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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 산업 불황의 원인과, 빈부격차에 대한 탐구와 해결책 ㅣ 현대지성 클래식 26
헨리 조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5월
평점 :

오래 전 태국 방콕에 간적이 있다. 방콕 시내의 화려한 쇼핑센터를 보며 순간 한국 도심지에서 만나게 되는 여느 대형 쇼핑센터와 견주어도 결코 손색 없는 그 휘황찬란함과 규모를 통해 태국의 발전상을 실감했다. 이후 우리 일행은 그동안 살면서 거의 해본적 없는 매우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방콕 외곽지역에 있는 소위 슬럼가로 불리는 빈민촌 방문이었다. 빈민촌하면 떠올려지는 그 생각하기 싫은 그림들이 있지만 사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기에 내심 호기심 또한 발동한 것이 사실이다. 가이드를 따라서 빈민촌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개인적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이라 말하며 살아가는 그곳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며 나도 모르게 양미간이 찡그려지고, 자연스럽게 손으로 코를 가리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온 마을 천지가 쓰레기로 뒤덮여 있기에 악취는 말할 것도 없고, 곳곳에 오물과 오수가 넘쳐나는 말 그대로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주거 공간이 게딱지 마냥 따닥따닥 붙어서 군락을 형성한 곳의 모습은 차마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 보다는 미안한 말이지만 개, 돼지와 같은 짐승들이나 있을만한 그런 축사와 같은 느낌 그 자체였다.
1시간 남짓의 시간이 24시간처럼 길게 느껴진 곤혹스러움을 뒤로 한채 그곳을 나오며 내 머릿 속에서 계속적으로 떠나지 않았던 의문은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방콕 시내의 그 화려한 쇼핑센터와 고급 아파트들의 모습과 방금 내가 목격한 처참한 가난과 빈곤의 현장이 오버랩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극단적인 부와 빈곤의 차이는 무슨 이유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왜 어느 한편에는 자손대대에 걸쳐 평생토록 흥청망청 먹고 마셔도 결코 마르지 않고 샘솟는 화수분과 같은 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느 한편에는 하루 한끼도 먹지 못해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고, 굶주린 엄마품에 안겨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젖을 빠는 굶주린 아기들의 그 힘겨운 숨소리가 일상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만해도 짜증나고, 화가나는 물음에 대한 기가막힌 정답을 제시하는 감동적인 경제고전 한권을 만나니 그 책은 바로 오늘 서평으로 소개하는 19세기 미국 재야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다. 1839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어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헨리 조지가 그의 평생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본서는 그가 실제로 업무차 방문한 뉴욕 슬럼가 최악의 가난과 극심한 빈곤의 현장을 목격한 후 충격을 받아 집필을 결심하게 된 정치경제학분야의 고전이다. 본서에서 저자 헨리 조지는 극심한 가난과 부의 불균형의 원인을 찾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지성적 역량을 쏟아붇는다. 그러나 단지 부의 불균형과 가난과 빈곤의 원인만을 찾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제학적 관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관념과 정의에 대한 바른 태도에 대해서까지 그의 깊은 혜안을 나누기에 독자는 본서 한권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닥친 경제적 난관과 더불어 사회 정의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속 시원한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정치경제학 교수 '알프레드 마샬'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경제학도들에게 cool heads but warm hearts(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를 강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경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차가운 이성으로 당면한 현안과 경제적 난제들을 풀어가되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형편을 생각하고 살펴야지만 한다는 촌철살인과 같은 문장이 아닐 수 없다. 본서를 읽어가며 나는 헨리 조지야 말로 마샬이 말한 바로 그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경제학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본서를 통해 이야기하는 핵심은 극심한 빈부의 격차는 바로 소수의 가진 자들에 의해서 독점되는 토지(땅)의 사유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 조지의 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시대정신은 헨리 조지의 이러한 토지 사유화가 빈부 격차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도 그럴것이 어느 시대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의 기득권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기에 헨리 조지의 주장이 그들에게는 이름도 없는 무학의 경제학자가 주창한 사회주의 사상이나 유토피아적 공상에 불과한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책을 읽다보면 헨리 조지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비판한 한가지 이론을 만나게 된다.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부를 움켜 쥔 사람들과 하루 벌어먹기도 힘든 극심한 빈곤과 끝이보이지 않는 가난의 쳇바퀴 속에서 절망의 눈물로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존하는 부의 불균형의 이유를 인구 증가와 같은 자연현상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치부해버리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그것이다. 즉 인구가 많아지면 수요는 많아지고 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많은 일자리가 필요해진다. 그러나 노동 인력이 넘쳐나면 한정된 자본을 통해 늘어난 노동에 대한 임금을 나눠가져야 하기에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임금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근시안적 이론이다.
그렇기에 인구의 자연적 조절을 위해 전쟁, 기근, 가난, 전염병과 같은 자연적인 제약은 인구의 과도한 증가를 막아주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그의 이런 단세포적 생각은 마치 인류의 개체수를 인위적으로 줄여야지만 지구를 쾌적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미명하에 사악한 테러집단이 전염병이나 대규모 공격으로 다수의 인간들을 청소한다는 어느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인구 증가라는 자연적인 재해(?)를 허락한 창조주의 무능력을 간접적으로 비꼬는 신성모독적 이론이 아닐 수 없다. 하기는 맬서스 본인이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태생부터 금수저였기에 아마도 차가운 머리를 가진 그의 학문적 관심은 애초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리라 본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한정된 자본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해서 발생된 생산물에 의해서 나누어진다는 초딩들도 알아들을법한 지극히 상식 수준의 이야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런 유아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경제학자라고 명함을 내밀고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또한 맬서스의 인구론이 가장 크게 간과한 부분은 바로 부의 불균형의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작용하는 가장 큰 내재적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본서의 역자 해제에서도 잠간 언급되고 있는 인간 개인의 탐욕의 문제이다. 헨리 조지는 극심한 사회 양극화 현상에 대해서 인간 탐욕의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했다. 그렇다. 인간 본성의 타락에 기인한 탐욕스러움으로 남의 것을 더 빼앗아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인간의 원초적 이기심과 죄악된 욕망이 어쩌면 인류의 고질적인 부의 불균형을 가져 온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이고 인간 본성의 깊은 곳에 심겨진 내재적 원인을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있으랴? 그러나 헨리 조지는 그냥 주저 앉아 손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가진 지성과 이성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한 사회제도에 대해 과감하게 개혁의 메스를 가하고자 시도한 용기있는 실천적 도덕주의자였다.
