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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가 알고 싶다 - 다시 배우는 십일조, 축복의 통로인가 다른 복음인가 알고 싶다
윤상원 지음 / 넥서스CROSS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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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서는 한국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잘못된 십일조 헌금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며 동시에 바른 헌금, 십입조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현재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로서 풍부한 임상 목회 현장의 경험과 학자의 지성적 날카로움을 겸비하여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 잘못 가르쳐지고 주장되어 왔던 십일조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제공한다.

본서에서는 우선 십일조의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개념과 내용을 살피면서 십일조의 시작과 기능, 의미에 대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적인 이해를 갖도록 돕는다. 저자의 탁월한 성경 해석 능력은 그동안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이 한국 교회 안에서 얼마나 잘못 가르쳐졌고, 그것으로 인해서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의 정죄와 올무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는지를 고발한다.

십일조 엄수주의로 대변되는 십일조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목을 메는 사람들의 주장의 허구성과 맹점을 놓치지 않고 성경적 신학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함과 동시에 저자의 날카롭고 지성적인 혜안으로 제시되고 증명되어지는 십일조의 올바른 개념과 가르침은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게 만든다. 동시에 몇년 묵은 체증이 시원스럽게 쓸려내려가는 듯한 신앙적 청량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짜릿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껏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집에서 키우는 짐승처럼 아무것도 모른체 속고, 순종하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에 대한 울분을 가까스로 억누르게 된다.

그렇지만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독자는 저자의 매우 균형감있는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십일조를 무조건 수입의 10%를 떼서 드려야 한다는 십일조 엄수주의와 십일조는 구약시대 모세 율법에 속한 것으로서 예수님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옛 율법의 폐지와 함께 신약 시대 교회는 지킬 필요가 없다는 십일조 폐지론 양쪽에 대해 저자가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세의 율법으로 시작되는 구약의 십일조가 가지는 개념과 기능,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신약 시대 헌금과의 관계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가지는가에 대한 명쾌한 해석은 다시 한 번 저자가 가지는 구약과 신약을 넘나드는 탁월한 신학적, 성경적 식견을 인정하게 만든다. 또한 더불어 한국 교회 십일조 엄수주의자들의 단골 성경 구절인 말라기 3장을 비롯한 여러 구절들에 대한 저자의 반박은 재반론을 불허할 정도로 정교하다.

십일조를 잘 바쳐야 물질 축복받는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에 자신의 고 3아들 학원비까지 갖다 바쳐야하는 애타는 심정의 어느 가난한 성도의 눈물의 고백과 더불어 십일조는 빚을 내서라도 드려야 한다는 얼토당토한 가르침들이 교회 강단에서 버젓이 판을 친다. 이러한 제 2의 중세 암흑시대 가운데서 본서와 같은 한줄기 진리의 빛을 비춰주는 작은 책 한권이 홍수 가운데 도리어 마실 물이 없는 때에 시원한 생수와 같은 역할을 해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반갑다.

십일조의 축복은 언약의 축복이며 신약 시대 교회의 헌금은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신약 시대 교회들은 바르고 진정한 참된 십일조를 통해서 탐욕의 시대 정신이 지배하는 이 땅 가운데 베풀고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 현시를 실현하고 관통시켜야 한다는 가르침! 이것이야 말로 헌금과 십일조에 대한 참된 복음 아닌가?

본서와 같이 귀한 책을 써 준 저자의 용기와 헌신에 깊이 감사하는 바이다. 너무나 예민하기에 다룰 수 있는 학문적 능력과 지식이 있지만 결코 건드리고 싶지 않을 뿐더러 쉽사리 건드릴 수도 없는 주제를 이렇게 알기 쉽게 그리고 시원하고 명쾌하게 기술해줌으로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른 헌금, 십일조 생활을 발견케 해준 점은 조국 교회에 저자가 선사하는 큰 선물이다.

