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 서양철학사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부터 니체와 러셀까지
프랭크 틸리 지음, 김기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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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N번방 사건 공범인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되었다. 아직 교복이 어울릴만한 애띤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한 18세 청소년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자들의 질문 공세 속에서 도대체 지금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사태의 심각성이나마 제대로 파악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어린이들을 포함한 다수 여성의 육체와 정신을 유린한 이 짐승같은 존재들의 민낯을 보며 인간 존재와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상존하는 인간성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되는 아침이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이런 끔찍한 괴물들로 만들었을까?

이러한 질문 앞에서 활자 크기 10포인트 800여페이지의 분량만으로도 독자들의 기를 죽이는 어마무시한 철학서 한권을 만난다. 철학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교의 철학교수를 지낸 '프랭크 틸리' 교수에 의해 1914년 초판 발행된 <틸리 서양철학사>이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일단 고대 동양 철학과 사상은 사유 체계가 명확하게 성립되지 않았기에 배제하고, 개인과 국가, 사회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부터 근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철학과 사상의 흐름을 각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나열했음을 밝힌다.

인류의 태동 이후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우주와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의심 속에서 그것의 기원과 구조, 기능을 탐구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유의 작업을 해나갔다. 저자는 한 철학의 역사적 기원과 개인적 동기, 하나의 철학 체계는 한 개별 지성의 창조적 사유의 산물이며 그 창시자의 인격을 반영한다라고 말했다. 즉 다른 이들보다 좀 더 깊은 생각과 탐구의 정신을 지닌 그 시대의 지성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물음 앞에서 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으며 그것에는 자연스럽게 나름의 답을 발견한 하나의 철학 체계를 형성한 지성인들의 인격이 고스란히 반영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책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철학이라는 것이 오직 자신만의 세대가 가진 물음과 그에 대한 답변으로서 종결되는 한계성에 그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창의적 철학자는 동시대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새로운 개념들과 더불어 과거 철학사로부터 이끌어 낸 전통적 개념과 통찰을 살찌워야 한다는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진정한 철학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문제와 그것에 대한 정답만이 최고라는 오만을 견제할 때 더욱 더 풍요로운 사유 체계의 완성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방금 위의 이야기와 같이 각 시대와 세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 사상이 독단적인 움직임 속에서 역사적 단절성을 갖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들의 앞 시대를 살다간 선배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유에 대한 직간접적인 연관성을 추구했음을 너무나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자는 유독 하나의 시대 정신만이 한권의 책을 관통한다고 볼 수는 없고 각 시대마다의 철학 사상들이 마치 유아용 토마스 기차 장난감과 같이 어느 정도의 연결성을 이루며 진행됨을 발견할 수 있다.

총 22장으로 구성된 본서는 1장 자연철학부터 22장 실용주의 실증주의 분석철학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 사상을 앞뒤의 사상체계들과의 시대적 연관성을 무시하지 않은 채 매우 깊이 있게 서술하고 있다. 사실 나와 같은 철학의 문외한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범주에서부터 철학의 기원을 생각하길 좋아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그 난해함을 굳이 이해하기 위해서 통과해야만 하는 그 지난한 정신적 사유의 과정들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중세철학이나 근대 계몽주의 철학과 같은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철학 사조들과는 달리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에 관한 그들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서 좀 더 심도있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귀한 이득이었다.

밀레토스 학파 또는 이오니아의 자연 과학자들로 불리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이 세상의 실체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들 사유의 소재로 삼았다. 초기 고대 철학자들은 대부분 과학자들이었다. 만물의 질료이며 원초적 재료는 물이기에 만물은 물로 시작해서 물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던 탈레스나 생물의 기원을 밝히며 사람은 원래 물고기였음을 주장하며 마치 이후 다윈 진화론의 고전판 버전과 같은 사유를 설파하기도 한 아낙시만드로스 그리고 사물들의 제일 원리이며 근본실체는 공기, 증기, 안개이며 공기는 생명의 원리이자 우주의 원리임을 주장한 아낙시메네스까지 어찌보면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모르고 살아도 하등 문제 없고, 지장없는 마치 개똥 철학같은 이야기들을 매우 심도있게 나열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철학자들이 관심있게 궁구한 우주와 세계의 실체의 문제는 당장 우리네 삶에 큰 연관성이 없다할 수 있지만 인간 존재의 문제와 연결될 때 그렇게 만만하고 쉽게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는 다소 심각한 이슈가 될 여지가 충분한 철학적 주제들을 끄집어온다.

