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안 나이트 - 천일야화 현대지성 클래식 8
작자 미상 지음, 르네 불 그림,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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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에는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 정서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비롯해서 북유럽 신화, 이솝우화, 안데르센 동화, 탈무드, 우리나라의 흥부와놀부전 그리고 오늘 서평으로 소개하는 <아라비안 나이트>까지 문화와 관습, 사람들의 삶의 모양은 다르지만 그 안에 인간 사회의 희노애락과 권선징악과 같은 교훈과 가르침을 담은 고전의 인문학적 가치는 이루말할 수 없이 크다.

아라비안 나이트하면 알라딘과 요술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신밧드의 모험 등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린시절 아라비안 나이트는 이렇게 가장 대표적이고 흥미로운 주제의 이야기들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TV에서 방영되었던 것을 본 경험이 전부였던 내게 이번에 만나게 된 현대지성의 <아라비안 나이트>는 대표적이고 유명한 이야기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에게는 좀 덜 알려진 아라비안 나이트 원작의 다른 이야기들이 다수 수록되어있다는 점에서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책은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에서도 잠간 언급한 것과 같이 유명한 이야기들을 제외한 나머지의 이야기들은 모두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스토리들로서 읽는 내내 재미와 교훈을 선사하는데 있어서 결코 어느 책에도 뒤지지 않는 탁월함이 엿보이는 이야기책이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흔히 '천일야화'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1001일 밤에 들려진 이야기' 라는 의미로서 아리비안 나이트의 서막이 어떻게 열리게 되었는지를 파악하게끔 하는데에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키워드이다.

고대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황제인 샤리야르는 자신의 아내에게 배신을 당하고 난 이후 아내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자기만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새롭게 아내를 맞이하면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죽여버리는 악행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왕국의 수 많은 처녀들이 그렇게 하룻밤 왕비가 된 후 이튿날 아침에는 싸늘한 주검으로 궁전에서 나오게 되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그 나라 재상의 딸 셰에라자드는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자청하여 황제의 아내가 되기로 결정한다. 황제의 아내가 된 첫날 밤 셰에라자드는 황제에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제는 아내가 들려주는 너무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듣다가 가장 궁금해 할 대목에서 이야기가 다음날로 이어지게 되는 마치 주말연속극 클라이막스에서 "다음 이야기는 다음 주 이 시간에..."와 같은 감칠맛을 곁들인 아쉬움 한 스푼을 시전받게 된다. 이러니 황제가 어떻게 자신의 아내를 다음날 아침에 죽여버릴 수 있겠는가? 다음 이야기의 내용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 왕은 계속적으로 아내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내를 살려주게 되고, 그 이야기가 1001일밤 동안 계속되었다고 해서 본서는 <천일야화>라고 불린다.

그 천일야화 속 다양한 이야기들 중 몇가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신밧드의 모험, 알라딘과 요술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들과 같은 이야기들로서 이들이 마치 옴니버스식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구성적으로 보아도 매우 흥미롭다. 마치 한편의 액자소설을 보는 것과 같다. 본서의 서문격인 셰에라자드 왕비의 이야기를 큰 틀로 그 안에 11개의 독립된 이야기들이 들어간다. 그러나 3장과 6장, 7장, 8장, 10장의 이야기들은 그 안에 또 세부적인 이야기들로 나눠진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존재하듯이 본서는 그 구성에 있어서도 남다르다.

어린 시절 TV앞에서 알라딘이 램프를 문질러서 램프의 요정 지니를 불러내어 소원을 말하는 장면이나 열려라! 참깨! 를 외치는 알리바바의 모습 속에서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동심의 시절 느끼지 못했던 원작을 통한 새로운 사실들과 교훈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이제 내가 사리를 분별하고, 세상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동심의 상상력을 세상의 사리판단과 맞바꿀 정도로 이미 세상의 온갖 때가 많이 묻었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본서를 읽는 독자가 만일 어린 시절 TV속으로 빠져들어갈 정도로 몰입하며 보았던 그 재미와 흥미로움 속에만 머물기를 원한다면 어쩌겠는가? 독자의 선택이니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본서를 통해 인간사의 숨겨진 의미와 교훈을 발견하는 것에 어느 정도의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한다면 독자는 우리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아라비안 나이트가 독자들에게 주는 새로운 가르침의 향연을 누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이 인간 세상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 한권의 책에는 인간의 희노애락과 권선징악, 흥망성쇠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인간의 선함과 악함, 착한 행실과 깨끗한 마음, 끝없는 욕심과 탐욕이 공존하며 은혜와 배신이 대립각을 이룬다.

특별히 9장 아메드 왕자와 페리 바누 요정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의 욕심과 의심의 추잡한 마음에 대한 교훈을 발견한다. 자신의 착한 아들마저 자신의 왕권을 찬탈할 수 있는 잠재적 원수로 여기며 의심하는 아버지 왕의 그 타락되어져 가는 내면의 모습 속에서 인간 영혼의 그늘을 보게된다. 또한 10장 하룬 알 라시드 왕의 모험 이야기 속 이야기로 등장하는 바바 압달라는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 준 은인에게 사례를 한 재물마저도 아까워서 탐욕을 부리며 급기야는 그 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 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맹인이 되는 길을 선택함으로서 시력과 수 많은 부를 한꺼번에 잃고 맹인 거지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이 바바 압달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바 압달라는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수 많은 탐욕스런 인간들 중에서 자신의 삶을 파멸에 이르도록 만드는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탐욕과 욕심의 끝판왕이라 칭할 만하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책의 전면에는 재물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유혹과 탐심을 지닌 인간들이 수 없이 등장한다. 자족할 줄 모르는 인간들의 탐욕은 징그럽기만하다. 남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의 눈초리를 쏘아 보내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의 인간들이 넘쳐난다.