한국 교회 안에 십일조의 참된 정신은 나의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라는 올곧은 신앙 고백으로 표출되어야 하며 어떻게 드릴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의 관점의 전환으로 증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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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알고 싶다 - 다시 읽는 요셉,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 알고 싶다
노진준 지음 / 넥서스CROSS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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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린 시절부터 교회 학교에서 가장 많이 들어왔던 설교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와 더불어 단연 요셉의 이야기 일 것이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지내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후 왕의 꿈을 해몽하고, 급기야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다는 그야말로 인생 역전, 성경적 대박 사건을 이야기하기에 안성맞춤인 이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야말로 비단 교회 학교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에 걸쳐서 복과 형통, 성공을 설교하기에 가장 좋은 재료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본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 잘 믿으면 요셉과 같이 축복과 형통, 입신양명의 길이 열린다는 설교의 단골 주제로 사용되었던 요셉의 이야기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구한다. 미국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저자 노진준 목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요셉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우리가 사물이든 사건이든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단편적인 사고의 구조, 즉 평면적인 사고와 세계관의 렌즈를 통한 바라봄을 선택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관점의 선택이 아니라 한국의 주입식 교육 상황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평면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는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그러한 교육 상황을 차치하고서라도 저자는 그동안 교회가 2차원적인 평면적 사고와 관점으로 요셉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그것을 우리의 신앙 생활에 끼워맞추다보니 어느새 요셉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적 성공 신화의 가장 좋은 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평면적 사고의 틀을 깨고 우리가 추구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관점을 제시하는 데 그것은 바로 3차원적인 입체적 사고와 관점으로의 전환임을 말한다.

요셉의 꿈, 형통, 유혹, 출세 등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요셉의 인생 속 키워드가 의미하는 진정한 의미는 오롯이 성공의 방향을 가르킨다. 요셉 이야기가 말해주는 진정한 복의 개념은 하나님 잘 믿어 재정의 축복받아 은행 잔고가 늘어나고, 넓은 평수의 아파트와 좋은 승용차, 내 자식 좋은 대학가며, 사회에서 높은 자리 차지하고, 명예와 권력을 한손에 넣는 작금의 조국 교회를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도록 만든 그런 저가, 저질의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간혹 고난과 핍박이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한다는 그 성공지상주의, 기복의 개념은 본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저자가 본서를 통해 말하는 요셉의 삶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진정한 복의 개념은 극한 고난과 핍박, 극심한 가난 속에서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어 바닥을 드러내는 쌀통을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상황 속에서도 오직 진정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원하심을 자신의 삶의 지평 속에 풀어내고 증명하기 위해 말라비틀어진 유모의 마른 젖을 빠는 젖먹이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구하는 삶이다.

요셉의 삶을 평면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성공 신화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에서 해석되어지고 선포되어지는 대다수 요셉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2차원적 관점에 머물러 있는 현실은 말씀을 받아 먹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크나큰 슬픔이며 땅을 치고 통탄해야하는 일이다.

본서가 제시하는 결코 성경을 벗어나지 않는 3차원의 입체적 관점을 통해 고난으로 점철된 그 요셉의 삶의 이면에 드리워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고통과 신음 속에 찾는 하나님의 얼굴, 진정한 형통과 복의 개념을 발견하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본서를 기꺼운 마음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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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 이야기 - 르네상스의 주역 현대지성 클래식 14
G.F. 영 지음, 이길상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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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 들어서 만난 책 중에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저작 한권을 만났다. 독자로 하여금 읽으면서 다음 펼쳐질 줄거리를 기대하게 만드는 책만이 가지는 그 원초적 마력을 지닌 책을 정말 오랫만에 만난다. 본서는 우리에게 르네상스로 알려져 있는 15세기 유럽의 문화적 부흥의 숨은 원동력과 토대를 마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역사적 고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는데 그들은 다름아닌 15세기 말 이탈리아 피렌체의 중산층 메디치가 사람들이다. 