예를 들어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의 문제는 무엇이며 그 세계와 우주를 구성하는 자연과 인간은 무엇이며 그것이 인간과 맺는 관계에 대한 모든 사유의 물음을 차단해버리고 당장의 배고픔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의식주의 문제에만 매달린다면 인간은 한낱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물고기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주의 기원도 모르고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조차 모르며 인간 존재의 기원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의 결과는 지금 현시대가 맞닥뜨린 각종 윤리적 문제들과 결코 관련없지 않다. 전쟁, 폭력, 살인, 강간, 낙태, 아동 성매매, 인종청소, 유아살해, 장기밀매, 안락사, 동성애, 식인풍습, 유전자 조작, 대리모 출산 등 현대 우리 사회가 겪는 수 많은 난제들에 대해 그것이 오직 독립적으로 발생한 시대의 아픔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무지한 답변은 없다.

자연철학으로부터 시작된 우주의 생성과 기원의 문제는 인간과 신 존재의 증명을 요구하며 종교와 중세철학의 시대로 바통을 넘겼다. 이후 신 존재의 증명을 둘러 싼 끊임없는 종교적 논쟁은 다시 인간성 회복이라는 지성과 이성의 시대인 계몽주의 근대 철학에 그 철학적 사유의 주도권을 넘긴다. 종교에 대한 이성의 탁월함을 맹신했던 인간은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저지른 그 끔찍한 전쟁의 참혹성을 통해 다시금 인간 이성의 무한 맹신이라는 화려한 망상을 떨쳐버리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있은 후 인간 정신과 철학의 무대는 전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상대성의 인정과 다원화라는 새시대를 맞이하기에 이른다. 이제 인간은 신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인간 지성과 이성에 대한 맹신도 거부한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새로운 인간 문명의 총아로서 떠오른 현대인들에게는 편리함과 그로 인한 즐거움, 효율성이라는 최고의 철학적 주제가 대세다. 그렇기에 효율성의 측면에서 장기매매가 이루어지며 돈을 벌기 위해서 불법 낙태를 시술하고 안락사를 시행하는 의료인들이 존재하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라도 불멸의 삶을 꿈꾸기에 이르렀다.

본서는 단순히 서양철학사의 시대적이며 연대기적인 나열로서 이루어진 책이 아니다. 고대 자연주의 철학의 시대부터 근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대표적 철학사상과 철학가들이 그들이 살던 당시의 사회, 정치, 문화적 정황 속에서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에 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그렇기에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다소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은 잠시 이해의 과정을 스킵하고 넘어간다해도 이후의 논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크나큰 어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특별히 틸리 교수가 철학적 논의를 심술궂게 비꼬아서 표현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문체의 명확함과 명료함으로 인해 다른 책들보다는 표현에 있어 매끄럽게 다가오는 철학서이다.

10여일간 벽돌과 같은 책 한권에 파묻혀서 사고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댔다. 영원한 이국의 언어와 같은 철학. 잠간 농담과 같이 표현했지만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 속에서 철학을 모른다고 실제로 밥 벌어 먹고 사는데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는 관념적 학문으로서의 철학. 그러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배부르고 등 따시면 된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그 시대 어르신들의 시대적 유물로서 잠시 밀어놓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좀 더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자연 철학자들과 같이 거창하게 우주와 세계를 논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나와 내 이웃과의 관계라는 협의적 의미에서 인간 실존의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지금과 같은 시대만큼 필요한 때가 또 있을까싶다. 자기가 왜 태어났고 본인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며 나를 둘러싼 내 이웃들의 존재와 그들 하나하나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멈췄을 때 리뷰의 서두에서 이야기한 N번방의 괴물들이 탄생한다. 완연해가는 봄 기운 속에 이번 시즌에는 우리 모두 가벼운 책들을 좀 내려놓고 머리에 쥐가 날 수도 있는 고생스러움을 선택함으로서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물고기가 아님을 증명해보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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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페미니즘
웨인 A. 그루뎀 지음, 조계광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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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TV 광고 카피 중에 "모든 이들이 YES! 라고 말할 때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오늘 리뷰하게 되는 책이 바로 이 광고 카피와 같은 책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고백하는 전통적 개신교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삶의 최종적인 권위는 바로 성경이다. 성경만이 오직 우리 삶의 유일한 권위이며 행동과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성경의 권위는 결코 변개하거나 훼손할 수 없으며 이러한 성경의 순수성과 무오성을 수호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수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본서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바로 이와 같이 모든 개신교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받아들여지는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힌 탁월한 저작이다.