책을 읽으며 어느 하나의 책이 가진 향기가 전해져 온다. 몇해전 읽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가 그것이다. 캔터베리 대성당의 참배를 위한 일단의 참배객들이 노상에서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각자 흥미로운 짧막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는 것이 책의 주요 줄거리이다. 본서와의 동일한 느낌은 바로 여과없는 인간군상의 민낯을 목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랑과 배신, 유혹과 탐욕, 믿음과 의심이라는 인간사에 있어 세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흐르는 주요 화두들은 두 책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주제이다.

책을 덮으며 선행과 믿음, 신뢰, 자족할 줄 아는 마음과 같은 제대로 된 정상적인 인간들이 탑재하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인간성의 본질을 다시금 돌아본다. 어린 시절 시간만 되면 우리를 TV 앞으로 이끌었던 아라비안 나이트의 대표적인 스토리 '알라딘과 요술램프' 가 영화로 제작되어 요즘 극장가를 강타하고 있다. 벌서 1000만 관객을 넘었을 정도로 평이 좋은가보다. 물론 나는 아직 못보았다.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원작의 인기 또한 상승해보길 기대한다. 원작 속 26편의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가지 물고기를 함께 잡아볼 수 있는 여유있는 여름 휴가 시즌을 보내는 것도 분명 매력적인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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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없이 떠나는 제주 여행 코스북 - 버스.자전거.도보로 제주를 여행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
정은주 지음 / 길벗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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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 전 하와이 보다도 아름다운 곳이 제주도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주관적 평가이기에 100% 동의할 수 없지만 필경 제주도는 국내 최고의 휴양지요 관광지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제주도는 육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동경의 대상이고,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같은 국내이지만 마치 외국과 같은 느낌과 함께 한번 방문하려면 시간과 재정을 준비해서 떠나야 하는 일종의 해외여행과 같은 치밀한 계획이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제주도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블로거들이 올려놓은 포스팅을 보며 숙박과 맛집, 관광 코스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다.

제주도를 여행했던 많은 블로거들의 포스팅은 정말 유용한 정보로 가득하다. 맛집과 여행코스, 숙박 정보까지 자세하게 기술된 포스팅도 제법 많아서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도 포스팅은 블로거의 주관적인 느낌과 포스팅 내용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2% 아쉬운 제주도 여행에 대한 다채로운 정보를 가득 담고 있는 책 한권이 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하는 <차 없이 떠나는 제주 여행 코스북>이다. 제목부터가 참 도전적이지 않은가? 차 없이 제주도 구석구석을 여행한다? 이게 가능한 말인가? 십여년 전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제주살이를 하다 온 나의 체험상 제주도는 작은 경차라도 한대 있지 않으면 사실 돌아다니기가 어려운 곳이라는 경험이 이 책을 더 읽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제주도는 차 한대만 있으면 어느 곳이든 누비면서 신나게 여행을 할 수 있지만 차가 없는 뚜벅이 + 대중교통으로 제주도 곳곳을 여행한다는 이 기가막히면서도 은근히 설레는 여행 가이드북의 신선한 제목을 뒤로하고 책장을 넘긴다. 책은 크게 3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버스, 자전거, 도보로 여행하는 제주도에 대한 가이드를 파트별로 나눈다. 책의 초반부는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서론격으로 테마로 알아보는 제주 여행에 관한 정보가 빼곡하다. 책방, 플리마켓, 먹거리 맛집 등 제주도에서 맛보는 아날로그적 감성의 총체를 테마별로 나누어 소개하는 제주 여행에 관한 내용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유용한 정보이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우선 버스를 이용한 제주 여행 가이드의 내용이 펼쳐진다. 제주도의 2대 도시인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가볼만한 장소와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부와 서부로 구분하여 방문할 수 있는 여행코스로 나누어 안내한다. 본서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제주도의 모든 버스 노선에 대한 정보를 수록했다는 점이다. 버스 번호와 노선도, 여행 동선 짜기, 숙소 정하기와 같은 여행의 일반적인 준비부터 각 코스별 이동 방법과 각 코스별 방문해야하는 행선지에 관한 정보가 지도, 사진과 함께 매우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음으로 처음 제주도를 방문한 관광객이라 할 지라도 본서 한권만 손에 들고 다니면 크게 겁먹을 이유가 없을 듯 하다.

저자의 세심함과 배려가 엿보이는 부분은 각 여행 코스에서 여행객이 관광을 하고 그 주변에서 식사를 할 수 있을만한 맛집까지 발굴하여 소개한다는 깨알같은 배려와 살가운 기획력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멋진 관광지를 찾아갔다 한들 그 주변에서 식사를 하려고 할 때 사전 정보가 없어서 무엇을 먹어야 할 지 길에서 고민을 해본 한두번의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이러한 책의 구성은 정말 박수 쳐줄만하다 여겨진다.

