다니면서 연 1000회가 넘는 설교를 했다. 교구 목회자가 아닌 순회 복음 전도자였기에 그의 대부분의 설교 장소는 야외였으며 그렇기에 어느 곳이든 그가 발을 딛고 서는 곳은 그의 교회였고, 지나가다 멈춰서 그의 설교를 듣게 되는 모든 이들은 그의 회중들이었다.

그가 영국 국교회의 배경속에 있었지만 감리교라는 새로운 교단의 시작은 분명 당시 시대와 종교적 배경 속에서 쉽사리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이었기에 존 웨슬리의 복음 사역은 환영을 받기보다는 감리교를 이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비난과 천대 심지어는 집회를 방해하는 폭력배와 부랑자들로부터의 갖은 폭력과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만드는 칼부림과 같은 고난과 핍박의 시간들이 더 많았음을 본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웨슬리 그가 자주 애용했던 주 교통수단인 말에서 떨어지는 일은 다반사였고, 말을 타고 가다가 수렁과 물에 빠지는 일과 타고 가던 마차가 뒤집어지고, 배가 파선될 것 같은 폭풍우를 만나는 등의 자연적인 위협들 또한 존 웨슬리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크나큰 위험 요소로 빈번하게 상존했다. 더군다나 가정적으로는 남편의 서류들과 편지들을 몰래 훔쳐 내용을 변개하여 적수들과 신문사에 넘겨주어 남편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웨슬리가 전도 여행을 가면 질투와 의심에 사로잡혀 100마일 씩 말을 달려 남편을 쫓아가고, 남편에게 난폭하게 손찌검을 하며 남편의 머리털을 한줌씩 잡아 뽑는 등의 악행을 일삼았던 3대 악처 중 하나인 아내를 두었다는 사실은 위대한 복음 전도자의 삶에 있어서 매우 아이러니컬한 사실이면서 동시에 그의 지난한 인생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해준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5,38~39)

나는 존 웨슬리의 이러한 고난과 핍박의 상황 속에서도 오직 잃어버린 영혼과 하나님을 향한 그 끊을 수 없는 사랑과 열정을 목도하며 사도 바울의 위와 같은 고백을 떠올린다. 위험천만한 삶의 정황들과 자연의 위협, 수 많은 대적자들의 비난과 방해, 무지한 백성들과 폭력배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칼 앞에서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자신이 끊어지지 않을 것임을 굳게 믿고 신뢰한 한명의 위대한 영적 거인의 삶을 통해 잃어버려졌던 수 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부터 영생을 얻게 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 감격의 장면들을 본서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데 있어서 웨슬리에게는 이러한 모든 장애들은 그저 한낱 작은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불굴의 의지와 복음과 구령의 열정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그의 마음 속에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불타는 듯한 갈급함만이 있을 뿐이었고, 그것은 '온 세상이 나의 교구다' 라는 그의 외침 속에 아주 잘 녹아있다.

88세의 일기로 그가 그토록 사모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릴 때까지 결코 진정한 쉼이 없었던 이 위대한 전도자의 삶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또 다시 겸손히 나의 영혼의 옷깃을 여민다. 한번 왔다가는 인생을 누구는 이렇게 영혼의 주인되신 분을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불사르는 삶을 살다갔는데 또 다른 누구는 오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며 연약한 믿음의 한계성을 습관처럼 내밷고 살아가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나는 개인적으로 존 웨슬리가 시작한 감리교의 근간을 이루는 알미니안 신학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견해가 조금은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알기에 존 웨슬리의 일기를 통해 다시 한번 그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영혼에 대한 불붙는 듯한 열정에 진심어린 박수와 함께 존경의 고개를 숙인다. 거인의 발자취! 배우고 싶고, 따르고 싶어 눈물이 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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