땅을 선점한 지주들이 그 땅을 임대하여 농사를 짓는 노동자들에 대해 비싼 지대를 받아 챙기기에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턱없이 적은 임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빈곤의 악순환. 토지 이익을 통해 지주들은 계속적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가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빈곤이라는 나락으로 계속 내몰리는 이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탄생한 <진보와 빈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
예전에 초등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그들의 답변은 대동소이했다. 남자 아이들은 대통령, 과학자, 장군, 의사 등등...여자 아이들은 선생님, 간호사, 연예인 등등...그러나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부동의 1위가 무엇인줄 아는가? 바로 건물 임대업자라는 것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마냥 웃고만 있을 수 없는 이러한 신조어는 요즘의 천박한 세태를 여과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들이다. 부동산 불패신화,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부동산업은 결코 해가 지지 않는다는 이 웃픈 현실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이기에 가진 자들은 계속적인 부동산 투기를 통해 엄청난 금액의 시세차익을 거두어들이며 속칭 졸부의 반열에 오르는 반면 못배우고 가진 것 없는 사회 취약계층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가 벅찬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 속에서 그 가난을 자식들에게까지 고스란히 물려주는 빈곤의 대물림 현상이 벌어진다.
헨리 조지가 살던 당시 토지를 소유한 자들이 요구하는 지대의 버거움은 노동자들을 계속되는 가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등골빠지게 일해도 지주들에게 모든 것을 갖다 바치고 그들에게 돌아오는 임금은 그날 하루를 근근히 버틸 수 밖에 없는 푼돈 몇푼이었다. 이러한 불의한 제도로 인한 빈곤의 타파를 위해 헨리 조지는 토지의 공유화를 주장한다. 이미 오랜 시간 토지의 선점으로 인해 자신의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지주들(사회의 지도층과 상류층)의 땅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뺏어올 수도 없는 노릇일 뿐더러 설령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사회주의자들과 별반 다름없는 모습이기에 헨리 조지는 토지의 공유화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토지 가치세이다. 즉 토지의 소유는 개별 지주에게 그대로 주되 땅을 통해 얻게되는 불로소득인 막대한 양의 지대 수입을 개인 지주가 착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토지 가치세라는 명목으로 일괄 거두어들여 세입 수입을 늘리고, 그것을 사회의 절대 빈곤층에게 사회복지 차원에서 재분배하자는 주장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자기 입밖에 모르는 극도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회 기득권층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당시 아일랜드와 영국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는 것을 볼 때 그의 이론이 마냥 유토피아적 환상은 아님을 본다. 그러나 항상 사회 개혁적 주장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려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에 의해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의 사상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오래 전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예수원을 올라가면 길가의 큰 돌비석에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라는 글귀가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성경 레위기 25장 23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예수원의 설립자이신 故 대천덕 신부께서 생전에 항상 주장하셨던 그의 신앙과 삶의 철학이었다. 이것은 성경의 희년의 개념에서 파생되어진다. 50년에 한번씩 선포되어지는 희년을 통해 노예들이 자유를 얻고, 땅이 쉼을 얻는다는 희년의 정신은 땅이 일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적인 도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토지 공개념을 표방한다. 그렇다. 성경도 땅은 어느 누구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죄된 본성으로 인한 탐욕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인류의 모든 제도를 불의로 물들여 놓았기에 우리는 서평의 서두에서 언급한 끔찍하고 비참한 빈곤의 현장을 목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630여페이지의 제법 묵직한 분량의 정치경제학 저작 한권이 10여일간 내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인간 지성이 어쩜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 사회 불의와 부조리, 불균형에 대해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가난 속에 죽어가는 자들을 애써 외면한 채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받아 누리며 쳐먹는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던 이 탐욕과 야만의 시대에 헨리 조지와 같은 깨어있는 지성, 바른 양심과 굳센 용기를 가진 그야말로 마샬이 말한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경제학자의 보물과 같은 저작을 만나게 된 것은 근래들어 나의 독서 생활에 가장 큰 유익이다. 그의 주장과 이론, 사상은 사실 현실 정치와 경제에 쉽사리 접목되어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땅을 선점한 사람들과 그 땅을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사회 1%의 탐욕스러운 기득권층이 존재하는 한 헨리 조지의 사상과 이론은 그들에게는 한낱 힘없는 자들의 빈약한 투정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나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의 반열에 들 수 없기에 헨리 조지 그를 가리켜 재야의 경제학자라고 한다. 그러나 부의 불균형, 그로인한 가난한 자들의 아픔과 작은 신음에 귀기울이며 평생 그 가난을 퇴치하기 위해 전 삶을 불태웠던 헨리 조지에게는 기득권의 눈치나 살피며 경제학자로서 입바른 말을 해야할 때 하지 못한 기생충같은 비겁한 고전 경제학자들의 반열에 들지 않고 오히려 용기있고 깨끗한 영원한 재야의 경제학자로 남는 편이 분명 더 명예스러운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