두번째 파트에서는 자전거로 제주도를 여행하고자 계획하는 바이크족들을 위한 매우 유용한 정보가 한가득이다. 우선 제주환상자전거 10코스를 제주 지도에 표기함으로서 한눈에 자전거 여행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돕는다. 북제주 용두암에서 출발하여 서쪽 방향 즉 애월읍 쪽으로 이어지는 소위 제주도 해안가를 따라서 이동하는 자전거 경로를 소개하고 있는데 각 장마다 역시 볼거리와 먹거리 맛집 소개 또한 빼놓지 않고 수록되어 있다. 자전거 여행을 계획한 사람들에게 먼저 육지에서 내 자전거를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제주도에서 자전거를 대여할 것인가부터 코스 짜기와 준비사항, 안전수칙까지 완벽하게 기술된 내용은 실제로 자전거를 이용하여 여행하는 제주도의 특별한 추억을 선사하리라 본다.

마지막 파트에서는 도보로 여행하는 제주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제주도 도보 여행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올레길 코스이다. 현재 올레길은 21개의 정규 코스가 조성되었다고 하니 정말 마음 먹고 21개의 모든 코스를 다 방문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또한 본서는 올레길 뿐 아니라 지질트레일, 한라산 둘레길, 섬마을 골목길까지 제주도 구석 구석의 그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제주도의 아름다운 비경과 소소한 삶의 터전으로서의 제주도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전 페이지 선명한 칼라 편집으로 제주도의 아름다운 절경을 책 속에 그대로 담아놨기에 독자는 책장을 넘기며 마음은 벌써 제주도에 가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설레이게 될 수도 있다. 책을 보며 어떻게 이렇게 깨알같은 정보들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전부 수록할 수 있었을까 놀랍기만하다. 다른 제주도 여행에 관한 가이드북을 접해본 적이 없기에 이보다 더 자세하고 상세하게 제주도에 관한 여행 정보를 담은 책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볼 때는 이것 이상으로 얼마나 더 제주도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담아낼 수 있을까 반문해본다. 그만큼 저자의 세심한 구성과 출판사의 기획력은 놀랍기만 하다.

여행객이 굳이 심미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제주도는 어디를 가나 그 자체가 한폭의 그림이며 한장의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예술 작품이다. 그러나 살고 왔다고도 말하기 부끄럽지만 잠간의 시간을 그곳에서 객으로서 빌붙었던 사람의 근시안적 견해로 볼 때 제주도는 모든 이들에게 2가지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제주도 원주민들의 시각에서 육지것들이라 불리는 관광객들에게 있어서 제주도는 천혜의 신비를 간직한 숨막히게 아름다운 공간 그 자체이다. 시간을 내고, 돈을 모아 여행 계획을 세워 소위 힐링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그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어준다. 깍아지른 듯한 주상절리와 방파제에 와 닿으며 부서지는 새하얀 파도와 이내 사라지는 물거품, 가슴이 열리는 성산 일출봉의 말할 수 없는 장관,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아무도 밟지 않은 해변가 모래 사장을 보고 있노라면 위대한 대자연 앞에 일종의 경외심을 느끼며 우리의 때묻은 영혼은 잠시나마 쉼을 누린다.

그러나 제주도의 또 하나의 얼굴은 바로 그곳을 터 삼아 삶이라는 현실적이고 지난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모습이다. 누군가에게는 마음 먹고 계획을 세워야지만 겨우 1년에 한번 내려갈 수 있을만한 영원한 이국의 장소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세상 여느 사람들과 동일하게 여전히 먹고 살아가야만 하는 땀 냄새나는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진짜 제주도의 참모습은 숨막히는 장관에 감탄하고, 유명 맛집에서 식사를 한 후 제주도를 전부 알았다고 여기며 돌아가는 일시적 여행 속에서는 손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제주도 깡촌 마을의 그 고즈넉한 돌담길이 간직한 세월의 흔적과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불어와 얼굴을 때리는 그 비릿한 바다내음의 기억을 더듬을 때에야 비로소 제주도의 참모습을 조금은 맛보았다고 겸손히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본서는 영원한 타자로서 여행객들의 지친 일상을 위로하는 제주도의 첫번째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기에는 안성맞춤으로 기획된 책이다. 누군가는 그동안 잘 살아왔어! 정말 열심히 달려왔구나! 그러니 이제 좀 내가 베푸는 자연의 시혜를 누리며 쉼을 누리라는 제주도가 건네는 위로와 격려의 숨결을 본서를 통해 더 잘 캐치해내었으면 좋겠다. 이제 여름 휴가철이 다가온다. 많은 이들이 해외로의 휴가를 계획한다. 또한 제주도로의 휴가를 계획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올 여름 제주도로의 쉼을 계획하고 있다면 단연 이 책을 가방 속에 넣고 출발하기를 권한다. 어차피 제주도의 두번째 얼굴은 우리 같은 타자들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본서와 같이 제주도가 우리에게 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힐링의 메시지를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돕는 데에 더할나위 없이 충분한 본서의 도움을 받는 것은 이번 여름 제주도 여행을 위한 가장 탁월한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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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탁상담화 - 종교개혁자의 사적인 대화록 세계기독교고전 49
마르틴 루터 지음, 이길상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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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친분은 없지만 아는 사람 중에 만나면 매번 습관적으로 빈말을 내밷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매번 만나고 헤어질 때 습관적으로 "어! 우리 언제 시간내서 밥 한번 먹어요!" 라는 말을 정말 습관적으로 했다. 처음에는 진짜 나하고 밥을 먹자고 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이후 내가 스스로 깨닫게 된 사실은 그 사람이 밥 한번 먹자고 하는 말은 정말 밥을 먹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안녕히 가세요!" 라고 인사하는 것과 동일하게 그 사람식의 독특한 작별 인사법이었다는 것이다. 어찌나 황당하던지...