중세 유럽, 특별히 이탈리아의 상황은 여러 도시국가들이 자체적인 정치 체제를 가지고 그들만의 정부로 나라를 운영하던 시기였으며 이때 메디치가는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의 중산층 가문으로 출발하지만 은행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토대로 피렌체에서 정치적 막후 실세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간다. 메디치 가문을 통한 문예부흥은 보티첼리, 도나텔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위대한 예술가들을 발굴해 내었고, 그들의 손을 통한 셀 수 없는 예술작품들을 탄생시켰다. 또한 수 많은 시인, 학자들과 같은 지성인들을 지원했고, 그들의 연구를 후원했다. 이로써 인문주의의 기틀은 확립되기 시작했으며 중소 상공인의 등장과 그에 따른 중류층의 성장,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고전 문헌의 전파와 발굴, 정치의식의 변화, 민족주의의 대두와 같은 시대 조류의 크고 작은 물길을 내는데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서는 메디치가를 탄생시킨 조반니 디 비치를 시작으로 장자 코시모와 차자인 로렌초 계열을 1부와 2부로 크게 나누어 이야기한다. 특별히 장자 코시모와 그의 아들 피에로 일 고토소, 위대한 자 로렌초까지의 이야기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어떠한 지위와 역할을 감당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후원한 예술가들과 학문적 업적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독자들로 하여금 메디치가의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비단 이들에 대한 관심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르네상스라는 인류 역사와 문명 발전의 한축을 담당한 거대한 사조의 기반을 마련하도록 자양분을 공급한 부유한 가문 정도로의 관심으로 그칠 수 없음은 이 가문을 이끌었던 그들의 정치신념과 시대를 읽는 눈이 가진 독특함 때문일 것이다.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계몽과는 거리가 먼 중세의 무지와 지적 암흑 가운데 있었던 이 야만의 시대 속에서 무력이 아닌 단지 본인들의 허영심 없는 겸손과 고결한 인품, 그에 따라 주어진 인기와 호감으로서만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을 따름이다. 어쩌면 저자가 일방적으로 메디치 가문의 평가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편파적 입장으로 본서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될 정도로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메디치 가문 사람들의 피렌체에서의 위치와 역할은 가히 놀랍기만 하다. 더불어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는 정적들의 수차례에 걸친 공격을 견뎌내며 급기야는 그 정적까지도 끌어 안을 수 있었던 그들의 관대함은 자신들이 벌어들인 수 많은 유형적 자산을 인류의 찬란한 지적 자산으로 환전시킬 수 있었던 모습을 통해서 동일하게 입증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본서를 읽는동안 '와! 이 책 대박! 기가 막히구만!" 이라는 마치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의 외침을 단말마처럼 시도때도 없이 내밷는 본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특별히 메디치 가문에서 배출한 최초의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조반니)가 등장하는 부분은 눈을 의심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레오 10세는 1513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다. 그때가 언제인가? 바로 지금 한국교회가 이야기하고 있는 1517년 종교개혁을 불과 4년 앞둔 시점이었으며 이 레오 10세는 다름아닌 종교개혁이라는 태풍의 눈 한가운데 서 있었던 교황이었다.

즉, 서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던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람이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위대한 자 로렌초의 아들 교황 레오 10세(조반니)였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은 레오 10세 이전부터 로마 카톨릭의 부패한 교권주의로 인해 언젠가는 터질 수 밖에 없는 시한폭탄과 같은 필연성을 가진 이슈였지만 그 시작의 심지에 불을 당긴 사람이 바로 면죄부 판매를 본격화한 레오 10세였다는 점은 결코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성공되어질 수 있도록 뒷받침 되어 준 당시의 사상적 배경과 시대정신이 다름아닌 르네상스 인문주의였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일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문학과 학문, 예술의 부흥기를 가져옴으로서 인문주의 시대를 열었던 메디치 가문은 자신들이 배출한 교황 레오 10세로 인해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단초를 제공했고, 그 종교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상적 배경과 토대가 바로 그들이 엄청난 재산을 투자하며 애써 발굴해내었던 고대 문헌,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수 많은 도서의 보급과 지식 전파와 같은 인문주의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필자는 온 몸에 비늘이 돋는 듯한 전율을 경험했다. 역사적 우연성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는 역사는 반복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과관계로 영향을 미친다고도 볼 수 있지만 필자는 한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메디치라는 중세 피렌체의 평범한 가문을 준비하여 사용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세미한 빛줄기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낀다.

 자인 G.F.영은 시종 메디치가문이 인류역사에 남긴 훌륭하고 유수한 전통과 업적을 밝게 조명하고 변론한다. 나는 가능하면 중립적 배심원의 입장에서 책을 읽어내려가기 위해 노력했고, 분명 그들에 대한 평가는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어느 누구나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벌거벗은 전라의 모습으로 공과를 판단받게 되어 있다. 그것은 메디치 가문 또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중세 암흑의 무지로 점철된 짐승같은 시대에 350년이라는 시간동안 인류 지성의 고양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예술과 학문의 제단 위 타오르는 불꽃 앞에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그들의 몸이 바스라지는 헌신과 열정은 분명 21세기 첨단 문화의 시대를 향유하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감사와 부인할 수 없는 빚진 자의 겸허함을 요구한다.