이 책의 저자 '웨인 그루뎀' 박사는 복음주의 목회권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저명한 성경신학자이자 조직신학자이다. 그런 그의 2006년 발간된 너무나 귀한 책이 이번에 CH북스를 통해 번역되어 한국 교회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고 기쁜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의 제목인 복음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대다수 신자된 독자들에게 매우 낯설다. 현대사회에서 페미니즘이라는 어휘가 갖는 느낌이나 분위기가 사실 썩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에 책의 제목은 더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논쟁의 주된 핵심은 바로 20세기에 들어 개신교내에서 첨예한 신학적 대립의 구도를 보이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교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성 목회자 안수에 관한 문제가 논의의 중심이다. 그리고 책의 제목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바로 20세기 초중반부터 거세어진 신학적 자유주의(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인하는 사상체계)의 영향 아래 복음주의 교단 안에서 벌어지는 여성 목회자 안수와 지도자적 위치에 대한 허용을 인정하려고 하는 시도들에 대한 신조어로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인 웨인 그루뎀 교수는 이러한 복음주의 교단 내에서 벌어지는 복음주의 페미니즘이 왜 성경적으로 잘못되었고 그것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배교적 사상인지에 대해 성경과 신학, 전통과 역사적인 모든 분야의 자료와 고증을 통해 입증하고, 경고하기 위해서 이 책을 집필했다.

책은 크게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여성의 성직 안수에 대한 승인과 자유주의의 역사적 연관성,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거나 부인하는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다양한 견해들, 논거가 희박하거나 거짓된 주장에 근거한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견해들,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그런데 우선 독자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2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평등주의와 상호보완주의이다. 평등주의는 말 그대로 성경은 교회와 가정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위치와 지위, 사역의 역할 등에 대해서 구분을 두지 않는다라는 주장으로서 다름아닌 복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주된 사상이다. 반면 상호보완주의는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가치를 지니지만 교회와 가정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위치와 지위를 가지며 사역에 있어서도 역할의 차이와 구분이 있음을 말하는 전통적인 복음적 개혁주의의 주장이다. 이러한 일련의 기본적인 용어를 이해하고 책을 읽어내려가다보면 각 진영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전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상황 속에서 절대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성과 관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대조류의 영향은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시도된 여성 성직 안수는 이후 복음주의 교단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남여의 성경적 동등성을 주장하는 동등주의로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 복음주의 진영의 급진적인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급기야는 미국 내 적지 않은 복음주의 교단과 교회들이 여성 성직 안수를 승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저자는 책을 통해서 여성 성직 안수의 문제가 분명 하나님께서 성경의 말씀을 통해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훼손하면서까지 강행하는 복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행보에 대해 큰 우려와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저자는 책을 통해 평등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유주의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평등주의자들이 구사하는 논리가 성경의 권위를 거듭 훼손하며 교회를 점차 신학적 자유주의로 이끄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임을 강조한다.