정말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당신과 식사하면서 교제를 하고 싶습니다 라는 말이 그 사람에게는 단지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로 둔갑한 이 웃픈 상황을 보며 느끼는 것은 밥 한번 먹읍시다! 라는 말이 가지는 그 깊은 의미를 너무나 과소평가한 듯한 그 사람의 인간관계를 대하는 태도의 경박스러움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아서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는다는 의미는 "안녕히 가세요!"와 같은 가벼운 인사치레 수준을 넘는 제법 진중한 무게감을 가진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혹자는 누군가와 앉아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옷을 홀딱 벗고 함께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리얼리티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좀 과한 표현같기도 하지만 그 이면의 깊은 의미를 알면 어느정도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다.

우리와 함께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즉 가족, 친지, 친구, 선후배, 직장동료들과 같이 친분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모르는 사람과 겸상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이 왕이 된 후 자신에게는 원수와 같았던 사울왕의 혈육 중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자신의 궁으로 데리고 와서 자신과 함께 겸상하도록 지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사울왕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생각하여 결정한 일이지만 원수의 손자와 겸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누군가와 함께 한 테이블에 앉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람은 밥을 먹을 때 마음의 무장을 해제하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기울이며 동시에 나의 진심 또한 이야기하게 된다. 밥을 먹으면서 독설을 퍼붓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면서 즐겁게 밥을 먹는 사람은 없다.

오래 전 서울의 종로 낙원상가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 가면 1500원짜리 시래기 국밥을 파는 식당이 있다. 역사도 오래되어 방송에도 나왔을 정도로 명소가 된 곳이다. 주변 탑골공원의 주머니가 가벼운 노인들을 위해서 십수년째 밥값은 1500원이다. 그냥 메뉴도 없고 들어가서 앉으면 무조건 밥이 말아진 채 국밥 한그릇이 나온다. 그런데 이곳의 독특한 룰이 있다. 그것은 세월이 흔적이 느껴지는 비좁고 허름한 식당의 몇 안되는 테이블에 그냥 자리가 나면 아무나 가서 앉아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일행과 함께 갔다고 자리를 만들어 앉을 수도 없다. 자리가 나면 그냥 모르는 사람과 겸상해서 앉아 먹고 나오면 그만이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경험은 모르는 분들과 앉아서 먹어도 겸상을 한다는 인연 아닌 인연으로 "어디서 왔냐?" "무슨일로 종로에 왔냐?" 는 등의 가벼운 담소를 나누면서 먹게 되더라는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겸상을 해도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것을 볼 때 이 겸상문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니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어요!"를 작별인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는 참으로 안타까운 인간관계의 가벼움을 드러내주는 단면이다.

이러한 밥상, 탁상 앞에서의 만남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들은 진솔하고, 정직하며 속마음을 털어놓는 진실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시간들을 만들어준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지난 열흘간 나는 마음을 깊이 울리는 탁월한 저작 한권을 만났다. 그것은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탁상담화>라고 이름붙여진 책이다. 영어 원제 그대로 Table Talk, 즉 루터가 그의 친구들과 제자들, 개혁의 동지들과 함께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면서 또는 강론을 하거나 그냥 편하게 일상의 대화를 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을 그의 친구들과 제자들은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말하는 단어의 철자하나라도 놓칠까 염려하며 열심히 받아 적었다. 마치 요즘 기자들이 무엇인가 큰 사건을 인터뷰 할 때 노트북을 열어 한자라도 놓칠새라 재빠른 손놀림으로 타이핑을 치듯이 말이다. 어찌나 열심히 받아적든지 한 날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루터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한 제자가 구석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받아 적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장난끼가 발동한 루터가 나무수저에 오트밀죽을 듬뿍 퍼서 정신없이 적고 있는 제자의 얼굴에 들이밀면서 "이것도 받아 적으시게!" 하고 짖궂은 장난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본서의 기록된 내용들의 사실성과 정확성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이다.

책의 내용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우상숭배, 세상의 본질, 예수 그리스도, 성령, 죄. 자유의지, 율법, 기도, 세례, 성찬, 교회, 출교, 적그리스도, 연옥, 천사들, 교부들, 족장과 선지자들, 결혼과 독신 등 열거할 수 없이 많은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적 주제들 그리고 신앙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하고 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가 일상의 삶 속에 시간을 보내며 평소 자신이 연구하고 생각했던 기독교의 진리들을 폭포수와 같이 쏟아낸 내용들을 받아 적어서 문서화시켰기에 이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평생에 대적인 교황과 로마 카톨릭 세력이었다. 그들의 미신과 현세적 신앙, 잘못된 성직 위계제도 등 자신들의 종교를 떠받치고 있는 부패한 교리들과 로마 카톨릭 교황제도의 헛점이 여실히 공격받을 수 밖에 없는 루터의 이 대화들은 그들에게는 참으로 위험한 폭탄과 같은 위해요소였다. 그렇기에 로마 카톨릭 세력은 유럽에서 루터의 대화가 기록된 이 책을 4천권 넘게 압수하여 불태워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적 위협 속에서 당신의 진리를 보존토록 하시기 위해서 큰 은혜를 베푸신다.