 

p.s. 책의 내용 가운데 로마 교황의 수위권 주장이 허구임을 밝힌 기독교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부터 추방당한 대공위 시대에 잠시 피렌체를 다스렸던 중세의 세례 요한 '기보나 사보나롤라'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것은 본서를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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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 의도된 선택인가, 어리석은 판단인가! 선택이 만들어낸 어리석음의 역사
제임스 F. 웰스 지음, 박수철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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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가운데서 어리석음이 미친 영향과 결과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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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 500년 전 루터는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남겼는가
박흥식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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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역사의 한 점을 기억하며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종교개혁의 선구자라 불리는 마르틴 루터의 생애와 사상, 그의 과업과 오류에 대해 그간 개신교 교회사가들의 관점에서 집필되었던 여느 저작들과는 달리 일반 대학의 현직 서양사학자의 관점으로 쓰여진 책이다.


총 3부로 구성된 본서는 종교개혁이 어떠한 원인으로 시작되었는가와 루터라는 인물이 가진 개혁사상, 그리고 그의 종교개혁 가운데 있었던 위기와 오점들에 대해서 개신교 역사신학의 관점을 최대한 배제한 체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저작이다. 단편적인 예는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면벌부(면죄부)판매에 대한 반발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다는 기존 개신교 역사신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95개조 반박문의 게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역사적 증거들을 제시하는 등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내용과는 사뭇 다른 여러가지 상이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관례, 오랜 관습으로 굳어진 삶의 습관과 태도, 거기에 정통이라는 당위성을 얹게 되면 그것은 그 자체에 부패와 폐단을 통해 자신의 생살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병적 증상이 나타나도 자각 할 수 없고, 설령 증상을 자각한다 할지라도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지 오래기에 결코 자정과 자생의 기회는 요원할 뿐이다. 그것은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한 이후 사회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특별히 종교라는 영역은 더욱 더 두드러진다.


고대 교부들과 로마제국, 기독교 박해, 그리고 이단으로 대변되는 고대 교회의 시간을 지나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묻어둔 진리로 표명되는 부패와 폐단으로 점철된 중세시대의 암흑기 속에서 한줄기 진리의 여명을 위한 몸부림은 마르틴 루터라는 걸출한 인물을 통해서 표출되었지만 본서를 통해 독자는 종교개혁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의 결과물이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종교개혁 바로 이전 유럽 사회에 인문주의 열풍으로 인한 사상적 토대가 마련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한 도시의 발달과 지식층의 유입, 상공인들의 등장, 중류층의 성장과 민족주의의 대두와 같은 시대적 변화의 움이 싹트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바싹 마른 심지에 불씨 하나만을 당겨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과 같은 정황이었다고 표현하면 이해가 더 쉽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르틴 루터라는 탁월하게 준비된 신학자에 의해서 주도된 종교개혁의 개혁사상은 시대와 대중의 억눌렸던 니드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본서를 통해 저자는 루터가 이룬 과업의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독자들의 시선을 인도한다. 그것은 본서의 제목과 같이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완으로 귀결된 역사의 한막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슈로서 그의 개혁은 사회 문제에 대한 참여의 결핍이라는 약점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잔혹한 처분과 대처, 반유대 정서의 노골적 표출과 같은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부합할 수 없었던 그만의 개혁은 가시적인 성과들을 이루어내었지만 그의 개혁이 다른 이들과 함께 갈 수 없었던 자신만의 리그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저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국 교회를 향해서 질문한다. 개혁을 외쳤던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비대해진 몸집으로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 버거운 커질대로 커져 버린 한국 개신교의 양태들을 뒤돌아보게 된다. 사회의 약자들을 보듬으며 그들을 끌어안고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한국의 교회는 과연 존재하는가?


본서의 저자는 종교적 관점이 아닌 사회 통합적 관점에서 루터라는 인물을 조명한다. 최대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은 다양한 문헌의 인용과 30여페이지에 달하는 참고미주를 통해서 드러난다. 240여페이지의 가독성 좋은 책 한권을 집어들고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동시에 또 한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동안 나의 선지식을 통한 루터에 대한 평가와 시각을 저만치 묻어두고 다가가려 노력했다.

 

책을 읽어내려가며 내 머릿속에서 저자에 대한 수없이 많은 반론과 루터를 변호하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지만 저자가 말하려는 요지를 파악했을 때 나는 나의 그 욕구조차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넉넉함을 되찾는다. 시대의 아픔을 읽지 못하는 개혁,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개혁은 미완의 개혁이라는 사실, 이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한국 교회에 던져진 진중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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