저자는 2부와 3부를 통해서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부인하는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견해들과 논거가 희박하거나 억측에 가까운 그들의 주장을 제시하며 탁월한 성경적 식견과 냉철한 신학적 통찰력으로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함으로서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오류를 여과없이 들춰내고 고발한다. 특별히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는 교회 내 여성들의 위치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가 가장 잘 드러난 성경 말씀이다. 그렇기에 이 성경의 내용은 복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많이 변개하고 자의적 해석으로 훼손시키는 성경 말씀 중 하나이기에 저자는 매우 공들여서 그들의 반론에 대해 날카롭고 예리한 역반론을 펼치며 그들의 거센 공격을 방어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부를 통해서는 그렇다면 이제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가고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저자는 교회 내 여성 안수와 지도자적 위치를 승인하는 문제는 결국 교회를 신학적 자유주의로 이끄는 지름길임을 밝힌다. 왜냐하면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단과 교회들은 모두 여성 목사 안수 허용과 교단내 지도자 위치의 승인, 그리고 나아가서는 동성애 인정과 동성애자 목사 안수의 문제까지 승인한 상태에 와 있기에 그들의 전례를 고스란히 답습해가는 복음주의 페미니즘을 따르는 그들의 교단과 교회가 신학적 자유주의로 기우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결론부에서 결국 "궁극적으로는 성경이다!" 라는 의미심장한 한마디의 말을 남긴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무이한 당신의 말씀이며 그분의 말씀이 일점일획의 거짓이나 오류가 없는 무오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믿는 신자라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이 책을 통해서 분별해보기를 바란다는 바램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책을 덮으며 몇가지 상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우선 책을 읽는내내 저자인 웨인 그루뎀 교수의 그 신앙적 절개와 믿음 그리고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고 곡해하여 어떻게든 가정과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여성 성직 안수와 지도자적 위치를 동등하게 차지하려고하는 수 많은 복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거센 도전과 반론 앞에서 그가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반면 상호보완주의를 지지하는 전통적 개혁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왜이리 작을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웨인 그루뎀이 밀려오는 좌경화된 사상의 물결에 맞서 성경의 절대성과 유일성, 무오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정말 몸이 바스라지는 지성적 헌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진중한 부르심 앞에 순종하여 연구실에 앉아 몰려오는 반대와 저항의 압력 속에서 본서를 집필해갔을 저자의 뒷모습 속에서 교황주의자들을 비롯한 수 많은 대적자들에 둘러싸여 죽음의 위협 앞에서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전 삶을 불태운 하나님의 사람 존 칼빈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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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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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멤버 존 레논의 암살범이 가지고 있었다는 책으로도 너무나 유명한 책 <호밀밭의 파수꾼>은 1951년 미국의 작가 'J.D. 샐린저'에 의해서 쓰여진 소설이다. 16세 한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거짓과 허위, 위선으로 가득찬 세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판이 실린 일종의 성장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 사회와 인간군상에 대한 노골적 반항과 비아냥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순과 가면 뒤 숨겨진 사람들의 폐부를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데 있어서 본서는 지금까지도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위대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크리스마스를 몇일 앞두고 영어과목을 제외한 전과목 낙제라는 마치 학교에 대한 반항적 기질의 발로와 같은 형편없는 결과로 인해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는다. 이후 기숙사를 나와 3일간 뉴욕 시내를 방황하며 자신이 만나고 격게 된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의 형식으로 풀어놓는다. 특별히 본서의 특징 중 하나는 저속한 비속어와 은어 심지어는 걸죽한 욕설까지 여과없이 기록됨으로서 마치 독자가 주인공 콜필드와 함께 옆에서 그와 동행하는 듯한 현장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문제투성이의 소위 하자있는 인간들이다. 그의 기숙사 룸메이트인 스트라드레이터와 애클리와 같은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한때 관심 가졌던 여자 친구 샐리, 뉴욕 시내를 방황하며 만난 택시 기사들, 자신을 속이고 돈을 훔쳐간 호텔의 벨보이이며 동시에 포주인 모리스 그리고 창녀 서니 등 콜필드를 둘러싼 인물들의 대다수는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인간군상의 대표적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반대로 콜필드로 하여금 그래도 세상에는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함을 알게함으로서 이후 소설의 결말에서 그가 다시한번 자신의 삶에 대해 소망을 갖고 일어날 힘의 원동력이 되어 준 인물들 또한 등장한다. 자신이 믿고사랑하는 여동생 피비와 뉴욕 거리를 방황하다가 만난 두명의 수녀들 그리고 약간의 오해로 서먹해진 자신의 옛 스승 엔톨리니 선생 등이 그들이다.

콜필드가 바라보는 세상은 대체적으로 어둡다. 그리고 비관적이다. 16세 사춘기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정직함과 진실함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뒷골목 쓰레기장과 같다. 저자인 샐린저는 바로 이와 같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마치 중2병 걸린 것 같은 콜필드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사회의 모순과 인간들의 위선 가득한 참모습을 마음껏 비꼬고 희화화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콜필드가 퇴학을 당한 학교라는 공간은 콜필드에게 있어서는 모범적인 학생은 이렇게 공부해야하고 이러이러한 바른 행실을 가져야 한다라고 강요하는 또 하나의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의 온상이다. 더불어 추운 겨울 3일 동안 뉴욕 시내를 배회하며 만나게 된 사람들 또한 이러한 사회가 낳은 병적 부산물일 수도 있다는 콜필드만의 정의를 가능케 만든다.

개인적으로 본서를 아주 오래 전 완독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책이 주는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만큼 당시 나의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제한적이고 미숙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좀 더 나이를 먹고 책을 재독하며 느끼는 것은 그래도 이제는 저자 샐린저가 콜필드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말하고자하는 진의를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이 마지막 책의 뚜껑을 덮으며 나의 마음을 훈훈하게 채운다. "어차피 사는건 누구나 다 똑같어! 너무 유별나게 굴지마!"라고 말하는 사회의 목소리가 우리 모두를 획일성의 프레임 안에 가둔다. 그리고 대다수의 범인들은 그러한 사회가 전달하는 무언의 압력 속에 굴복하며 그 틀 안에 자신을 쑤셔넣는데에 열심이다. 샐린저는 어쩌면 당시 미국 사회가 요구하는 그 전통적인 관습과 기성 세대가 말하는 무형의 윤리적 기준에 대한 반발을 주인공 콜필드를 통해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래 전 감명깊게 본 영화 한편이 있는데 다름아닌 '구스 반 산트' 감독의 <파인딩 포레스터>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자말' 이라는 빈민가의 흑인 소년은 우연한 기회에 동네에서 당대 전설적인 작가로 알려졌지만 첫 작품 이후 자취를 감추고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은둔하고 있던 '윌리엄 포레스터'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자말의 불우한 배경으로 인해 그가 쓴 글마저도 우숩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포레스터는 자말의 글쓰기 개인 선생이 되어줌으로서 자말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하며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 포레스터와 자말은 스승과 제자의 우정을 키워간다. 이 영화는 개봉 후 영화에 등장하는 천재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가 바로 본서의 저자인 J.D. 샐린저를 모델링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왜냐하면 샐린저 또한 아내와 이혼하고 1968년 이후 실제로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은둔의 삶으로 사라진 인물이기에 그렇다.