그것은 1626년 독일의 한 신사가 자신의 새 집을 짓기 위해 집터를 파내려가는 도중 깊은 구덩이 속에서 린넨 천에 둘둘말려 밀랍으로 봉해져있는 문서 한권을 발견했고 그것은 바로 독일에서 루터의 탁상담화 소각령이 내려졌던 당시 그의 할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땅 속에 깊이 파묻은 것으로서 60여년이 지나 자신의 손자에게 발견된 것이었다. 이 신사는 이 책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책 마저도 소각될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후 고민끝에 잉글랜드에 있는 독일어를 잘 구사하는 캡틴 헨리 벨이라는 정치가에게 위탁하여 어쩌면 이 세상에 마지막 살아남은 루터의 탁상담화를 영어로 번역하여 세상에 널리 전파하도록 부탁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를 담은 마지막 불씨를 꺼버리려는 교황과 로마 카톨릭 세력들로부터 지키시는 은혜를 베풀었다. 그리고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본서는 2019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의 손에 들려져서 읽혀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동적인 일인지 모른다.

신학적인 교리와 신앙적인 내용들 그리고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에서의 실천원리와 삶의 성경적 기준, 격려와 위로, 조언, 훈계와 같은 위대한 개혁자의 가르침이 한권에 녹아있는 보물과 같은 저작을 접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드려 진리를 위해 투쟁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함과 말할 수 없는 헌신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특별히 책의 내용 가운데 루터는 성경을 강조하는 내용을 통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교수들이 성경을 상고한다고 하지만 순전히 인간의 이성을 토대로 사유하므로 그 내용이 공허하기 짝이 없다고 말하는 대목이 인상깊게 다가온다. 그는 책을 통해 바르고 실제적인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상의 의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 루터의 비범함을 다시 한 번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바르고 실제적인 신학에 대해 그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회심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었기에 어쩌면 그가 바르고 실제적인 신학에 대한 강조점을 믿음에 두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놀라운 사실 한가지는 뒤따라 나오는 문장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바르고 실제적인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상의 의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 믿음보다는 행함에 중점을 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했던 루터는 믿음만이 오직 유일한 칭의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르고 실제적인 신학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상의 의무(행위)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믿음에 기초한 행함을 경히 여기지 않는 그의 실천적인 신앙관을 엿보게 된다. 물론 루터는 야고보서의 행함을 원인적 증거로 보았기에 행함을 칭의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복잡한 신학적 논의를 잠간 옆으로 밀어놓고 독자는 서슬 퍼런 중세 암흑기 속에서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과 신앙과 관련된 담화를 자신의 측근들과의 시간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을 수 있었던 루터의 담대함과 비범함 그리고 영적 거인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약 열흘간 하마터면 지구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한줌의 재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을 위대한 저작의 페이지를 넘기는 흥분을 맛본다. 누군가가 나에게만 전해 준 비밀일기를 들춰보는 듯한 짜릿한 지적쾌감이 느껴지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본서는 독자에게 있어 위대한 종교개혁자의 지적 담론을 접하는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평범하지만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의 그 깊은 신앙과 지적 통증의 끝을 보게 된다. 살기등등한 로마 카톨릭 세력의 온갖 위협과 고난 속에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에 믿음으로 응답한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탁상담화>를 통해 올 여름 비뚫어진 진리의 가늠자를 다시금 정렬하기 원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이 비밀(?)문서를 기꺼운 마음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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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러더퍼드의 편지 - 유배지에서 보내는 믿음의 글들 세계기독교고전 43
새뮤얼 러더퍼드 지음, 이강호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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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까지만 해도 인터넷과 휴대폰이 상용화 되기 전 누군가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유선전화기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직접 편지나 엽서를 써서 우표를 붙여 동네마다 거리마다 흔히 발견할 수 있었던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는 일이 흔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어느 순간 인터넷이 개발되고 휴대폰이 상용화되면서 우리네 일상 또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니 편지를 대신해서는 인터넷 이메일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고, 유선전화, 공중전화 등을 대신해서는 이제 손안에 들어오는 휴대폰, 그것도 스마트폰이 그 일을 대신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아니 요즘은 이메일도 잘 안쓴다. 그냥 스마트폰에 깔려 있는 메신저앱을 이용해 문자로 실시간 대화가 가능하기에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서 로그인하고 글을 써서 보내는 이메일도 어느 순간 우리네 삶 속에서는 벌써 한세대 전의 유물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이렇듯 과학기술과 현대문명의 총아로서 이메일과 휴대폰등이 우리의 삶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하게 만들어주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모를 허전함이 있다. 전자기계와 소프트웨어들은 결코 가져다 줄 수 없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아날로그적 감성은 뭐니해도 역시 사람이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따라올 수 없다. 편지만이 가지는 그 고유한 날 것 그대로의 감성은 이메일이나 휴대폰의 한번 열어보면 날아가버리는 것 같은 휘발성과 일시적인 느낌들에서는 결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편지에 대한 단상을 가지고 기독교 고전 한권을 만나니 책의 제목은 <새뮤얼 러더퍼드의 편지>이다. 17세기 스코틀랜드의 목회자이자 신학자였던 새뮤얼 러더퍼드가 유배지에서 자신이 담임했던 앤워스 교구의 성도들과 친구들에게 보낸 200여편의 편지를 책으로 엮은 본서는 그야말로 기독교 서신 문학에 있어서 고전으로 불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탁월한 저작이다. 러더퍼드 목사는 앤워스 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 주교정치와 알미니안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목회지를 박탈당하고, 에버딘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러더퍼드 목사는 자신의 교구 앤워스의 성도들에게 목회자로서 한편 한편 목양의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교회의 부패와 퇴조를 느끼고 염려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는 사람들, 영적성숙을 추구하는 사람들, 각종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 , 그리스도의 성품을 사랑하고 닮기 원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복과 소망 가운데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에게 목자의 마음을 담아 애절한 목회서신을 보내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 동역자들과 초대교회들에게 보낸 신약성경 중 13편의 서신들 가운데 특별히 감옥에서 써 보낸 4편의 옥중서신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같이 본서는 목자가 자신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목양의 그 뜨거운 마음이 깊이 아로새겨져 있기에 본서를 읽는 현대의 독자들 또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혹 그냥 본서를 무덤덤하게 일반적인 편지로서 지나치듯 읽음으로서 그 깊은 감동을 놓칠 수도 있는 독자들은 새뮤얼 러더퍼드가 살면서 사역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조금 이해하게 될 때 이 경건한 편지들이 가지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면서 본서의 숨은 감동을 맛볼 수 있으리라 본다. 러더퍼드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칼빈을 중심으로 한 칼빈주의와 칼빈의 5대교리에 반대하여 생성된 알미니안주의의 신학적 충돌이 항존했던 시절이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회자였던 러더퍼드는 당연히 알미니안주의를 반대했을 것이고, 더불어 주교정치를 반대함으로서 미움을 받아 유배를 떠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자신들과 신학적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는 목회지 박탈과 유배라는 아픔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러한 아픔 속에서 탄생한 저작이 바로 본서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본서를 그냥 단순히 한 목회자가 자신의 성도들에게 보낸 다양한 편지를 엮은 책 정도로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편지 한편마다 실려있는 러더퍼드 목사의 성도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관심 때로는 깊은 위로와 격려, 함께 아파하는 그 목자의 애타는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기에 읽는내내 깊은 감동을 떨칠 수 없다. 자신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환경인 유배지 가운데 있는 사람이기에 가장 불쌍한 사람일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러더퍼드의 온 관심은 자신의 한탄스러운 처지가 아닌 오직 앤워스에 두고 온 자신의 옛 교구 성도들과 그들의 삶에 관한 것이었다.

책을 읽으며 가만히 생각해본다. 유배지로 떠난 자신의 옛 목회자에게 받는 한통의 편지는 그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그러한 편지를 받고 경박스럽고 가벼운 마음으로 편지의 겉봉을 뜯어보았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러더퍼드 목사의 편지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편지를 가슴에 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을 것이고,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쁨을 만끽했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여 어쩌면 편지지가 손떼묻어 해질 정도가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행여 러더퍼드의 대적자들에게 발각될까 염려하여 편지를 아무도 모르는 깊은 곳에 숨겨놓고 조심스럽게 꺼내보며 남몰래 깊은 한숨과 함께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유배지에서의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풀려난 러더퍼드는 1643년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서를 만드는 영광스러운 작업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알미니안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유배를 떠났지만 결국 그는 웨민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서라는 역사적인 개신교 개혁주의의 신조를 탄생시키는 위대한 과업에 동참하는 소위 인생 역전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진리 안에서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위해 결코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던 한 목회자의 삶을 들어서 결국에는 그들의 대적자들을 향해 그의 탁월함과 의로움을 드러내신다. 책을 덮으며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간다. 어려운 상황 속에 러더퍼드는 자신의 옛 교구 성도들의 삶을 끝까지 돌보며 격려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을 돌보라고 위탁받은 목회자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유배라는 기약없는 형벌 속에서 세상에서 제일 가련할 것 같은 자신의 처지는 아랑곳 않고, 오직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앞뒤를 분별하지 못하는 가엾은 양들에 대한 그 한없는 목양의 마음은 지금 우리 시대의 모든 목회자들에게 요구되어지는 동일한 마음이다.

어느 순간 자신이 목회하는 목회지가 밥벌어 먹고 살기 위한 직장으로 여겨지고, 자신이 목양하는 영혼들이 자신을 먹여 살리는 ATM 기계처럼 보이는 목회자가 있다면 당장 이 책을 집어읽으라고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긴급동의에 귀를 기울여보길 바란다. 소명을 회복하라! 식어져 버린 영혼에 대한 구령의 열정을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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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 산업 불황의 원인과, 빈부격차에 대한 탐구와 해결책 현대지성 클래식 26
헨리 조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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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태국 방콕에 간적이 있다. 방콕 시내의 화려한 쇼핑센터를 보며 순간 한국 도심지에서 만나게 되는 여느 대형 쇼핑센터와 견주어도 결코 손색 없는 그 휘황찬란함과 규모를 통해 태국의 발전상을 실감했다. 이후 우리 일행은 그동안 살면서 거의 해본적 없는 매우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방콕 외곽지역에 있는 소위 슬럼가로 불리는 빈민촌 방문이었다. 빈민촌하면 떠올려지는 그 생각하기 싫은 그림들이 있지만 사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기에 내심 호기심 또한 발동한 것이 사실이다. 가이드를 따라서 빈민촌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개인적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이라 말하며 살아가는 그곳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며 나도 모르게 양미간이 찡그려지고, 자연스럽게 손으로 코를 가리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온 마을 천지가 쓰레기로 뒤덮여 있기에 악취는 말할 것도 없고, 곳곳에 오물과 오수가 넘쳐나는 말 그대로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주거 공간이 게딱지 마냥 따닥따닥 붙어서 군락을 형성한 곳의 모습은 차마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 보다는 미안한 말이지만 개, 돼지와 같은 짐승들이나 있을만한 그런 축사와 같은 느낌 그 자체였다.