영화의 주인공이 본서의 저자를 염두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진위는 알 수 없지만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독자는 왜 저자가 은둔의 삶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까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본서를 통해 어렴풋이 발견하게 되는 작가의 사고와 정신의 한 편린을 볼 때 본서의 내용과 작가의 삶이 어느 정도 중첩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모든 사물과 세상, 인간에 대한 그 중2병적 사고와 관점으로 똘똘뭉친 주인공 콜필드에게 그의 여동생 피비가 "그럼 도대체 오빠가 되려고 하는 것은 뭐야?" 라고 물었을 때 콜필드는 "착한 어린이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게 그들을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 인간 정신의 순수함이 사라진 세대 속에서 어쩌면 콜필드의 생각은 우스꽝스러운 광대와 같은 사고이며 4차원적 의식 속에 살아가는 이방인과 같은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콜필드가 말하는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선한 의식을 지닌 인간을 이상하게 여기는 기존 세상이 가지는 목소리와 의식이 더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것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아마도 샐린저는 바로 이와 같이 병들고 비뚤어진 세상에 대한 반감과 염증을 안고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숨은 것은 아닐런지...

입술에서는 온갖 욕설과 비속어가 튀어나오지만 어린이들이 지나다니는 복도 벽에 적힌 음담패설을 지나치지 못하고 애써 지우려고 노력하는 주인공 콜필드의 진짜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사는 현실 세상 속에도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함을 느끼고 싶다면 단연코 이 책은 일독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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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벤허 (1900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그리스도 이야기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루 월리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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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좋은 책들이 정말 많다. 그렇기에 매일 매일 셀 수 없을 정도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서점가의 신간 코너에서 독자는 어떤 책을 읽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한다. 다양한 분야 속 다채로운 주제의 책들 그리고 이름이 알려진 관록의 작가들과 이제 새롭게 도전장을 내민 신예 작가들의 책까지 정말 많은 책들이 독자의 선택을 기다린다. 그러나 명불허전이라는 옛말이 건재하듯 오랜 세월 세대를 뛰어넘어 많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사랑받아 왔던 책들은 있는 법. 오늘 리뷰하게 되는 책, '루 월리스'의 <벤허>야 말로 명불허전에 딱 맞는 바로 그러한 걸작 중의 걸작이다. 요즘 폭넓은 독자층으로부터 오랜 시간 사랑받고 있는 고전문학 작품들을 출간 당시 초판본 커버 디자인을 그대로 살려서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 '더 스토리'의 초판본 시리즈가 인기다. 본서도 바로 이 초판본 시리즈 기획 제작의 한권으로서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아주 오래 전 성탄절이 되면 특선영화로 방영되곤 했던 영화 <벤허>는 많은 영화팬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명작이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빛바랜 컬러 TV를 통해 본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역동적이고 스릴 넘쳤던 원형 경기장 안에서의 전차 경주씬이다. 이 장면은 요즘의 블록버스터와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화면을 압도하는 전차마들의 무시무시한 질주와 그들이 일으키는 흙먼지, 기수들의 살기 어린 눈빛과 경기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관중들의 외침과 환호성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 영화 <벤허>의 스펙타클한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벤허>는 1880년 미국의 정치가이자 작가인 루 월리스에 의해서 쓰여진 장편 역사 소설이며 위에 언급한 영화 <벤허>는 바로 이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되어 아카데미 11개 부문 상을 휩쓴 명작이다. 소설은 기독교적 배경 속에서 '벤허'라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기록한 일종의 대서사시와 같다. 벤허(BEN-HUR), '벤'은 히브리어로 아들이라는 뜻으로서 직역을 하면 '허의 아들, 허 가문의 아들' 이라는 의미다.

주인공은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의 압제하에 있던 당시 예루살렘 부유한 유대 왕족 '허' 가문의 아들 '유다'이다. 사건의 발단은 유대지역의 신임 로마 총독으로 부임하는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의 행렬을 자신의 집 옥상에서 구경하던 중 낡은 타일이 떨어져나가면서 운 나쁘게도 그것이 그라투스 총독의 머리 위로 떨어지게 된다. 말에서 낙마한 총독은 가벼운 부상을 입지만 유다는 총독 암살 혐의를 받고 현행범으로 체포되고, 자신의 사랑하는 어머니와 여동생 티르자 마저 로마군에게 붙잡혀가는 비극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을 옆에서 방조하며 아니 더 부추기며 유다와 그의 가족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은 다름아닌 유다와 어린시절부터 죽마고우로 지냈던 로마인 '메살라' 였다. 도움을 요청하는 유다를 뿌리치고 오히려 더욱 더 단호하게 유다와 그의 가족을 총독 암살범으로 몰아가며 그가 얻고자 했던 것은 명예와 권력 그리고 허 가문이 가진 막대한 재산이었다.

이렇게 유다는 총독 암살범이라는 누명을 쓴채 로마 해군의 갤리선 노잡이 노예로 끌려가고, 어머니와 누이 티르자 또한 생사와 행방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됨으로서 하루아침에 정상적인 가정의 행복은 산산조각 나버린다. 이후 벤허 유다는 갤리선 노잡이 노예로 죽음과 같은 3년여의 시간을 보내며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어느날 그가 탄 배가 그리스 해적선과의 전투 도중 침몰하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유다는 익사 직전에 있던 로마 해군 총사령관 퀸투스 아리우스를 건져내어 그의 생명을 구한다. 이후 승전보를 안고 로마로 개선한 아리우스는 유다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 모든 부와 명예를 상속시킨다.

유대 왕족에서 갤리선 노예 그리고 다시 부유한 로마 귀족이 된 벤허에게 이제는 오직 두가지의 삶의 목표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파멸에 이르게 한 옛 친구이자 이제는 그의 원수가 된 비열한 로마인 메살라에 대한 원한과 복수, 그리고 생사를 알 길 없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는 일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벤허는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유무형의 도움을 받으며 잠시 언급한 영화 벤허의 명장면 중 하나인 전차 경주를 통해 마침내 그렇게도 바라던 원수 메살라를 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꺽어버림으로 통쾌한 복수극의 방점을 찍는다. 이 경주의 과정 중 전차에서 낙마한 메살라는 뒤따르던 다른 기수의 말과 전차에 깔려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고, 생명은 건지지만 하반신 불구라는 죽음보다 끔찍한 장애를 입게 된다. 더불어 자신의 승리를 오만스럽게 낙점하며 전 재산을 스포츠 토토하듯 내걸었던 메살라는 패배로 인해 모든 재산을 잃게 되는 인과응보의 살아있는 표본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개인적인 복수를 완성한 유다의 분노어린 칼끝은 이제 그의 가정과 자신의 민족을 압제하는 로마 제국 전체를 향한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어느 비범한 사람과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로마 제국을 향해 피의 복수를 꿈꾸고 계획하던 벤허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그분은 왕이 되는가가 아니라 어떤 왕이 되는가의 여부를 궁금케 만든 사람이다. 벤허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그분을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 민족을 해방시킬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지도자로 이해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께서 로마 제국에 대해 거사를 일으킬 때 자신 또한 그동안 갈고 닦았던 무예와 병법으로 왕을 도와 로마 제국 타도의 최전선에 서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대목에서 복음의 신비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논란은 지금 이 세상 속에서도 여전하기에 벤허가 살았던 당시는 더욱 더 미스테리한 주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간이 필멸의 육체와 불멸의 영혼, 두 가지가 하나로 합해진 존재임을 모르거나 이해못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벤허의 추측과 생각이 핀트가 나가도 한참 잘못된 방향으로 벗어났음을 독자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780여페이지의 어마무시한 두께, 책마니아들의 농담으로 벽돌책이라고 불리는 대작이 가지는 문학적 가치와 책이 뿜어내는 진중한 무게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리뷰의 서두에서 말한대로 정말 좋은 책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책을 표현하는 미사여구가 빈약할 따름이다. 로마로부터 가족과 재산, 자신의 인생까지 송두리채 빼앗긴 벤허라는 캐릭터가 표현하는 전반적인 느낌은 뼈에 사무치는 원한과 혈관을 얼어붙게 만드는 복수에 대한 갈망이며 동시에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애뜻한 연민이자 그리움이다. 그러나 본서는 벤허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룸과 동시에 2천년전 유대땅에 성육신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기록해나간다. 그렇기에 눈치가 빠른 독자는 본 소설이 일종의 '투 트랙'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 벤허의 이야기와 성경 속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사건이라는 2개의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마치 씨줄과 날줄로 엮이고 중첩되어지듯 맞물리면서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책을 통해서 '루 월리스'의 작가적 역량에 대해 무한감탄하며 읽었다. 본서를 단지 기독교적 색채를 띤 종교소설 정도로만 이해하면 이 책을 한참 오해한 것이다. 그리스도 탄생 당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집트, 로마,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까지 근동 지방의 인문적 특색과 문화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작가의 방대한 역사적 배경 지식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렇기에 본서는 단순 종교적 색채를 띈 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와 시대적 배경이 어우러진 인문고전으로서 평가하기에도 결코 손색이 없다.