1시간 남짓의 시간이 24시간처럼 길게 느껴진 곤혹스러움을 뒤로 한채 그곳을 나오며 내 머릿 속에서 계속적으로 떠나지 않았던 의문은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방콕 시내의 그 화려한 쇼핑센터와 고급 아파트들의 모습과 방금 내가 목격한 처참한 가난과 빈곤의 현장이 오버랩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극단적인 부와 빈곤의 차이는 무슨 이유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왜 어느 한편에는 자손대대에 걸쳐 평생토록 흥청망청 먹고 마셔도 결코 마르지 않고 샘솟는 화수분과 같은 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느 한편에는 하루 한끼도 먹지 못해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고, 굶주린 엄마품에 안겨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젖을 빠는 굶주린 아기들의 그 힘겨운 숨소리가 일상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만해도 짜증나고, 화가나는 물음에 대한 기가막힌 정답을 제시하는 감동적인 경제고전 한권을 만나니 그 책은 바로 오늘 서평으로 소개하는 19세기 미국 재야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다. 1839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어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헨리 조지가 그의 평생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본서는 그가 실제로 업무차 방문한 뉴욕 슬럼가 최악의 가난과 극심한 빈곤의 현장을 목격한 후 충격을 받아 집필을 결심하게 된 정치경제학분야의 고전이다. 본서에서 저자 헨리 조지는 극심한 가난과 부의 불균형의 원인을 찾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지성적 역량을 쏟아붇는다. 그러나 단지 부의 불균형과 가난과 빈곤의 원인만을 찾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제학적 관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관념과 정의에 대한 바른 태도에 대해서까지 그의 깊은 혜안을 나누기에 독자는 본서 한권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닥친 경제적 난관과 더불어 사회 정의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속 시원한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정치경제학 교수 '알프레드 마샬'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경제학도들에게 cool heads but warm hearts(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를 강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경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차가운 이성으로 당면한 현안과 경제적 난제들을 풀어가되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형편을 생각하고 살펴야지만 한다는 촌철살인과 같은 문장이 아닐 수 없다. 본서를 읽어가며 나는 헨리 조지야 말로 마샬이 말한 바로 그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경제학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본서를 통해 이야기하는 핵심은 극심한 빈부의 격차는 바로 소수의 가진 자들에 의해서 독점되는 토지(땅)의 사유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 조지의 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시대정신은 헨리 조지의 이러한 토지 사유화가 빈부 격차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도 그럴것이 어느 시대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의 기득권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기에 헨리 조지의 주장이 그들에게는 이름도 없는 무학의 경제학자가 주창한 사회주의 사상이나 유토피아적 공상에 불과한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책을 읽다보면 헨리 조지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비판한 한가지 이론을 만나게 된다.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부를 움켜 쥔 사람들과 하루 벌어먹기도 힘든 극심한 빈곤과 끝이보이지 않는 가난의 쳇바퀴 속에서 절망의 눈물로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존하는 부의 불균형의 이유를 인구 증가와 같은 자연현상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치부해버리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그것이다. 즉 인구가 많아지면 수요는 많아지고 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많은 일자리가 필요해진다. 그러나 노동 인력이 넘쳐나면 한정된 자본을 통해 늘어난 노동에 대한 임금을 나눠가져야 하기에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임금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근시안적 이론이다.

그렇기에 인구의 자연적 조절을 위해 전쟁, 기근, 가난, 전염병과 같은 자연적인 제약은 인구의 과도한 증가를 막아주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그의 이런 단세포적 생각은 마치 인류의 개체수를 인위적으로 줄여야지만 지구를 쾌적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미명하에 사악한 테러집단이 전염병이나 대규모 공격으로 다수의 인간들을 청소한다는 어느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인구 증가라는 자연적인 재해(?)를 허락한 창조주의 무능력을 간접적으로 비꼬는 신성모독적 이론이 아닐 수 없다. 하기는 맬서스 본인이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태생부터 금수저였기에 아마도 차가운 머리를 가진 그의 학문적 관심은 애초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리라 본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한정된 자본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해서 발생된 생산물에 의해서 나누어진다는 초딩들도 알아들을법한 지극히 상식 수준의 이야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런 유아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경제학자라고 명함을 내밀고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또한 맬서스의 인구론이 가장 크게 간과한 부분은 바로 부의 불균형의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작용하는 가장 큰 내재적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본서의 역자 해제에서도 잠간 언급되고 있는 인간 개인의 탐욕의 문제이다. 헨리 조지는 극심한 사회 양극화 현상에 대해서 인간 탐욕의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했다. 그렇다. 인간 본성의 타락에 기인한 탐욕스러움으로 남의 것을 더 빼앗아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인간의 원초적 이기심과 죄악된 욕망이 어쩌면 인류의 고질적인 부의 불균형을 가져 온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이고 인간 본성의 깊은 곳에 심겨진 내재적 원인을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있으랴? 그러나 헨리 조지는 그냥 주저 앉아 손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가진 지성과 이성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한 사회제도에 대해 과감하게 개혁의 메스를 가하고자 시도한 용기있는 실천적 도덕주의자였다.