몇일동안 새벽잠을 반납하며 읽는 중 가장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던 장면은 그라투스 총독 암살범의 누명을 쓰고 갤리선 노예로 끌려가던 벤허와 이름모를 어느 갈릴리 청년의 조우였다. 갈증 속에 허덕이며 개처럼 끌려가던 벤허에게 다가와 물 한잔을 건네던 이 청년은 다름아닌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예수였다. 그리고 이 장면은 8년이 지나 골고다라는 언덕에서 동일하게 재연된다. 단지 물을 건네는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던 예수에게 벤허는 자신에게 물을 건네셨던 예수를 기억하며 포도주를 건넨다. 갤리선 노예로 끌려가던 벤허와 청년 예수의 만남은 작가 루 월리스가 만들어낸 완벽한 복선이다. 소설의 한 측면이 워낙 성경에 기반하고 있기에 마치 실화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적이지만 픽션임을 감안한다해도 작가가 어떻게 이런 허구적 복선을 완벽하게 구상했을까 생각하니 다소 소름끼치는 전율과 감동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는내내 개신교 신자로서 깊은 감동의 연속이었다. 비단 종교를 떠나서도 흥미로움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는 책이 많지 않은데 이 책은 그러한 독자의 두가지 욕구를 모두 만족시켜주기에 충분한 저작이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아직 읽어본 적 없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단연코 서점 장바구니 구매 1순위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원한과 복수 그리고 사랑으로 승화되어 그 모든 미움과 증오를 이기는 진정한 힘의 실체를 깨달은 한 남자의 인생 드라마는 여전히 반목하고 미워하며 질투하고 질시하는 깨어짐과 투쟁이 일상화 되어버린 현대인들의 가슴에 잔잔하면서도 깊은 감동과 따뜻한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더 스토리 출판사의 초판본 시리즈 <벤허>와 함께 따스한 봄 햇살 속에서 한권의 고전이 주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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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페스트 (양장) - 1947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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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희망찬 막을 연 인류가 맞닥뜨리게 된 불행 중 하나는 전염병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그리고 지금의 혼란스러운 세계상을 대변하는 코로나19이다. 세계보건기구가 팬데믹을 선언하게 만든 이 전염성 질환으로 인해 대한민국을 포함한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즘 적실성 있는 책 한권을 만난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에 부합하는 오래 전 출간 된 이 책의 소환은 시대의 당연한 요구로 인한 것이 아닐까?

 

<이방인>으로 알려진 20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한명인 '알베르 카뮈'의 작품인 <페스트>는 1947년 세상에 빛을 보게 된 너무나 유명한 저작이다. 이 책의 배경은 프랑스 소재 작은 시골 마을 '오랑' 시이며 대략적인 줄거리는 그곳에서 발병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흑사병, 즉 페스트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세 유럽 전체 인구의 1/3의 목숨을 앗아간 전무후무할 정도의 살상력을 지녔던 페스트가 20세기 중반 '오랑' 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을 덮친다. 무미건조할 법한 일상의 반복이 쳇바퀴 굴러가듯 이어지던 이 마을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은 페스트로 인해 하루아침에 오랑은 더 이상 평범함을 꿈꿀 수 없는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저자는 책을 통해 몇몇 주된 인물들의 심리와 심경의 변화를 토대로 페스트를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삶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들추어내는 작업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이야기의 중심에 선 인물인 의사 리외와 그의 이웃이자 친구인 타루, 성직자인 파늘루 신부, 취재차 오랑을 방문했다가 오랑시의 모든 관문이 폐쇄되는 조치로 인해 발목이 붙잡혀 버린 기자 랑베르, 시청의 말단 서기 그랑.

 

각양 각색의 인물이 가지는 그 독특한 분위기를 살려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카뮈가 가지는 그 문학적 천재성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전작 <이방인>을 통해서도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탁월함을 드러낸 바 있기에 본서를 통해서도 카뮈는 그가 창조해 낸 다양한 인물들의 심경을 세밀한 터치로 묘사함으로서 정적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원초적 긴장감을 선사한다. 마치 책장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을 때 보고 싶지 않은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그 저릿한 감정의 곡선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카뮈의 탁월함을 엿보게 된다.

 

책의 말미에 제공된 역자해제는 독자들로 하여금 제시된 해답지와 같이 작가인 카뮈가 본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된 메시지를 발견하는 손쉬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코로나19와 같은 지금의 시국에서 이 책을 집어든 독자의 의도가 재미와 궁금증이라는 다소 가벼운 마음에 기인했든 아니면 무엇인가 책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기대하는 연약한 마음에 기인했든 이 책을 펼쳐든 이상 독자의 의무는 카뮈가 전하는 정답을 잠시 덮어둔 채 독자로서의 주체성을 지키며 자신만의 비판적 의견과 생각을 능동적으로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랑 시는 페스트로 인해 모든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금지된 채 도시의 관문이 모두 폐쇄되는 극단의 조치가 취해짐으로서 들어갈 수도 없고 나갈수도 없는 말그대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어버린다. 수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의 희생양이 되어가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페스트에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인 타루가 이야기하는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웃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 이 이웃이 당신 모르게 페스트를 건넬 수 있고, 당신이 포기하고 있으면 그 기회에 당신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 "절망에 익숙해지는 것이 절망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다." 평화롭고 한적한 시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적 의심과 불신의 포비아! 어제까지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나누었던 나의 이웃이 나에게 페스트를 전염시킬 수 있는 잠재적 위험요소로 둔갑하게된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카뮈는 너무나도 담담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라는 명제에 화답이라도 하듯 사회적 절망에 대한 경고의 문구까지 참으로 친절(?)하기만 하다.

 

또한 타루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인간이 가진 병적 이기심을 꼬집는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형선고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것을 물리침으로서 살인을 물리치게 된다...(중략) 사람들의 숙면이 페스트 환자들의 목숨보다 더 신성하죠. 선량한 사람들이 잠자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랑 시는 관문 폐쇄와 격리라는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사형을 선고받았다. 오랑 시를 제외한 페스트에 감염되지 않은 선량한(?)사람들의 숙면, 그들의 행복은 페스트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불행과는 상관없이 지켜져야 한다는 집단적 이기심의 발로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폐쇄와 격리라는 사형선고를 합리화시킨다. 다른 이들의 죽음과 불행을 방관하고 방임하는 것에 대한 책임에서 누구하나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오랑 시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자들이 정신적 페스트에 걸린 자들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유무형의 페스트에 감염된 자들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물리적인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기에 존재 자체가 건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으로 타루의 이야기는 우리의 텅빈 사고를 단단한 목공용 망치로 후려치는 것 같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각자가 그것을, 페스트를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중략) 감염균을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붙이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 다른 이들을 감염시키지 않기 위해 가능한 방심하지 않아야하고, 의지가 있어야 하고 긴장해야 한다. 페스트 환자로 있는 것도 피곤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더 피곤한 일이다." 카뮈가 선택한 소설의 소재는 물리적 질병의 하나인 페스트였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진의는 비단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성 말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지옥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 모두의 혈관 속에 흐르는 그 추악하고 더러운 반인륜적이며 부도덕한 인자에 대한 꼬집음이다. 타락한 인간성에 기인하는 이러한 패륜적 이기심이 인간군상 누구에게나 항존한다는 이 거부하고만 싶은 현실의 민낯을 카뮈는 페스트라는 전염병을 메타포로 사용하여 훌륭하게 고발한다. 인간 내면의 도덕 기준의 부재로 발현한 질병을 다른 이들에게 감염시키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자발적 격리의 몸부림은 타루가 말한대로 페스트 환자로 있는 것보다 몇배는 더 피곤한 일상의 작업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고통으로 인해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은 죽음 외에는 해방의 길이 없다고 말했지만 소설의 결말이 인간에게 남겨진 한가닥의 소망을 지향하기에 독자 또한 인간성 회복의 싸움을 위한 손을 쉽게 떨굴수는 없는 것이리라.

 

출근을 하고 학교에 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던 너무나 당연시 여겼던 요즘 우리네 잃어버린 일상에 대한 그리움과 평범함을 향한 감사의 마음은 일상성의 회복이라는 염원으로 귀결된다. 또한 소설 속 폐쇄된 공간 오랑 시의 모습 속에서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희미한 모습으로 오버랩되어 다가온다. 아울러 책을 덮으며 작년에 완독한 카뮈의 전작 <이방인>의 어렴풋한 향기를 느낀다. 책의 곳곳에 숨어있는 전작의 체취를 통해 카뮈가 추구하는 기성 체계의 완고함에 대한 반항과 현실의 물줄기를 역행하고자 하는 투쟁의 사고를 엿보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결코 순응할 수 없고, 순응하고 싶지 않은 카뮈의 작가 정신이 투영된 <이방인> 그리고 <페스트>를 통해 코로나19라는 결코 굴복하고 싶지 않은 전염병이 가진 그 이면의 의미를 찾아가보는 것이야말로 격리된 듯한 단조로운 일상 속에 흥미로움을 선사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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