땅을 선점한 지주들이 그 땅을 임대하여 농사를 짓는 노동자들에 대해 비싼 지대를 받아 챙기기에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턱없이 적은 임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빈곤의 악순환. 토지 이익을 통해 지주들은 계속적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가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빈곤이라는 나락으로 계속 내몰리는 이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탄생한 <진보와 빈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

예전에 초등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그들의 답변은 대동소이했다. 남자 아이들은 대통령, 과학자, 장군, 의사 등등...여자 아이들은 선생님, 간호사, 연예인 등등...그러나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부동의 1위가 무엇인줄 아는가? 바로 건물 임대업자라는 것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마냥 웃고만 있을 수 없는 이러한 신조어는 요즘의 천박한 세태를 여과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들이다. 부동산 불패신화,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부동산업은 결코 해가 지지 않는다는 이 웃픈 현실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이기에 가진 자들은 계속적인 부동산 투기를 통해 엄청난 금액의 시세차익을 거두어들이며 속칭 졸부의 반열에 오르는 반면 못배우고 가진 것 없는 사회 취약계층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가 벅찬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 속에서 그 가난을 자식들에게까지 고스란히 물려주는 빈곤의 대물림 현상이 벌어진다.

헨리 조지가 살던 당시 토지를 소유한 자들이 요구하는 지대의 버거움은 노동자들을 계속되는 가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등골빠지게 일해도 지주들에게 모든 것을 갖다 바치고 그들에게 돌아오는 임금은 그날 하루를 근근히 버틸 수 밖에 없는 푼돈 몇푼이었다. 이러한 불의한 제도로 인한 빈곤의 타파를 위해 헨리 조지는 토지의 공유화를 주장한다. 이미 오랜 시간 토지의 선점으로 인해 자신의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지주들(사회의 지도층과 상류층)의 땅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뺏어올 수도 없는 노릇일 뿐더러 설령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사회주의자들과 별반 다름없는 모습이기에 헨리 조지는 토지의 공유화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토지 가치세이다. 즉 토지의 소유는 개별 지주에게 그대로 주되 땅을 통해 얻게되는 불로소득인 막대한 양의 지대 수입을 개인 지주가 착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토지 가치세라는 명목으로 일괄 거두어들여 세입 수입을 늘리고, 그것을 사회의 절대 빈곤층에게 사회복지 차원에서 재분배하자는 주장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자기 입밖에 모르는 극도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회 기득권층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당시 아일랜드와 영국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는 것을 볼 때 그의 이론이 마냥 유토피아적 환상은 아님을 본다. 그러나 항상 사회 개혁적 주장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려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에 의해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의 사상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오래 전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예수원을 올라가면 길가의 큰 돌비석에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라는 글귀가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성경 레위기 25장 23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예수원의 설립자이신 故 대천덕 신부께서 생전에 항상 주장하셨던 그의 신앙과 삶의 철학이었다. 이것은 성경의 희년의 개념에서 파생되어진다. 50년에 한번씩 선포되어지는 희년을 통해 노예들이 자유를 얻고, 땅이 쉼을 얻는다는 희년의 정신은 땅이 일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적인 도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토지 공개념을 표방한다. 그렇다. 성경도 땅은 어느 누구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죄된 본성으로 인한 탐욕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인류의 모든 제도를 불의로 물들여 놓았기에 우리는 서평의 서두에서 언급한 끔찍하고 비참한 빈곤의 현장을 목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630여페이지의 제법 묵직한 분량의 정치경제학 저작 한권이 10여일간 내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인간 지성이 어쩜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 사회 불의와 부조리, 불균형에 대해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가난 속에 죽어가는 자들을 애써 외면한 채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받아 누리며 쳐먹는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던 이 탐욕과 야만의 시대에 헨리 조지와 같은 깨어있는 지성, 바른 양심과 굳센 용기를 가진 그야말로 마샬이 말한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경제학자의 보물과 같은 저작을 만나게 된 것은 근래들어 나의 독서 생활에 가장 큰 유익이다. 그의 주장과 이론, 사상은 사실 현실 정치와 경제에 쉽사리 접목되어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땅을 선점한 사람들과 그 땅을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사회 1%의 탐욕스러운 기득권층이 존재하는 한 헨리 조지의 사상과 이론은 그들에게는 한낱 힘없는 자들의 빈약한 투정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나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의 반열에 들 수 없기에 헨리 조지 그를 가리켜 재야의 경제학자라고 한다. 그러나 부의 불균형, 그로인한 가난한 자들의 아픔과 작은 신음에 귀기울이며 평생 그 가난을 퇴치하기 위해 전 삶을 불태웠던 헨리 조지에게는 기득권의 눈치나 살피며 경제학자로서 입바른 말을 해야할 때 하지 못한 기생충같은 비겁한 고전 경제학자들의 반열에 들지 않고 오히려 용기있고 깨끗한 영원한 재야의 경제학자로 남는 편이 분명 더 명예스러운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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